2024,April 20,Saturday

거리의 히어로 제 3편

윙후에 Nguyễn Huệ

역사를 배우며 핫이슈까지

프랑스 식민시절 Nguyễn Huệ 길이 있던 자리는 사이공 강변에서 호찌민시 인민위원회까지 이어지는 Chợ Vải 운하가 흐르고 있었다. 이 운하를 통해 상인들은 옛 Bến Thành 시장까지 물품을 운송하곤 했으며, 때때로 군사이동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편 당시 이 수로의 이름은 Charner였는데, 1887년 운하를 메꾸어 도로로 만든 이후에는 프랑스 해군음악대의 연주에 맞추어 군대가 주요 연례행사 때마다 이 길을 행진하는 등 당시에는 주로 공공목적으로 이용되었다.

한편 이 길이 Nguyễn Huệ 길로 개명된 이후에는 대대적인 단장과 보수공사를 통해 사이공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되었다.

 

청의 30만 대군을 하루만에 무찌른 백전백승의 용장 윙후에 Nguyễn Hu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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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인민들 사이에 신출귀몰한 용병술로 백전백승 적을 물리친 지장이자, 걸출한 민족의 영웅으로 통하는 윙후에는 광쭝황제(Quang Trung Hoàng đế, ~1792)의 다른 이름이다. 그의 생부는 본래 응에안 사람이었는데 따이선 지역으로 강제이주 당해 따이성 지역에 내려와 살기 시작했다. 7남매의 막내였던 그는 1771년 형들과 남부 일대를 지배하던 윙씨의 전횡에 맞서 봉기하여 권문세가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일약 민중의 영웅이 되었다. 또한 1782년에는 윙가와 연합세력인 태국군 20만을 섬멸하고, 또 다시 북부 찐 씨의 세력을 몰아내 북부 일대 장악하기도 했다. 한편 1788년 탕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100여 마리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청군을 공격, 단시간에 30만 명을 섬멸한다.

 

당시 따이성 군이 야간에 청군의 진지를 급습하자 저들은 ‘귀신부대가 나타났다’면서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났고 이후 추격하는 따이성 군에 의해 거의 섬멸당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황제에 오른지 4년만인 1792년 병사하며, 이후 삼삼오오 분열이 일어나고, 그로부터 다시 수년 후인 1802년 윙왕조의 초대 황제인 야롱에게 붙잡혀 능지처참을 당한다.

 

세계 최강 건륭 황제가 통치하는 청나라와 싸울 때 스스로 황제라 그들에게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월등한 전략과 전술로 단 하루만에 청군을 무찔러 다시는 베트남을 넘보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아 베트남 1천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영웅이 되었다.

2015년 오늘 날 윙후에 거리

윙후에 대로는 최근 새롭게 단장해 윙후에 광장과 산책로로 거듭났다.

(670m, 넓이60m) Cây Liễu 로타리를 중심으로 단장된 이 길에는 새롭게 만든 2m 높이의 우람한 호찌민상이 수호신상처럼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바닥은 고급 화강암으로 처리해, 한층 고급스런 느낌이 난다. 이곳에는 첨단 음악분수, 화려한 야간 조명이 설치되어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이곳을 찾는 국내외 방문객들로 늘 붐비며, 해마다 열리는 주요 연례행사 장소, 박람회, 전시회 공연장 등의 용도로 사용된다. 특히 봄에는 길 전체가 갖가지 아름다운 꽃길로 단장해 호찌민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오늘 날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한 윙후에 거리의 명소들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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