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March 29,Friday

베트남 혁명의 시초가 된 역사의 거리

Nam Kỳ Khởi Nghĩa 남끼커이냐 거리

끼 (Nam Kỳ;코친차이나 = 남부 베트남) 지역의 ‘봉기’란 뜻의 남끼커이냐 도로는 사이공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길 가운데 하나다. 이 거리는 프랑스 통치기 때는 26번 도로, 1865년 2월부터는 Impératrice, 1870년에는 Mac Mahon거리 등으로 불렸으며, 그 이후도 시대적 상황에 따라 명칭이 여러 번 바뀌다가 마침내 1975년 9월 14일 남부 해방 직후 Nam Kỳ Khởi Nghĩa거리로 명명되었다. 하지만 1985년 4월 4일부터 꽁리교에서 떵성녁 공항까지 이어지는 구간을 윙방쪼이거리로 명명함으로써 도로가 둘로 나뉘었다.

1940년 11월 프랑스 식민정권과 일본 파시스트에 항거하여 일어난 남부지역의 봉기로, 당시 동양공산당 Nam Kỳ지역위원회가 주도했다. 역사가들의 설명에 의하면 1939년 9월,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식민 세력은 인도차이나 혁명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면서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인력과 재화를 얻기 위해 베트남에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그들의 제국주의 전쟁으로 당시 전쟁 중에 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행해진 약탈과 착취와 테러는 인민이 자발적으로 혁명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제국주의 세력을 타도한다는 대의는 혁명의 최우선적인 과제가 되었다. 그 결과 1939년 11월, 쟈딘성 학몽에서 윙반끄(레유언, 팡당르우, 보방떵 등이 참석한 가운데 당 중앙위가 개최되어 민족해방을 결의했다.

한편 1940년 6월 독일 파시스트들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일본 파시스트들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공격했는데, 당시 베트남 인민은 양국에 항거하여 전인민의 독립과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는데 그 시발점이 바로 1940년 9월의 박성(Bac Son) 항쟁이며, 그 뒤를 이어 1940년 11월 남끼 그리고 1941년 1월에는 도릉에서 군인들의 봉기를 일으켰다. 이는 전국 규모로 일어나는 총궐기의 전초이자 인도차이나반도에 혁명의 시기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PDF 보기

3

user image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Copy Protected by Chetan's WP-Copyprot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