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August 5,Thursday

성급한 봄날 의 주절거림

매년 이맘때가 되면 어김없이 경기도 분당에는 청주 한씨 이자, 가내 명칭으로 종성 한씨 13대 손, 한수현 목사의 직계자손이 모두 모인다. 이렇게 말하면 대단히 거창한 가족이 왕창 다 모이는 대규모 행사인 것 같지만, 멀리 함경도 종성에서 해방 후 내려온 탓에 친척이라고는, 남쪽에 계시던 고모와 작은 아버님의 가족이 전부인데, 그 어른들이 돌아가신 이후로 자연스럽게 교류가 뜸해지고 이제는 집안의 어른이라고는 94세의 우리 어머니가 ‘유일하시다’ 보니 온 가족이라고 해봐야 노모가 키우신 우리 7남매가 이룬 가족, 한 30여명이 전부다.

여기서 잠시, ‘유일하다’ 라고 쓰는 것이 맞을 것인가 ‘유일하시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상인가에 대하여 생각을 해봤다. 무작위의 독자를 상대로 쓰는 글이니 웬만해서는 등장 인물에 존칭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라고 믿고는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어른을 공경하는 예의지국에서는 94세나 되는 분의 존재에 존칭을 붙인다고 해서 시비 걸 사람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유일하시다’라는 존칭을 사용했다.
이미 제목과 글의 흐름을 보고 눈치를 챈 양반들도 계시겠지만, 오늘 글은 좀 자유롭게, 편하게, 격식 없이, 봄바람이 부는 대로 따라 쓰기로 작정한 글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읽어 주시기를 바란다.
다시 첨으로 돌아가자. 왜 이맘때는 한씨 가족이 이렇게 다 모이는가? 바로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신 노모의 생신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올해 94세가 되시는 모친의 생신은 한 해가 소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웬만한 일을 핑계로 이때 합류를 안 한다는 것은 우리 집안의 일원으로서 디스쿼리파이 당할 수 있는 중차대한 반역행위가 될 수 있기에 평소에 미국 홍콩 베트남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가족이 이때는 다 함께 모이게 된다. 물론 생업에 목숨이 달린 미국의 조카들은 좀 예외이긴 하지만 이미 은퇴를 한 우리세대의 형제들은 얄짤없이 몰려들어 일년 만에 재회의 기쁨을 맛보는 즐거움을 덤으로 가진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즈음에 이 글을 쓰는 인간의 생일이 함께 껴있는지라 모친 생신 잔칫상에 젓가락 하나 더 얹어두고 온 가족으로부터 과분한 축하 인사를 받을 수 있으니 이것 역시 모친의 은혜다.
그것도 새싹이 움트는 봄날 이런 집안행사가 있으니 계절도 인지 못하는 곳에서 묻혀 살고 있는 이 인간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계절에 한국을 들리면 베트남의 흔적이 많이 떨어져 나간다. 그래서 좋다. 한 20여년 베트남 생활이 주(主)가 되다 보니 온통 머리 속에 <씬짜오> 라는 인사이자 우리 잡지 이름.
하지만 영원히 익숙할 것 같지 않은 언어에 묻혀서 거북한 대화를 감수하며 마음을 달래며 살아야 하는 생활에서 벗어나, 마치 벗겨지지 않은 살결같이 친숙하던 그 시절 그 동네로 다시 돌아온 듯하여 마음의 평화가 선물처럼 찾아 든다.
이 인간이 살고 있는 아파트 일층은 원래 인기가 없는 곳이라 그런지 덤처럼 주어진 듯한 작은 뒷마당이 있다. 따스한 봄 햇살의 부름에 슬리퍼만 신고 나가서 조금씩 초록이 움트기 시작하는 자연과의 만남도 이 계절에 느낄 수 있는 소박한 즐거움의 하나다. 그 작은 마당에는 대표적인 봄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목련, 매화, 산수유 그리고 아파트 중앙 공원에 널려있는 듯이 퍼진 개나리까지, 겨울을 보낸 전령들이 잎도 없이 성급하게 꽃망울을 밀어내는 것을 보고 있자면 문득 왜, 이런 봄 나무들은 새잎이 돋기도 전에 꽃부터 피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또 고개를 든다. 이미 수년 전부터 머리 속에 묻고 있었던 의문이다. 한국 최고의 대학에서 생물을 전공한 누님에게 그 이유를 물어도 ‘원래 그런 거 아냐’ 하는 민숭한 답이 고작이다. 그래서 60이 넘으면 다 평등해진다. 그 잘난 학식마저도.
누가 아시는가?
왜 봄 꽃들은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나는지?
이 작은 마당 한 곁에는 10년전 묘목으로 심겨진 목련나무가 이제는 장성한 모습으로 가지 가지마다 하얀 함박꽃을 걸어놓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외롭게 서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김영랑의 <찬란한 슬픔의 봄>이란 시에서 첫 구절이다.
제멋대로 생각이 굴러간다. 저 하얀 목련이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영랑은 왜 모란이 피기까지 라고 했을까? 모란이 슬퍼 보일까? 내 눈에는 목련이 훨씬 더 슬퍼 보인다. 모란은 이미 시녀들을 잔뜩 거느린 의장된 여왕의 자태와 같지만, 목련은 시종도 없이 하얀 잠옷만 걸친 채 봄바람이 부르는 소리에 성급하게 맨발로 내쳐 나온 민낯을 한 공주의 모습이다. 어제 밤 꿈에 보인 왕자의 음성이 봄바람을 타고 들려온 것일까?
봄꽃이 슬퍼 보이는 이유는 단지 모습에서만은 아니다. 그 이유를 알고 나면 더욱 처절한 아픔이 가슴을 저미게 만든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슬픈 사연을 안고 산다.
추운 겨울을 지내며 잔뜩 움츠린 그들에게 갑자기 봄바람이 불고, 햇살이 가까이 다가오며, 기온이 올라가자, 기온의 변화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죽기 전에 자손을 번식하자는 의도로 겨우내 축적해 둔 모든 에너지를 사용하여 잎을 먼저 피우는 순서마저 생략하고 꽃부터 피워 열매를 맺게 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우연히 오늘 아침 모 신문에서 알려줬다.
요즘은 한국에 미세 먼지가 많아지자, 소나무에 솔방울이 더욱 많아졌다고 한다. 미세먼지로 공기가 오염되자 소나무마저 생명을 다 하기 전에 더 많은 자손을 남기려는 생존의 몸부림이란다.
베트남에서 온 이 인간도 오자마자 미세먼지 탓인지, 기온 차로 인함인지, 목 감기로 잔뜩 부운 편도를 안고 며칠을 고생하며 병원에 다닌다. 아, 그럼 죽기 전에 나도? 아서라, 이미 다 넘어간 주제 아니더냐?
봄날 여왕벌 같은 모친을 중심으로 온 가족이 모여 건강하게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또 봄나무들의 살아가는 법칙도 깨달았으니 이만하면 한국에 온 충분한 대가는 받은 셈이다.
그런데 베트남 인간이 숙주가 되어 퍼뜨린 목 감기에 마눌님도 아들애도 고생을 한다.

봄날이라며 냉이국을 내주며 엄한 말투로 던지는 마눌님 결론,
“그려, 이 참에 건강진단도 좀 받고 몸도 좀 챙겨 나갑니다. 알겠습니까?”

이 말투를 듣고도 눈만 껌벅거리며 맹숭한 저 분,
한국 좀 다녀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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