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June 18,Friday

베트남 건국시조 흥왕제사 황금연휴 4월 16·17·18일

음력 3월 10일, 베트남 국조, 흥왕 제사

올해 음력 3월 10일, 즉 2016년 4월 16일은 베트남 건국시조인 흥왕의 제삿날(Giỗ Tổ Hùng Vương 2016)이다. 특별히 이번 국경일에는 토요일부터 시작되어 다음주 월요일까지 공식적으로 3일간 연속 쉴 수 있어 근로자들이 한껏 기대에 들떠 있다. 한국의 ‘단군’에 해당하는 베트남의 시조이자 국조인 훙왕 (Hùng: hùng은 웅(雄), 즉 영웅, Vương은 王이란 뜻)을 기리는 제사일을 ‘요 또 흥붕'(Giỗ tỗ Hùng Vương: Giỗ는 제삿날, tỗ는 선조, 조상, 국조, 시조 등의 의미)이라고 한다.

Giỗ Tổ Hùng Vương 2016

수천 년 동안 베트남인들은 매년 음력 3월 10일이 되면 ‘천룡의 후예’를 자부하는 베트남 사람들이 전국각처에서 한 곳 흥(Hùng: 雄, 즉 영웅호걸이란 뜻) 사당으로 모여들어 최초의 고대 베트남 국을 창설한 18대 왕들께 참배를 올린다. 이번달 16일에도 흥왕 축제의 총본산인 푸토 (Phú Thọ)성, 비엣찌 (Việt Trì) 시, 히끄응 (Hy Cương) 읍, 응이어린 (Nghĩa Lĩnh) 산 정상에 위치한 흥(Hùng) 사당에서는 중앙정부 지도자 및 푸토성 지도자들이 대거 참가하여 제사를 성대히 거행할 예정이다.

해발 300m의 나즈막한 산 위에 자리한 사당에는 ‘南越肇祖(남월조조), 즉 ‘베트남의 시조’라는 현판이 붙어 있어 흥왕이 베트남의 건국시조임을 밝히고 있다. 예년의 경우를 보면 해마다 전 세계 15개국에서 참가한 재외동포 수백여 명과 전국각처에서 온 정치 지도자 수천여 명이 참석했으며, 이들은 아악과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당 정문, 하 (Hạ: 下) 사당, 쭝 (Trung: 中) 사당을 차례로 지나 마침내 투옹(Thượng: 上) 사당으로 올라가 국조께 정중히 분향하곤 한다. 올해도 흥왕 사당에서는 수만여명의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모여 전통 떡인 반쯩(Bánh Chưng)과 반야이(Bánh Dày)를 바치며 조상의 공덕을 찬양하고 자신들의 뿌리를 돌아보게 될 것이다. 또한 베트남 전국 54개 민족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벌어진 훙왕 가마맞이 의식을 통해 민족의 단결과 단합도 촉구할 예정이다.

이번호에서는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베트남 최초의 통일왕조를 이룩한 딘 왕조에서 막왕조에 이르기까지(965~1592년) 600여년간의 파란만장했던 베트남 봉건왕조시대를 소개하고자 한다.

베트남 역대왕조 2부

영고성쇠의 파노라마  봉건시대의 베트남왕조

지난 호에 잠깐 살펴본 대로 응오 왕조의 왕 응오쑹반(Ngô Xương Văn)의 사망 후인 965년부터 반란이 일어나자 딘보린은 이들을 하나씩 물리쳤고, 마침내 만승왕(萬勝王 Vạn Thắng Vương)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968년 베트남을 통일한 후에 그는 황제 딘띠엥호안(Đinh Tien Hoang)으로 즉위하여, 국명을 다이꼬비엣으로 바꾸고 국호를 타이빈(Thái Bình), 도읍지를 호아르(Hoa Lư)로 삼았다. 하지만 딘보린은 즉위 후 14년 째인 979년 장자인 딘리엔에게 암살되었다. 딘리엔은 막내아들인 딘또안(Đinh Toàn)을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결국 자신도 반대세력에 의해 숙청을 당하고 만다. 딘또안이 6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송나라가 침입했고, 그 사이 병권을 잡은 레호안(黎桓Lê Hoàn)이 왕권을 찬탈하고 레 왕조(Lê)를 연다.

전레 왕조(Nhà tiền Lê:980~1009년)

레호안(Lê Hoàn: 재위 980~1005)이 호아르에 세운 왕조로 베트남이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한 뒤 아직 국가적 기반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시대의 단기왕조다. 그는 980년 해상과 육상으로 침략해 오는 송나라의 군대를 모두 격퇴하여 나라를 구한 후, 제위에 오르며, 이듬해 참파(Champa)의 수도 인드라푸라(지금의 광남성)를 점령하는데, 이는 남쪽으로부터 계속되던 외세침략의 위험을 제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왕조는 기반이 굳건하지 못하고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해 레호안, 즉 레다이한(Lê Đại Hành)에서 롱비엣(龍鉞:1005), 롱딘(龍鋌:1005~1009)으로 불과 3대로 멸망하고 만다.

리 왕조(Nhà Lý:1010~1225년) 

리 왕조(Nhà Lý) 또는 이조(Lý Triều, 1009년~1225년)는 봉건시대 베트남 왕조로, 수도는 하노이다. 리 왕조는 9대 217년에 이르는, 베트남 사상 최초의 장기정권이었다. 1009년 북부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던 전레 왕조의 장군 이꽁우언(Lý Công Uẩn)은 군권을 장악해 레 왕조를 무너뜨리고 리 왕조를 수립한다.

그는 1010년 수도를 호아르에서 탕롱(Thăng Long)으로 옮겼으며, 3대 황제인 리 성종은 1054년 국호를 대월(Đại Việt)이라고 했다. 리 왕조는 제4대 황제 인종의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당시까지의 베트남의 왕조는 북송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책봉 체제를 인정하였는데, 리 왕조는 베트남 왕조로서는 처음으로 이를 어기고 스스로 국왕을 결정하여 자주성을 보여 북송과 리 왕조 간에는 자주 외교적·군사적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리 왕조는, 1075년에 기선을 억제해 리트응끼엣(Lý Thương Kiệt)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송을 침공, 공략했다. 이후 베트남은 유리한 조건으로 송과 화친했고, 국경을 확정하는 것과 동시에, 국가로서의 위세를 나타냈다.
1174년에는 남송으로부터 안남 국왕으로 책봉되었고, 1175년, 영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제7대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고종의 연이은 실정으로 국내 각지에서 농민에 의한 반란이 다발해 왕조는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1210년, 고종이 죽자 혜종이 즉위했다. 그러나 혜종도 어리석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혜종의 외척 쩐투도(Trần Thủ Độ)의 권세가 커지게 되었다.
쩐투도는 1224년 혜종을 폐위하여 그 딸인 소황을 왕으로 옹립하고, 다음 해, 혜종을 자살로 몰아넣은 다음, 소황과 조카인 태종을 결혼시켜 태종을 황위를 양위하는
방식으로, 쩐 왕조를 열었다.

한 눈에 짚어보는 베트남 & 한국 역대왕국 변천사.

쩐(陳) 왕조 (Nhà Trần, 1225~1413년, 12대)

초기 쩐 왕조의 실질적인 창시자는 쩐투도(Trần Thủ Độ) 로, 자신의 조카를 초대 황제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태사가 되어 1264년에 사망할 때까지 실권을 계속 잡았다. 대몽골전쟁에서도 방계 황족과 그 사병이 항전의 주력이 되었다. 또한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과거제도 등도 실시되었다. 국력은 차차 충실해지고 민족적 자각도 높아져서 역사서적도 편찬되었는데, 그 중 대월사기가 유명하고 베트남 문자인 쯔놈도 만들어졌다.

몽골군의 침공 태종의 만년인 1257년부터 운남을 점령한 몽골군이 베트남 침공을 시작했다. 당시 몽골군의 목적은 남송을 남쪽에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태종은 군을 직접 인솔했고, 몽골군은 남송 방면에 진출했다. 제2대 황제 성종과 제 3대 황제 인종시대가 되자, 남송을 정복한 몽골로부터 복속 요구를 받게 되는데 성종은 이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이것 때문에, 1282년부터 1288년에 걸쳐 침공을 받게 되었지만, 명장 쩐흥다오 등의 활약으로, 산악지대를 기반으로 한 저항에 힘입어 독립을 유지했다. 이후 남쪽의 참파를 예속시켜 후에 지방으로 병합했다.

후기 쩐 왕조는 태상황제도, 근친혼 등에 의한 황족중심의 정치를 펼쳤지만 몽골군과의 전투 이후, 유력한 황족이 등장하지 않았고, 양일예에 의한 황족 대학살도 더해져, 쩐 왕조를 지탱한 황족 지배 체제는 크게 동요했다. 또한 제9대 황제 예종의 시대가 되자, 중신, 관료등의 배반이 이어지고 국위가 쇠퇴해져서 종종 참파의 침입을 받아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일이 잦았고, 쩐 왕조는 점차 쇠약해지기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와중에 예종의 외척, 호씨(胡氏)가 실권을 잡게 된다. 결국 1400년, 소제가 호꾸이리에 의해서 황위를 찬탈당하게 되어 쩐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 명나라의 영락제는 쩐 왕조의 내란을 구실로 삼아 군대를 파견, 베트남 전토를 점령했고, 교지 포정사를 두어 지배하게 된다.

호 왕조 (Nhà Hồ, 1400~1407년, 2대)

호왕조는 1400년부터 7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호꾸이리(Hồ Quý Ly, 1400)와 호한트응(Hồ Hán Thương, 1401~1407) 두 왕이 있었다. 1400년 호꾸이리는 왕을 왕좌에서 물러나게 한 후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하였고, 나라 이름을 다이비엣(Đại Việt)에서 다이응우(Đại Ngu)로 바꾼다. 그는 여러 개혁을 단행했는데 그 중 하나가 동전을 종이돈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하지만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1406년 중국 명나라가 Mộc Thạnh, Trương Phụ 등의 장군을 앞세워 침입, 왕과 수많은 귀족들을 중국으로 붙들어가고 송나라 왕은 남은 자리에 야오찌(Giao Chỉ)군을 두었다. 호 이후 중국의 Minh(1414~1417)왕조가
집권하지만 LamSon부대와 십년 남짓의 싸움 끝에 멸망, LamSon의 우두머리
레 왕조가 다시 집권하게 된다.

레 왕조 (Nhà hậu Lê, 1428~1527년)

15세기 초기 명나라는 베트남을 지배하에 두고 있었지만, 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나 1407년, 쩡 귀 코앙(Trần Quý Khoáng)이란 자가 의병을 일으켜 한때 세력이 내부 분열로 1412년 해산 당하고 만다. 하지만 1418년 윙 짜이(Nguyễn Trãi), 레 러이(Lê Lợi) 등이 람(Lam)산(지금의 Thanh Hóa)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처음 수천명에 불과했지만 수많은 난관을 극복한 끝에 최종적으로 명군을 완전히 국외로 축출하고 베트남의 독립을 회복한 후, 1428년 하노이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대월(大越)로 하여 레 왕조를 창시했다. 이를 흔히 후레(hậu Lê)왕조라 부르는데, 이는 레다이한(Lê Đại Hành)이 지배했던 전레(tiền Lê) 왕조와 구분하기 위해서다.
후레왕조는 Lê Thái Tổ (Lê Lợi), Lê Thái Tông, Lê Nhân Tông, Lê Thánh Tông, Lê Hiến Tông 등 5대에 걸쳐 나라를 통치한다. 하지만 레희묵(Lê Uy Mục)때부터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조정내 권신이 사병을 동원, 항쟁을 펼치게 된다. 이 상황에서 해양출신의 무인 막당용(Mạc Đăng Dung)의 전횡이 심해져서, 그 전횡에 신변의 위험을 느낀 소종은 궁을 탈출하여, 서경의 정수에게 도망간다. 그 결과 소종의 동생 공황제이자 허수아비 황제를 세운 막등용과 소종을 보호하는 정수의 사이에서 항쟁이 일어났지만 결국 1525년에는 소종을 연금하여 1527년 살해하는 것과 동시에 공황제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레 왕조는 멸망한다.

막 (莫) 왕조(Hà Mạc, 1527년 ~ 1677년)

막 왕조는 16세기 베트남 북부를 지배한 왕조다.
초기 1527년 권신 막등용은 공제를 폐위하고, 선양하는 방식으로 제위를 찬탈하였고, 여기서 후 레 왕조는 일시로 멸망하여 막 왕조가 건국되었다. 막등용은 즉위 직후는 레 왕조의 제도를 답습하여 민심의 통일을 도모하고, 1530년 막등용으로부터 제위를 받은 막등영은 법령을 정비해, 조세 부역을 경감한 것으로 국력이 안정되는 막 왕조의 전성기를 만들었다.

중기 레 왕조의 옛 신하인 완감은 막 왕조가 건국하면서 라오스 방면으로 피해서 라오스 국왕의 지원을 받고 반 막 왕조 운동을 전개하였고, 여녕을 옹립하여 막 왕조에 대항했다. 또 완감은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여녕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찬탈자인 막등용에 대한 토벌군 출병을 하는 등의 외교작전을 전개했다. 당시 명나라는 가정제가 통치하는 시대였고, 명나라는 모백온을 파견했는데, 막등용은 국내의 반대 세력이 배반을 두려워하여 명나라에 신속하게 항복했고, 명나라는 막등용을 안남도통사에 임명하였다. 이 사건으로 명나라의 국내의 반대세력이 강대해져서 사실상 베트남은 막 왕조와 반막왕조세력으로 양분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말기 1530년, 레 리(Lê Ý)가 탄 호아(Thanh Hóa) 에서 막(Mạc)왕조에 항거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만다. 한편 1532년, 레 찌우 똥(Lê Chiêu Tông)의 아들 윙 낌똥(Nguyễn Kim tôn)이 탄 호아(Thanh Hóa)성에서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레짱똥(Lê Trang Tông)이다. 이후 구 왕조의 옛 관리들이 그를 따르니 이때부터 북쪽의 막 왕조와 남쪽이 대립하기 시작한다.
이빡에 막 왕조에서는 막 복원, 막 무습이 즉위하여 정씨 일족과 항쟁을 계속했지만 1592년 정송에 의해 하노이를 공략당하고 막무습이 살해당함으로써 사실상 막 왕조는 멸망하고 만다. 그러나 막 왕조의 잔당은 그 후 청나라의 보호하에서 1677년까지 지방 정권으로서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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