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4,Wednesday

고정관념깨기 이쾌대

“조국, 민족, 해방, 계급, 혁명, 자유, 독립, 투쟁, 테러. 그딴 것 개나 줘 버려.” – 선우완
2007년에 방영된 드라마 ‘경성스캔들’ 의 첫 부분에 나오는 나레이션입니다. 1930년대의 경성을 배경으로 그 시대 청년들의 독립운동과 사랑을 그린 드라마입니다. 보통 일제강점기를 그린 드라마들은 시대가 시대인지라 암울하고 어두운 데에 비해 이 드라마는 독립운동 장면을 다룰 때에는 진지하다가도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가 나오면 유쾌하게 완급조절이 되어 있어 마지막 화가 나올 때까지 매 회 찾아서 보고, 기다렸다가 보고, 봤던 장면 또 보고 본 드라마입니다.
친일파 아버지를 두고 일본 유학을 갔다온 경성 최고의 바람둥이이자 모던보이 선우완이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둔, 단아하고 꼿꼿한 독립투사 나여경을 만나며 점점 성장하게 됩니다. 극 중 나여경의 별명은 ‘조마자’ 입니다. 조선시대 마지막 여자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리곤 했습니다. 서구 문물의 유입이 한창인 시기인지라 거리에 서양식 의복을 입은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로 북적일 때에 항상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어서 그런 별명이 생겼습니다. 머리도 전통방식으로 하나로 땋고 다니고요. 서양식 의복이 유행할 시기라 촌스럽다고 생긴 별명이지만 지금 드라마를 보는 저에겐 그 수수한 한복이 너무 예뻐 보였습니다. 이런 우리의 아름다운 한복이 등장하는 그림을 그린 한국 화가가 있습니다.
소개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이쾌대’ 화가입니다.
‘이쾌대’ 화가의 이름이 생소하지요? 그림에 비해 그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6•25전쟁을 모두 겪은 그는 월북을 선택해서 남한에서는 이름도 말할 수 없는 금기 화가가 되고, 북한에서는 김일성 정권을 따르지 않아 역시 금기 인물이 되었습니다. 남북한 모두 금기화가로 낙인찍혔던 것이지요.
그럼 이제 그의 작품을 볼까요?
이쾌대의 작품에는 한복을 입은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유학 시절부터 그는 인체를 주제로 한 그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림 속 인물이 그의 부인이었지만 점점 조선의 전통적인 여성으로 변화했습니다. 특히 그의 작품 중 ‘무희의 휴식’을 보면 작품 속 감상자를 응시하는 여인의 강인한 눈빛이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이쾌대 그림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입니다. 이 그림은 보면 볼수록 재미있습니다. 그림 속 인물이 한복을 입었지만 중절모를 쓰고 있고, 왼손엔 유화 팔레트와 기름통이 보이지만 오른손에는 동양화 붓을 쥐고 있고요.
배경은 모나리자의 구도와 비슷하면서도 조선의 논밭과 한복을 입은 여인들이 보입니다. 서양화 재료인 유화로 그려졌지만, 한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겨서 양쪽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는 느낌이 들어서 재밌습니다. 한국적인 서양화일까요? 서양적인 한국화일까요?
실제로 이쾌대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회화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관념적인 동양화의 구습을 벗고 서구 미술의 모방을 넘어 동서양의 미술을 융합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림 속 그의 눈빛에서 그의 신념과 확고한 의지가 보여 만난 적 없는 그의 성품도 느껴집니다.

다시 드라마 ‘경성스캔들’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극 중 겉으로는 그 시대의 최고의 기생이자 고위 관리자들이 드나드는 요릿집 주인이지만 사실은 비밀조직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차송주’ 가 이런 말을 합니다.
‘조국은 왜놈에게 짓밟혀 신음을 내도 청춘 남녀들은 사랑을 한답니다.’
이 대사가 저에게는 ‘조국은 왜놈에게 짓밟혀 신음을 내도 예술가들은 예술을 한답니다’라고 들리네요.
조국이 왜놈에게 짓밟혀 신음을 내던 그 시기에, 특히 일제 말기 가장 극렬한 군국주의 시대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젊은 예술가들의 소그룹을 결성하고 경성 한복판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던 ‘이쾌대’ 화가.
친일 미술이 판을 치던 그 시대에 꼿꼿하고 순수하게 자신의 길을 가며,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위해, 그들의 꿈을 위해 자신의 화실이자 미술연구소도 운영했던 이쾌대. 조금 늦게 그를 알았지만, 이제야 늦게 그의 그림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의 그림을 보며, 그가 응시하는 시선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하루를 살아가야겠습니다.

참고 문헌 거장 이쾌대 / 해방의 대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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