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4,Wednesday

꼭 알아야할 베트남 역사의 4가지 특성

베트남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같은 반도(半島)국가로 한국과 비슷한 듯 다른 베트남의 역사와 민족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이다.
인위(人爲, 중국을 의미)와 자연(自然)과의 투쟁역사로 불리우는 베트남역사, 그 특징은 대체로 4가지로 요약된다.

1천 년의 중국지배와 100년의 프랑스지배
먼저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이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과 이에 대한 극복 과정 그리고 한편 남진을 통한 영토 확장 과정이다. 먼저 기원전 111년 남비엣(Nam Viet, 南越)이 한(漢)나라에 멸망해 복속된 후 약 1천 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고 1857년 프랑스의 점령개시 이후 약 100년간 프랑스의 식민지시절을 겪은 바 있다. 외세의 오랜기간 지배역사를 가진 베트남은 중국, 몽골, 프랑스, 일본, 미국과 싸워 모두 격퇴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이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다.
쟈오찌(Giao Chi, 交趾)로 불리우며 천년에 걸쳐 지속된 중국의 베트남지배는 경제적 착취와 문화적 동화 정책 시행이라는 측면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 타국의 지배에 대한 무장 저항운동을 초래한 측면이 있다. 무장 저항운동은 몇 백년 시간동안 이어져 베트남인들의 정체성과 국민의식을 확립시켜 주었으며 독립된 베트남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되고 있고 이후 외세의 침입에 대항해 맞서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무장저항운동은 두가지 특색이 있는데 하나는 여성의 활약도 있었다는 점이고 하나는 게릴라전의 전통이 있다는 점이다. 서기 40년에 한나라에 대항, 봉기해 3년간을 지배했던 쯩니, 쯩짝 자매(소위 하이바쯩)의 봉기 그리고 248년 일어난 23세 여성 바찌에우의 반란은 베트남 여성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예다. 게릴라전에 능한 예로는 바익당전투를 흔히 예로 든다. 938년 응오꾸엔(Ngo Quyen)은 못 박은 말뚝을 바익당강 바닥에 설치해 놓고 한나라의 군사들이 강 어귀를 통해 베트남에 들어오도록 유인한 후 간조가 되자 베트남 군사들이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한나라의 배는 말뚝에 찔려 가라앉게 되었다. 이 전술은 같은 장소에 몽골군이 쳐들어왔을 때 또 한번 요긴하게 쓰인다.

남진정책을 통한 영토확장
그런데 베트남에는 피침략의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우리의 역사와 다른 면이다. 베트남은 중국의 침략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남으로의 팽창을 위해 또한 노력했다.
국가건설 과정의 주요부분을 형성하는 이러한 노력은 홍하(紅河) 유역의 북부 베트남으로부터 점차 남부로 진행되면서, 중남부 베트남 지역에 있었던 힌두교를 믿는 짬파(Champa) 왕국을 계속 잠식해갔고 결과적으로 캄보디아인들의 영토였던 남부 베트남의 메콩강 델타지역까지 확대되어 곡창지대를 차지하는 것으로 완성됐다. 또한 1970년대 말에는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베트남군대가 주둔하고 이 두 이웃 약소국들을 베트남의 위성국가로 만드는 상황까지 전개됐다.

map위 그림에서 보듯 서기 900년 홍강유역에 머물던 영토가 1100년경에는 중부 하띵성근처까지 넓어지고 1475년경엔 푸옌성으로 확대되었다. 다시 1650년경에는 빈투언과 사이공이 복속되고 1760년경에는 메콩델타 일대를 다 차지해 현재의 지도가 거의 완성됐다. 이와 중에 중남부지방에서 오랫동안 위세를 떨치고 앙코르왓까지 무너뜨렸던 짬파왕국은 남으로 남으로 수도를 천도하며 후퇴하다 결국 멸망해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고 종교도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비운의 나라가 됐다.

자연재해 위협_극복을 위한 제방축조와 수도작
홍수와 태풍 피해가 잦고 커서 이에 대한 대응의 역사가 곧 베트남의 역사라는 점이다. 평균적으로 매년 30개의 태풍이 서태평양에서 출발해 그 중 10개가 남중국해에서 발달하고 평균적으로 4~6개가 베트남에 도달할 정도로 태풍피해가 잦은 지역이 베트남 중북부지역이다. 이런 자연재해 태풍에 맞서 홍강유역 일대의 베트남인들은 거대한 제방을 쌓아 홍수와 가뭄에 대비해왔고 이러한 제방축조에 필요한 인력동원 역사는 민족의 공통된 정체성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제방의 건설은 한 마을만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고 따라서 제방을 건설하고 외적에 침입에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지도자의 역사가 베트남국가의 역사라고 할수 있다. 결국 제방이 외적에 대항해 싸우도록 하는 공동체 의식을 강화시켜준 셈이다. 러시아 역사학자가 “베트남의 수도작 문화는 제방문화에 기반하고 있고 이 두가지 요인이 합해져 베트남 문화가 시간과 역사를 이겨내도록 해주었다”라고 설파한 것도 이런 측면이다.
제방을 벗어나 이동하는 사람들은 강한 기질을 가지고 있고 마을의 규율을 지키고 싶어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내성적인 홍강델타 농부들에 비해 메콩델타의 농부들이 사교적이라는 의견을 뒷받침하는 논리로 활용되기도 한다. 실제로 하노이사람들이 내성적·규율적인데 비해 메콩델타(사이공)사람들은 외향적·상업적인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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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마을공동체의 역사
이러한 제방의 특성에서 베트남역사의 세번째 특성인 마을공동체적 성격이 도출된다. 베트남사람들을 보면 지역주의, 그것도 출신지역에 대한 자부심과 끈끈한 유대가 엄청 강하다. 이는 각 마을이 고유의 지방문화를 가지고 제방 위에 난 길을 통해서 다른 마을과 연결된다는 물리적 특성과 연관된다. 물의 대한 지배를 통해서만 수도작이 가능했고 이러한 물의 지배를 위해서는 제방구축이 필요한데 이는 공동체를 통해서만 달성됐을 뿐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기술이 전수되는 폐쇄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이로 인해 마을 공동체에서 추방되는 것은 사실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됐다. 또 베트남의 이런 마을공동체 의식이 강력한 지방자치 전통에 강한 영향을 줬으리라 짐작된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유교적 전통
마지막으로 중국의 1천 년 지배가 가져온 유물인 유교적 전통이 있다. 동남아 최초의 대학인 구억뜨쟘(Quốc Tử Giám, 國子監)이 1076년 하노이에 세워진 이후 베트남에서는 선생과 학문에 대해 존경하는 사상이 자리잡게 되었다. 베트남어에서 대학생을 일컫는 신비엔(sinh viên, 生員)이라는 단어는 원래 國子監의 학생을 가리키는 말인 생원에서 유래했고 박사를 의미하는 띠엔시(tiến sĩ, 進士)란 말도 진사라는 말에서 유래한 점도 베트남의 유교적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기원전 200년 중국의 지배시절부터 유래한 명절마다 제단에 분향하는 조상숭배 전통, 관혼상제에 과다한 비용을 지출하는 전통과 노인에 대한 공경전통 역시 유교적 전통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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