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October 23,Monday

하이든과놀람교향곡 Surprise Symphony

하이든은 이야기가 많은 작곡가입니다. 물론 후대에 붙은 명칭입니다만 오늘 소개된 그의 작품 제목 <놀람>처럼 말이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많은 작품을 남긴 작곡자, 따뜻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앞서 확인하신 바와 같습니다만, 더 있죠. 하층민으로 태어나 평생의 대부분을 하인과 비슷한 신분으로 음악가 생활을 한 그는 나중에 현악 4중주와 같은 중요한 음악분야를 창안하고 완성했을 뿐, 비록 잠시 동안이지만 베토벤을 가르쳤고, 또 그의 존경을 받을 만 한 당대 최고의 음악가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하이든은 들으신 대로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어떻게 아이의 음악적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노래 때문이었습니다. 노래만 잘한 것이 아니라 목소리가 아주 아름다웠다는군요.
목소리와 노래 실력으로 주목을 받은 어린 하이든은 8살부터 빈의 성 스테판 대성당에서 합창단 생활을 합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빈 소년합창단의 전신입니다. 이 합창단은 빈 궁정 성당 소속이어서 소년들은 왕궁을 비롯한 궁정 귀족들의 집에 불려가곤 했습니다. 이 시기에 하이든은 고음역의 수석독창자로 뛰어난 노래 실력을 자랑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고 하니, 가난한 시골 출신 아이로서는 큰 출세였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1749년, 하이든은 인생의 큰 좌절과 고비를 맞게 됩니다. 청소년기의 하이든은 무척이나 장난꾸러기였답니다. 어느 날 하이든이 화가 났는지 장난이었는지 합창단원 중 소년 하나의 머리끝을 싹둑 잘라버렸답니다. 그 일로 하이든은 합창단에서 완전히 쫓겨납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러한 결과는 사실상 하이든 아버지의 결정으로 예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변성기에 접어들기 전 하이든은 카스트라토(castrato)가 되어 경력을 쌓으라는 제안을 받았는데요.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수술을 말렸던 것입니다.

당시 교회에서 변성기 소년 합창단원이 버림을 받는 데는 각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소년 합창단이라는 것이 중세 교회에서 여성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탄생했기 때문이죠. 초기에는 교회 종교의식에서 소년들이 여성부를 노래하거나 남성이 여성 음역을 모방하는 창법(팔세토, Falsetto)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예 카스트라토(castrato)가 나오는데요, 이것은 미성을 가진 남자 아이를 사춘기 이전에 거세하여 성인이 되어서도 소년의 음역을 유지하도록 한 가수를 의미합니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카스트라토가 만들어지는 비인간적인 방법도 놀랍지만, 당대까지 음악계는 여성의 접근이 엄격히 금지된 성차별의 세계였다는 사실이 더 놀랍지 않습니까? 18세기 후반으로 오면서 관객들이 기교 위주의 창법에 흥미를 잃고,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목소리와 무대를 원하게 되면서 카스트라토는 19세기에 거의 자취를 감춥니다. 바로 이것이 근대 오페라의 출발이 되었죠.

“목소리가 완전히 못 쓰게 되어버린 뒤로 8년 동안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면서 근근히 먹고 살았다. 재능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망가진다.”
하이든이 합창단에서 쫓겨 난 이후를 회고하는 말입니다. 하이든은 생존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일요일 오전에만 3가지 일을 했죠. 스테파노 교회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다른 교회로 가 오르간을 연주한 후 또 다른 교회 합창대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평일 낮에는 파트 타임으로 귀족 부인들의 하프시코드 교사나 실내 음악 연주를 한 후, 밤에는 빈의 거리로 나가 세레나데 악단에 합류해 푼돈을 버는 식이었죠.
어린 시절 여제의 사랑을 받다가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쫓겨 나 거리와 임시직 악사로 떠돌며 갖은 고생을 했지만, 훗날 만인에게 사랑받는 음악을 작곡하며 넉넉한 인품과 유머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1761년 5월 1일 하이든은 열렬한 예술 옹호자인 헝가리의 귀족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궁정 관현악단 부악장(副樂長)에 취임합니다. 이번에는 정식 채용이었죠. 정말 힘든 20대를 보낸 하이든은 개인적 자유를 상당히 빼앗기는 일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으나 기꺼이 그 일을 맡습니다.
취직 당시 악장은 G. 베르나라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1766년에 사망한 이후에는 하이든이 악장으로 승진합니다. 일은 당시 음악가들의 일반적인 업무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기념일을 위해 특별한 곡을 만들고 영주와 자녀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함께 곡을 연주하거나 여흥을 기획하고, 그리고 평소에는 악단을 훈련시키죠.
하지만 부악장의 연봉은 초라했습니다. 기록으로는 약 400 굴덴의 연봉과 별도로 매일 식비로 반 굴덴을 받거나 아니면 하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고 하죠.

18세기까지 대개의 음악가는 교회나 귀족의 궁정에 소속된 낮은 직급의 하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의 지위는 요리사보다 낮고 시종보다는 높은 정도였습니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신망을 받던 하이든도 첫 5년 동안은 하인석, 그것도 궁정관리 다음의 자리에 앉아야 했죠. 이런 상황에서 음악가가 자립하기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하이든의 경우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 30년간 일하면서 연봉과 지위가 약간 상승하는 정도였습니다.
이에 비하면 하이든 인생 말년의 수입은 정말 놀라운 수준입니다. 하이든은 1791년에 런던에 갔다 1년 쯤 머물며 6곡의 교향곡을 발표하고 다시 1794년에 런던에 가서 1년 반쯤 보내면서 6개 작품을 내놓아 큰 인기를 얻게 되죠. 런던 체류 후 빈으로 돌아오는 하이든의 호주머니에는 1만3천 굴덴의 순수익금이 들어있었다고 전합니다. 대귀족 궁정에서 하이든이 20년간 받은 연봉 총액보다 많은 돈이었죠. 예술가의 자존심을 세우며 청중들만을 위한 작곡으로 보수를 벌어들일 수 있는 음악의 시장 체제가 음악가들에게 열어준 가능성과 영광은 하인 음악가 생활에도 감지덕지해야 했던 이전 시기와 비교하면 놀라운 대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귀족의 하인에서 인기 스타로 부상한 하이든. 그는 당시 유럽 사회와 경제의 급격한 변화를 음악계에서 몸소 경험한 일종의 모델 작곡가였습니다. 바로 이 같은 급격한 전환기를 통과하며 하이든은 고전주의 시대를 열게 됩니다. 하이든의 젊은 시절과 역경, 만년의 급격한 음악 환경의 변화는 그의 교향곡 만큼이나
‘놀람’의 연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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