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July 25,Sunday

에밀 놀데

화실에서 수업 중이던 어느 날, 한 학생이 울상이 된 시무룩한 얼굴로 다가와서는 “선생님, 한 번만 더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각자 자신의 그림의 집중을 하고 있던 다른 학생들의 얼굴에는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저의 폭풍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그것 봐. 아까 선생님이 보여줄 때, 집중해서 보라고 했었지? 미리 이야기했듯이 시범은 언제나 한번뿐이야.” 하고 그 학생을 출구 없는 미로 속에 빠뜨려버립니다.
‘아, 그까이꺼, 학생이 원하는데 한번 더 보여주시지. 선생님이 왜 저러실까…?’

학생의 이런 간곡한 요청에도 재시범을 안 보여주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제가 시범을 보여줄 때에 제발 열심히 보라고 이야기해도 학생이 딴짓을 하거나, 집중을 안 했을 때입니다. 그까이꺼 가끔, 무심한 듯 시크한 포즈로 쓱쓱 시범을 보여주면 화실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적응 못한 학생들은 집중을 안 할 때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쉽게 쉽게 그리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당연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범을 보는 내내 대충대충 설렁설렁 흐리멍텅한 눈으로 선생님 손 한번 보고 먼 산 두 번 바라보다가 선생님이 떠난 후 그려야 할 종이와 또는 캔버스와 혹은 그려야 할 대상과 단둘이 마주했을 때 한없이 당황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제 시범 없이도 학생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되었을 때나 한번 더, 여러 번 더 보여주더라도 소용이 없고 스스로 해결해야만 좀 더 빨리 그 학생의 실력으로 만들 수 있다고 판단되었을 때입니다. 제가 한번 더 그리는 방법을 보여줄거라고 생각했던 학생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스스로 출구를 찾기 위해 열심히 자신의 그림, 혹은 재료와 씨름하며 고군분투하기 시작합니다. 대견하고 다행스럽게도 스스로 출구를 찾아서 빠져나오는 학생도 있고, 너무 깊은 미로에 빠져버린 학생은 제가 지켜보다가 수많은 설명과 시범으로 꺼내주기도 하며 수업이 진행됩니다. 매주 개그콘서트에서 16년 동안 천고의 수행 끝에 달인의 경지에 오른 김병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12년 동안 쉴새 없이 밤낮을 바꿔가며 그림을 그리며 제 작업을 하며 저를 발전시키고 있기에 학생들에게 시범을 보일 때에는 편안한 자세와 편안한 마음으로 진행합니다. 그래서 그 겉모습만 보고선, 온 집중력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에, 학생 자신도 대충대충 그렸다가 그림을 망쳤다고 울상이 되곤 합니다. 그렇기에 사실 시범을 또 보여줘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직접 운동을 하지 않고, 운동에 관한 책을 읽는 것만으로 운동을 잘 할 수 없는 것처럼 스스로 그리고 연습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해결되지가 않습니다. 선생님의 시범을 볼 때, 설명을 들을 때, 그 순간에는 이해한 것 같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자기의 실력으로 만들려면 수많은 연습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른 재료에 비해 비교적 배우기 쉬워서 종종 기본 재료로 꼽히는 연필화를 배울 때, 학생들이 반드시 거쳐야하지만 무지무지 지루해하는 ‘선연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선 하나도 내 마음대로 안 그어지는데, 어떤 대상을 똑같이 재현하거나 자신의 의도에 맞춰서 마음대로 변형시킬 수 있을까요?
그럼 시간이 흘러서 연습이 쌓여서 ‘선’도 잘 그리게 되고, 재료도 원하는 대로 잘 다루게 되면 과연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일까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미술의 길은 너무 멀고도 험합니다. 점점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림은 잘 그려 보이는데, 배운 기법 속에, 배운 기술 속에, 어떠한 틀 속에 갇혀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보다 기술적으로 미흡해서 곰팡이도 피고, 그림 표면에 크랙도 가고, 안 좋은 물감을 써서 캔버스에서 밀리기도 한, 구성도 어설프고 붓터치도 어설픈 제 대학 시절의 그림들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화가는 많은 것을 알 필요는 없다. 아름다운 것이란 마치 호흡을 하거나 걸음을 걷는 본능적인 것이 시키는 대로 그릴 때 나타나는 것이다.” – 에밀 놀데
그런데 전시회를 가도 그냥 그렇게 별로 감동을 받지 못하던 저를 놀래키는 그림이 생겼습니다. 바로 저희 어머님께서 직접 1층의 카페 화장실 문을 칠판 시트지로 꾸며 놓으신 그림이었습니다, 그 칠판 시트지에 그려진 아이의 낙서 같은, 배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싱싱한 활어회 같은 그 선이 얼마나 좋던지요. 어머님은 부끄럽다 하시지만 그걸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은 ‘역시 미술은 배워봤자 소용이 없어.’ 였고, 다시 드는 생각은 ‘부럽다. 나도, 내 선도 배우지 않은 저 날 것 그대로의 선으로 저렇게 자유로워지고 싶어.’ 였고, 또다시 드는 생각은 ‘배우지 않았으면, 공부하지 않았으면, 저 선이 저렇게 아름다운지 가치 있는지 못 알아봤겠지.’였습니다. 그래서 미술은 파고 들어갈수록 알 수 없는 미스터리인 것 같습니다.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그림 속에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살아있는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 작가, 에밀 놀데(본명은 한젠(Hansen)이지만 태어난 고향 이름을 따라 스스로 놀데라 부름)입니다. 예전 ‘에드바르드 뭉크’편에서 소개했었던 ‘표현주의’ 기억하시나요? 미술의 기본 목적을 자연의 재현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며, 르네상스 이래 유럽 미술의 전통적 규범을 떨쳐버리려 했던 미술 운동 중의 하나입니다. 주로 외적인 형상보단 내면에 감추어진 의미를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태도로 임의적 색채와, 형태 왜곡과 변형 등 일정한 원칙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합니다. 그럼 그의 그림을 볼까요? 그의 첫 번째 종교적 회화 작품이자 그의 이름을 알린 그림, ‘최후의 만찬’입니다.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너무 놀랐습니다. 강렬한 색채와 파격적인 붓놀림에 한번 놀라고, 그 속에서도 따뜻하고 경건한 종교적인 느낌과 정말 주변에 존재하는 이웃 사람들처럼 느껴지는 그림 속 인물들 표현에 또 한번 놀랐습니다. 이미 친숙하고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전통적인 ‘최후의 만찬’은 떠들 수 없는 경건한 미사 속 한 장면 같아서 인간이 닿을 수 없는 먼 곳, 옛 시대에 존재하는 그림처럼 느껴진다면 놀데의 ‘최후의 만찬’은 마치 떠들썩하고 즐거운 청소년 미사 속 한 장면처럼 느껴져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다소 가볍게 느껴질 만도 한데 인물들의 표정에서 고통과 심각함도 놓치지 않습니다. 이미 파격에 친숙한 지금 시대에 봐도 충격적인 그림인데, 전통적인 역사화와 인상주의풍의 그림이 유행할 시기에 저런 세련된 감각적인 그림이라니. 빠르게 붓을 놀리며 작업의 열중하는 작가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덩달아 저도 작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치솟네요.
“나는 순수한 것을 사랑했는데 반면에 찬 것과 더운 것의 혼합, 너저분한 것, 그리고 빛을 내는 것을 강조하는 것 등은 기피하였다.” – 에밀 놀데
에밀 놀데는 표현주의 작가들 중에서도 색채의 특징이 두드러지는 작가로 꼽힙니다. 그의 그림들에 쓰인 색들을 보면 원시적이고 부드럽기보단 거칠게 느껴지죠? 그 당시 독일의 화가들은 순수한 색채에 회색을 섞어서 흐리거나 폐쇄적인 색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럴 수가. 그림의 채도가 제멋대로 높아져서 살짝 촌스러운 느낌같은 느낌을 지울 때 쓰는 만능 치트키 같은 ‘회색’을 쓰지 않았다니. 그래서였군요. 색이 독특하고 강렬해 보입니다. 그의 그림들을 훑어보면 그냥 화가가 별생각 없이 대충 휘갈기고 끄적거리다가 만 미완성의 그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작업 과정을 엿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제대로 감정과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연습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제대로 된 형태와 색, 구성 대신 감정을 극대화시켜야 했기에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촛불과 무희>와 <황금 송아지 주변의 춤>을 보면 정확한 묘사가 없어도 리듬에 맞춰 춤추고 있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에밀 놀데에게도 단점이 있습니다. 그는 그 당시 나치를 지지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그의 작품들이 나치 정권에 의해 ‘퇴폐 미술’로 낙인찍혀서 작품 활동을 중단하게 되고, 비밀리에 그림 작업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알쏭달쏭한 예술가, 에밀 놀데. 미스터리한 그가 미스터리한 예술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예술은 그 자신의 예술이지 않으면 안 된다. 표면적으로 예술은 언제나 일련의 작은 창안이고, 도구나 재료나 색채에 관한 그 나름의 작은 기법상의 발견이라고 나는 믿는다. 예술가는 배운다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예술가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참된 가치가 있으며 제작에 필요한 자극을 준다. 그러한 창조적 활동이 멎을 때, 자기의 안팎을 막론하고 해결해야 할 곤란이나 문제가 이미 없어질 때 불은 당장 꺼진다…. 남에게서 배우는 능력은 결코 천재의 징표가 아니다.”
입시에 지친 학생들에게, 입시 여부를 떠나서 미래의 전문 미술인으로 성장할 우리 학생들에게, 이 더운 호치민에서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표현주의 화가 ‘에밀 놀데’ 처럼 어떠한 양식에도 구애받지 않고 쌓여있는 감정을 있는 날 것 그대로의 선과 색으로 마음껏 날려버릴 좋은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의 칼럼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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