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5,Thursday

은퇴를

20여 년의 긴 세월동안
조급증 환자에
성질마저 방정치 못한 이방인에게도
차별없이 문을 열어준 베트남에
마음으로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언제 어디서나
베트남인들의 수줍은
맑은 미소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지난 6개월 동안 몇 번인지 모르지만 수차례에 걸쳐 몸이 수축과 팽창을 거듭한다.
20일 전 한국에서 머무를 때의 체중이 83kg이었는데 지금은 몸무게를 재지 않아도 허리가 끼여서 못 입던 바지가 그런대로 입혀지는 꼴을 보니 아마 한 75~6kg은 되는 모양이다. 3주일 정도를 간격으로 권투선수 체중 조절하듯이 들쑥대는 몸무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만 결코 건강에는 긍정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육체의 요동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자니 이런 저런 사념이 줄을 잇듯이 따라 오른다. 한국에서 지하철 무료 승차가 가능해진 자신의 나이하며, 이곳에서 보낸 20여년의 세월 등, 이제는 또 다른 매듭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 일을 했다면 나름대로 은퇴 이후의 계획도 그리 낯설지 않을 수 있을 것인데 이국의 땅에서 생활하는 입장이 되니 사고의 정리마저 만만치 않다. 가장 먼저 대두되는 문제는 작든 크든 이곳에서 세운 회사의 연속성 문제가 우선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14년 전, 개인적인 기호로 시작한 교민잡지가 어엿한 교민사회의 주요 미디어의 하나로 자리잡았으니 이제는 개인의 사정만으로 회사의 진로를 결정할 만큼 가볍지 않게 된 것이 은퇴에 앞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대두된 것이다.
사실 은퇴를 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 모른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지만 당장 닥치지 않으니 그 절박함을 못느끼고 있는 터인지라 구체적인 은퇴 시기를 짚어 본 적이 없던 탓이다. 다른 이들은 은퇴를 하고 어떤 삶을 살까? 인터넷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사람의 흔적을 뒤져봤다.

퇴직 첫날, 부인이 차려주는 밥을 세 숟갈 급하게 떠먹은 뒤 평소처럼 바쁘게 지하철을 타고 회사 앞까지 아무 생각없이 갔어요. 회사 앞에 가서야‘아, 일 그만뒀지’생각이 들더라고요. 다시 집으로 와 보니 집은 텅 비어 있고, TV 보고 책 읽다가 잠들었어요.”

금융관련 협회에서 일하다 1년 반 전 정년 퇴직한 최모(57)씨가 회상하는 퇴직 첫날 모습이다.

“둘째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아침에 자동반사적으로 집을 나와 2시간 정도 산책했습니다. 오후에도 다시 나가 집 주변 철길을 내내 걸어다녔어요. 넷째날은 월요일이었는데 그날도 양복 입고 회사 앞까지 갔다 왔어요. 회사 앞에 가서야 ‘이러면 안 되는데, 난 은퇴했는데’라는 생각이 확실히 들더군요. 집에 와 난초 50개를 꼼꼼히 돌보며 2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음날부턴 아침에 회사에 가지 않았어요. 대신 자식들 학교 가는 것 배웅하고, 케이블TV에서 경제프로그램을 보다가 라면도 끓여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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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그만두었는데 여전히 경제 프로그램을 관성적으로 시청하는 모습에 연민이 묻어난다. 글을 읽는 눈에 서리가 내리고 글씨가 흐려진다. 끔찍하다고까지는 말을 못해도 결코 반갑거나 즐거운 생활 만은 아닌 모양이다.
한국을 떠나 이곳 베트남에서 지낸 세월이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은퇴를 생각하면 한국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어쩔수 없는 한국인으로 살다가 한국인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인 모양이다. 고국에서 남아있던 죽마고우 몇 명은 이미 운명을 달리했으니 고국으로 돌아가야 긴하게 만나겠다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놈의 고국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평안한 곳이 아니라 결코 반가운 회귀는 아니지만 가족이 있는 그곳이 고향이라는 것을 부인할 방법도 없으니 이제는 한국에서 낯선(?) 삶을 구상해보아야 할 시점이 된 것 같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고 베이비 붐을 일으키며 태어난 1950년 초반 세대, 만약 미국이나 유럽에서 태어났다면 축복받은 세대가 되었을 터인데, 태어난 지역이 한국이라 남들은 전쟁의 아픔을 달래고 다시 일어설 때 우리는 진짜 참혹한 전쟁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남들이 잘사는 모습을 빈 손가락을 물고 경의롭게 바라보며 전쟁의 참화를 씻어내려고 발버둥치던 어린 시절을 보낸 슬픈 세대가 바로 50년대에 태어난 우리들이다.
그저 굶지만 않으면 충분히 행복하던 시절. 그래도 한국인의 학구 열은 어디로 가겠는가? 공부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처럼 지겹게 붙어 다녔다. 그나마 요즘과 비교하자면, 입시로 인한 고생은 덜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그때는 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는 찾아보기조차 힘들었다. 태권도도 피아노 학원도 다니지 못했다. 입시학원은 아예 없었으니 공부는 하는 친구들만 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저 졸업만 하면 그나마 주어진 과제를 마친 셈이 된다. 그래서 그 시절 유치원에 다닌 것이 60여 년이 지나도 자랑거리로 남아있는 늙은이들이 아직도 더러있다.
또한, 우리세대는 부모님을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 같다. 우리는 부모님의 은혜를 반드시 되갚아야 하는 동양의 문화 속에서 자랐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우리를 지켜주신 부모님 아니던가?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 자신들의 모든 욕망을 다 누르며 살아오신 부모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비록 미국에서 혜택받은 세대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그 못지않은 은혜를 입은 셈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비록 넘치는 풍요를 가족에게나 자식에게 남겨주지는 못했지만 일단 가장으로서의 기본 의무를 열심히 해낸 꼴이다. 스스로에게 노고를 위로하는 연민의 손을 내밀어 본다.
우리 아들애에게 사랑은 내릿사랑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네가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네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며, 직장도 구하기 만만치 않은 팍팍한 사회환경 속에 살아가야 할 아들애에게 일단 부모에 대한 부양 부담은 삭제 해 주었다. 하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부모의 존재가 유효한 부담이 되는 시대는 지나버렸다. 그려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 대물림의 노고는 우리세대로 종지부를 찍자. 그리고 돌아보니 아들애가 아직도 학생이다. 그래도 이제 한 학기만 더 다니면 아들애도 학업을 마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 무엇을 하든 간에 그 인생은 그의 몫이다. 그가 어떠한 삶을 살더라도 나는 그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단지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면서 생을 다양하게 즐기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애비도 노쇠해진 몸을 정리할 시점이 다가옴을 느낀다.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었던 은퇴이지만 세월만큼은 의지대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퇴라는 조용한 어둠의 전령이 이미 남은 세월의 불확실성을 가득안고 주변을 성성대고 있다.
20여 년의 긴 세월동안 조급증 환자에 성질마저 방정치 못한 이방인에게도 차별없이 문을 열어준 베트남에 마음으로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언제 어디서나 베트남인들의 수줍은 맑은 미소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삼라만상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새 봄의 기운이 솟아나는 경칩날, 이런 은퇴의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는 것은 봄바람이 서러운 늦 겨울의 시샘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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