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June 22,Tuesday

공민왕의 개혁정치와 그 주역들

14세기 중반 고려 는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었죠. 이런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 공민왕은 개혁을 위해 양대 세력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기존의 부패한 권문세족은 개혁의 대상이지 개혁의 주체세력이 될 수 없었죠. 그러나 현실을 무시할 수 없어서 공민왕은 어느 정도의 권문세족을 유지시키되 이들을 견제할 신흥세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등장한 세력이 이성계 일파의 신흥무장 세력과 이색 학당의 신흥사대부 세력입니다.
문 무 양대세력 중 고려에 급한 것은 군사력이었죠. 당시의 고려는 끝없는 외환을 겪고 있었는데 이때 나타난 무장세력이 권문세족 출신의 최영 장군과 신흥무장 세력의 이성계입니다. 쌍성총관부 수복에 공을 세우고 동북면 병마사가 되어 입지를 확보한 이자춘은 홍건적의 2차 칩입때 사망합니다. 그리고 등장한 26세의 젊은 청년 장군 이성계는 불패의 장수로 고려를 구하는데 그 활약상을 살펴보죠.
홍건적의 2차 침입이 있었던 1361년 홍건적은 개경을 점령하고 공민왕은 경상도 복주(지금의 안동)  로 피난을 갑니다. 복주 백성들은 임금 부부를 극진히 대접했고, 이에 만족한 공민왕은 “이렇게 편안한 곳이 동쪽에 있었구나”하면서 복주를 안동으로 바꿨는데 정작 안동 백성들은 공민왕 부부의 대접에 허리가 휘어서 편안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개경 수복작전에 참여한 이성계의 군대는 2천명의 소수 였으나 선봉에 나서 많은 전공을 세웠고 개경 수복후 처음으로 입성한 군대입니다. 이성계의 활에 숨진 홍건적 장수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달 후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침입을 이성계 군대가 단독으로 물리칩니다.
공민왕의 반원 개혁정치에 분노한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고려왕에 책봉하고 대규모 군대를 보내 고려를 침공합니다. 대부분의 고려 장군들이 몽고의 군대를 두려워하자 이성계는 고려 장군들을 질책하고 선봉을 자처합니다. 배알이 틀린 고려 장군들 우리는 구경만 할테니 잘난 이성계 장군 혼자 싸워보라고 하고 이 에 격분한 이성계는 단독으로 열배가 넘는 몽고군을 괴멸시킵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성계의 승리입니다. 전체 전투를 보는 시야, 적절한 작전, 용맹성,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 등 나무랄데 없는 활약을 하고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가는 이성계는 고려의 기둥이 되어갑니다.

먼저 조선왕조 실록에도 소개되는 이성계의 가계를 살펴볼까요?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조선건국 후 목조로 추존됨) 1250년 전주에서 기생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 기생은 전주 수령의 애첩이라 보복이 두려워 고려의 변경지대 화령 (지금의 함흥평야) 으로 도피합니다. 화령에서 식솔 및 지역민을 어렵사리 이끌던 이안사에게 몽고 군대가 와서 항복을 권유합니다. 향후 정세변화를 예측한 이안사는 몽고에 항복하고 자진해서 변발을 합니다. 이를 가상히 여긴 몽고는 이안사를 화령 천호에 봉하고 화령의 치안을 맏깁니다. 그 후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와 손자 이춘까지 승승장구하고 100년 후 증손자 이자춘 (이성계의 아버지)  대에 와서 변화가 생깁니다. 기울어 가는 원나라 그리고 공민왕의 반원 개혁정치를 보고 1355년 개경으로 입조하여 공민왕에게 귀순의사를 밝히자 공민왕은 이자춘에게 화령으로 돌아가서 큰 일을 위한 명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과연 다음해 공민왕은 쌍성총관부 공격시 내부에서 호응하라는 밀명을 내리고 이자춘은 내부 반란을 일으켜 쉽게 쌍성총관부는 무너지고 고려영토로 회복됩니다. 이제 고려의 벼슬을 받고 이성계의 신흥무장 세력이 형성되었죠.

그리고 이색 학당 신흥사대부 세력의 형성과정을 알아보죠. 안향-이제현-이곡 계보로 이어지는데 이곡은 발군의 실력을 발휘합니다. 1334년 이곡은 원나라 과거에 수석 합격하고 소원을 묻는 원 황제에게 고려 처녀 징발 중지를 요청하고 황제의 승낙을 받아 고려의 근심을 해결합니다. 이색도 원나라 과거에 두번 응시하여 수석 및 차석을 차지하여 국위를 선양합니다. 이색은 이곡의 아들입니다. 목은 이색은 정몽주, 정도전, 남은, 윤소종, 변계량 등 많은 제자들을 길렀는데 이들은 조선 건국과 성리학의 발달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이들 신흥사대부는 권문세족의 자녀인 금수저도 있지만 대부분은 중소 지주 출신(중산층) 즉 은수저 출신입니다. 공민왕은 이들의 청렴과 유교적 소양에 주목하여 개혁세력으로 양성합니다.

이번에는 외적의 침입으로 피폐해진 고려의 정치상황을 살펴볼까요?당시 권문세족은 백성들의 토지를 수탈하여 산과 강을 경계로 삼을 정도 넓은 장원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만족을 모르고 계속 토지 수탈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의 토지수탈이 끝나자 이제는 중견 관료와 지방의 중소 지주들 토지를 수탈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힘없는 백성들 토지는 쉽게 수탈했으나 중견 관료와 중소지주(신흥사대부)는 저항도 거세고 아는게(법률지식) 많아 권문세족들 욕심 채우기 쉽지 않네요. 우왕때 성리학자들 권문세족과 목숨건 맞짱을 뜨는 이유가 자신들의 재산권 보호였으나 명분을 얻기 위해 백성들을 위하여 투쟁한다고 포장합니다. 물론 순수하게 백성을 위해 투쟁한 학자들도 있기는 합니다. 공민왕 때는 권문세족들 백성들의 토지만 수탈하여 신흥사대부와 충돌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수탈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백성들 원성이 심했죠.

이런 상황에서 공민왕 개혁정치의 내조자 노국 대장공주가 산후통으로 사망하자 공민왕은 실의에 빠져 정치에 흥미를 잃고 승려 변조(신돈은 공민왕이 하사한 이름)에게 고려의 개혁을 부탁합니다. 신돈은 승려 출신이라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게 개혁을 진행할 수 있었죠. 백성들의 빼앗긴 토지를 찾아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양민들을 풀어주는 등 다양한 정책으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으나 권문세족의 위기감, 신흥사대부의 불교 배척론, 전권을 위임한 공민왕의 불안감이 합쳐져서 신돈은 개혁 6년차 실각하고 귀양지에서 참수됩니다. 이제 공민왕은 사치와 방탕으로 망가지고 시해당합니다. 공민왕 시해사건 조사를 맡은 권문세족의 이인임은 어린 우왕을 등에 업고 전권을 행사하며 고려를 망하게 만듭니다.

[사진 : 고려사절요 / 그림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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