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July 28,Wednesday

고려말 신흥무장세력과 신흥사대부

신돈은 백성들을 위한 개혁을 시도했고 백성들이 지지를 얻었으나 이러한 백성들의 지지는 공민왕과 기존 정치인들의 위기감
을 조성시켜 신돈은 참소로 실각하고 유배형에 처해집니다. 유배 4일 후 신돈은 참수 당하고 노국 대장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정
치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원제국이 몽고로 쫓겨가고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가 중국을 통치합니다.
공민왕 사망 후 변화된 외교정책으로 마찰을 빚은 혁명가 정도전은 귀양을 가고 귀양지에서 큰 깨닳음을 얻은 정도전은 역성
혁명을 계획합니다. 역성혁명은 현실적인 힘(군사력)이 필요하므로 이성계와 정도전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집니다. 여기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새로운 세상을 설계합니다. 치열한 투쟁과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는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러 630년 전 과
거로 갑시다.


신돈의 개혁정치가 순조롭게 진행되던 1368년 국제정세가 요동칩니다. 대제국을 건설했던 원제국이 몽고로 쫓겨나고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가 중국을 지배합니다. 이때부터 몽고를 북원이라고 부릅니다. 몽고를 배척했던 공민왕은 당연히 명과 외교를 맺고 북원을 멀리 했죠. 명과 북원은 서로 고려와 외교를 맺어 후방의 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데 공민왕 사망 후 이인임은 명나라 보다 북원과 외교를 가집니다. 몽고의 후원으로 권문세족이 형성되었고 이인임은 몽고가 지배하던 시절이 좋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친일파와 같은 맥락입니다.
공민왕 사망 후 다시 권력을 잡은 권문세족은 백성들의 토지 수탈을 계속 진행하고 신흥사대부의 토지까지 수탈하다가 신흥사대부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반격을 당해 결국은 권문세족이 멸망하는 단초를 제공합니다. 이때의 교훈으로 권력자와 상류층은 힘없는 서민들은 착취해도 중산층과 지식층은 잘 건들지 않죠. 왜냐하면 좀 버거운 상대는 피해야 하니까.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된 신흥사대부는 성리학으로 무장했다고 하는데 성리학은 어떤 학문일까요?

지금부터 2500년 전 공구(공자)에 의해 만들어진 유교는 1800년 동안 이어지다가 주희(주자)에 의해서 변화되는데 주희 이전의 유교를 훈고학이라 하고 주희의 유교를 성리학이라 부릅니다. 훈고학은 경전 해석을 주로 하며 4서 5경중 5경을 중시했고 성리학은 4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 중심이며 유교의 철학적 해석을 시도한 학문입니다. 그러나 유교의 철학적 해석은 중국보다 조선에서 더 깊은 연구가 이루어 지는데 그 이유는 차차 설명하겠습니다. 주희가 살던 시대는 남송인데 1127년 송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침공을 받고 양자강 남쪽으로 쫓겨 갑니다. 중화사상에 의해 북쪽 오랑캐 취급을 하던 여진족에게 쫓겨난 중국인(한족)의 자존심을 살리고 희망을 주기 위해 주희가 연구한 학문이 성리학이죠.
성리학은 그 이론이 난해하고 관념적 요소가 많아 저도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는데요.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理=정신세계 = 맑고 깨끗함 = 형이상학)와 기(氣=현실세계 = 어둡고 혼탁함 = 형이하학)로 구분하는데 지금도 철학등 인문사회는 형이상학 수학 물리학 공학등 자연과학은 형이하학 이라고 하는데 이는 주희의 성리학 영항이죠. 여진족인 금나라의 힘에 눌려 쫓겨난 중국이나 몽고의 지배를 받는 고려나 비슷한 처지에 있어서 성리학은 쉽게 스며들었고 600년 동안 뿌리를 내려 현재 우리문화의 근간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현실을 무시하고 형식과 예의를 강조한 성리학의 영향으로 부국강병을 추구하던 국제사회에 뒤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나 밥은 굶어도 자식 교육은 시켜야 하는 정신문명의 영향으로 짧은 기간에 경제기
적을 만들기도 합니다.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신흥사대부는 온건개혁파와 급진개혁파로 갈라지는데 조선을 건국한 급진개혁파(역성혁명파)는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추구했고 역성 혁명파를 계승한 훈구파가 집권한 조선 전기는 4색당파의 조선 중기, 노론의 조선 후기와는 문화가 좀 다릅니다. 온건 개혁파를 계승하는 사림파가 집권하는 조선중기 부터 성리학은 이상을 추구하는 학문으로 변질되었고 4색당파의 조선 정치문화를 형성합니다. 그러면 조선을 건국한 급진개혁파를 이끌던 혁명가 정도전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정도전은 1342년 외가인 충북 단양에서 출생합니다. 단양 8경의 하나인 도담삼봉 근처의 외가에서 자란 정도전은 삼봉을 자신의 호로 정합니다.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을 봉화백이라 칭하는데 이는 정도전이 경북 봉화의 토호세력 출신이므로 내려진 칭호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정도전은 은수저 출신입니다. 아버지 정운경은 형부상서로 고위직을 역임했으나 어머니 가계가 미천하여 관직생활 내내 반대파의 조롱과 멸시를 받고 공격대상이 됩니다(정도전의 외증조모는 사찰의 노비출신). 그러나 이색 학당의 수재 답게 18세에 성균관시에 합격하여 소년 등과합니다. 20세 진사시 합격, 고려가 외침에 시달리던 공민왕 13년(1364년) 관직에 진출합니다. 그러나 공민왕 사망후 그는 정치적 시련을 겪죠. 우왕 즉위후 권력자 이인임과 충돌합니다. 정치적 성향도 다르지만 부패한 권문세족 출신의 이인임에게 협조할 수 없었던 정도전은 북원 사신을 접대하는 접반사 임명을 거부하였고 그 결과 어명 불복죄로 전라도 나주 회진현 거평부락으로 귀양살이를 떠나는데 여기서 정도전은 자신의 정치사상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신이 배운 성리학은 무지한 백성을 가르치고 엄격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배웠는데 귀양살이 9년 동안 느낀 것은 백성들은 결코 무지한게 아니고 세상의 이치를 알고 있었으며 정치가들의 탐욕과 오만을 직시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오히려 이런 백성들의 자문을 받아 하는 정치가 천명을 받은 왕조라고 느끼죠.

 

고려를 끝까지 지키다가 살해당한 정몽주는 정도전과 동문 수학한 친구였죠. 그런데 정몽주가 친구 정도전을 위해 유배지로 보낸 책 맹자 때문에 정도전은 고려를 배반하고 친구 정몽주를 죽게 만들었으니 역사가 전하는 하늘의 이치가 참 아이러니 합니다.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느낀 백성의 참상, 그리고 백성의 지지를 잃은 부패한 고려는 천명을 잃은 왕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맹자의 천명사상 인데 백성은 곧 하늘이고 백성의 지지를 잃으면 천명을 잃은 것 즉 주권재민, 민본사상입니다. 이러한 그의 주권재민 사상은 위화도 회군을 정당화 시키고 민본주의 사상은 과전법을 탄생시켜 백성들에게 희망을 선물하게 됩니다. 9년 유배생활을 끝낸정도전은 군사력의 필요성을 느껴 1383년 이성계를 만나러 함주 막사로 갑니다. 드디어 신흥 무장세력과 신흥 사대부의 결합 즉 문·무 결합이 이루어지고 고려는 요동치는 격변기를 맞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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