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June 19,Saturday

쪼개지는 신흥사대부와 고려말 정치

1374년 공민왕 시해사건을 처리한 권문세족 출신의 이인임은 10살의 어린 우왕을 고려 제32대 국왕으로 옹립하고 자신은 섭정이 되어 고려의 국정 전반을 장악합니다. 같은 권문세족 출신의 최영에게 군권을 맡기고 신흥 무장세력 이성계를 견제합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끌여들여 이인임 일파를 제거했으나 곧이어 명나라가 철령위 사건을 일으켜 옛 쌍성총관부 영토 반환을 요구합니다. 고려는 만주 정벌을 결정했으나 이성계와 정도전 세력의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은 퇴위되고 재산권이 걸린 과전법의 시행을 놓고 신흥사대부는 급진개혁파, 온건개혁파로 쪼개집니다. 우리 정치 최초의 분당 사태 그리고 우리 정치 최초의 당파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고려 말 상황을 살펴보러 갑시다.

1383년 혁명가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 함주(함흥) 군영으로 가서 두 사람은 역사의 물줄기를 돌리는 운명의 만남을 가집니다. 이성계를 만난 정도전은 “들어 오면서 장군의 군영을 살펴보니 군기가 엄정하고 사기가 충천합니다. 이런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집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 대목에서 당시 태조는 그 말의 진의를 알지 못했다고 서술하지만 믿기 어려운 기록입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이심전심으로 의기투합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두 사람의 만남 이후 이성계의 후원으로 다시 관직에 진출한 정도전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이색 학당의 수재들을 포섭하여 결국 권문세족 출신의 부패한 이인임의 수하들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다음해 1388년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여 정치 개혁에 착수합니다. 그러나 재산권이 걸린 토지제도 개혁에 대한 견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신흥사대부는 급진개혁파 온건개혁파로 쪼개집니다. 즉 우리 정치역사의 첫번째 분당(분열)입니다. 600년 긴 역사를 가진 당파싸움이 시작되죠. 그러면 고려말 토지제도의 개혁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길래 이토록 민감 했을까요? 고려의 토지제도 전시과는 현직 관료에게 지급되는 토지입니다. 상속이 허용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관직에서 물러나면 국가에 반납해야 합니다. 비정상적인 토지를 소유한 권문세족과 왕실, 사찰 등의 토지를 전부 몰수하여 실제 경작자인 농부에게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개혁파와 현재의 토지 소유자인 권문세족, 왕실, 사찰 등과 잘 협의하고 서로 양보해서 결정하자는 온건개혁파의 충돌로 인해 당이 쪼개지는 분당사태가 발생합니다.
온건개혁파의 주장은 요즘 말로 표현하면 협치하자는 말인데 얼핏 들으면 타당한 것 같으나 좀 모순이 있죠. 불법 강탈한 토지를 합의하여 조금만 반환한다는 이론입니다. 급진개혁파의 대부분은 중산층 출신이고 온건개혁파는 권문세족 출신이 다수 포함돼 있어 서로의 견해가 일치되기 어려웠죠. 물론 조준처럼 권문세족 출신의 급진개혁파도 있었습니다. 정도전은 합의하자는 말에 강하게 반대합니다. “합의란 양쪽 주장이 이치에 닿을 때 하는 것이지 도적질한 물건을 원주인에게 돌려 주는데 합의하는 법은 없다”라며 강행할 의지를 보이자 파국을 막으려는 정몽주와 눈치 빠른 하륜의 중재로 원안 계민수전의 80% 정도 수용하는 과전법으로 합의하고 세율은 수확량의 10%로 결정 되어 시행합니다. 신돈의 개혁 이후 다시 백성의 생존권 보장의 법이 출현합니다. 백성들은 춤 추며 환영합니다. 이제 조선건국의 기반인 백성의 지지를 확보했습니다.

백성을 위한 조선의 3대 개혁법은 조선전기의 과전법, 조선중기의 대동법, 조선후기의 호포법인데 대동법과 호포법은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서민을 위한 과전법이 시행되면서 동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당파 싸움도 일어납니다. 서민을 위한 법이지만 서민들은 지킬 힘이 없어 세월이 가면서 변질됩니다. 즉 조선의 특권층 양반들 고려 때 처럼 토지를 수탈했고 또한 세금면제의 혜택까지 누려서 이를 시정하고자 조선중기 대동법이 출현합니다.

▲ 산과 강을 경계로 삼을 만큼의 광대한 사유지를 확보한 권문세족!

온건개혁파는 고려를 지키려는 절의파, 급진개혁파는 조선을 건국한 혁명세력으로 배웠는데, 이는 온건개혁파의 학풍을 이어 받은 사림파들이 백성들에게 교육시킨 내용입니다. 신흥사대부가 자신들의 토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권력자들과 한판 붙을 때 백성들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으로 명분을 세웠듯이 온건개혁파 역시 자신들의 재산을 지킬 목적으로 투쟁하는 명분보다 고려를 위한 명분이 더 좋은 모습이겠죠. 만약 고려를 지키려는 의도였다면 고려에 반역하려는 의도가 짙은 위화도 회군을 반대해야 당연했을 것입니다. 위화도 회군 후 단결 잘 하던 신흥사대부들 재산권 문제에서 당이 쪼개지네요.
이제 고려말 정치상황을 살펴봅시다. 이인임은 공민왕의 피살 사건 후 재빠르게 입궁하여 국왕 시해사건을 처리하고 공민왕의 유일한 아들 모니노(우왕)을 세웁니다. 10살의 어린 국왕을 세우고 자신은 섭정이 되어 고려를 지배한 이인임은 고려를 망하게 만든 주범이죠. 임견미 염흥방 도길부 등 이인임의 수하들은 토지 수탈에 몰두합니다. 이는 공민왕 치세 23년 동안 억눌린 권문세족들의 부패본능의 부활입니다. 염흥방의 노비들은 토지 수탈을 말린다는 이유로 지방수령까지 구타합니다. “군수 주제에 감히 권력자의 노비에게 대항하다니” 군수를 구타하면서 노비들이 한 말입니다. 염흥방은 이색학당 출신으로 정도전의 선배인데 변절하여 이인임에게 아부한 인물입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하죠. 참 열심히 남의 토지를 수탈 했는데 이색학당 동료들 토지까지 수탈하다가 탈이 나서 참살 당합니다.

한편 이인임의 섭정으로 할 일이 없어진 우왕은 개성에 사는 여자들 사냥에 몰두합니다. 이때 우왕에게 눈물을 흘리며 간언한 유일한 사람은 최영 장군입니다. 23세의 청년 우왕은 최영에게 이인임 일파의 제거를 부탁하고 최영은 이성계에게 처리를 부탁합니다. 정도전의 계책에 따라 이인임 일파의 주택을 급습한 이성계의 군대는 이인임을 제외한 수하들의 일가족을 몰살시킵니다. 이인임은 살려주라는 최영의 부탁 때문에 이인임은 귀양갔다가 사약을 받습니다. 1387년 벌어진 권문세족의 참살 사건은 이성계와 정도전의 시대를 예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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