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4,Wednesday

정장의 변명

 

참으로 오랜만에 넥타이를 매어봤다. 지난 2005년 정부 행사에 억지로 참가할 때 정장을 입어보고 난 후 12년 만에 다시 넥타이를 매어봤다.

지난 몇 주는 개인적으로 고난의 기간이었다. 오만한 자만심에 오랫동안 소홀한 건강 관리 탓이던가, 원인 모를 속앓이로 육체적으로 감당이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병원을 드나들며 자신의 몸속을 타인에게 다 공개하며 난리를 친 덕분에 일단 당장 암으로 죽을 것 같지는 않다는 대강의 소리를 듣고 나왔지만 여전히 달라진 것 같지 않은 몸 상태다. 혹시 내 몸의 사진이 SNS에 뜨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연한 생각이 스치듯 지나간다. 몸속의 사진만으로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진단서에 표기된 시뻘건 사진의 임자가 과연 내 것인가 하는 의문이 부끄러운 미소처럼 피어난다.

아직도 축 처져있는 몸을 위로하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밤늦은 시간에 숙소 주변을 나가서 명치에 힘을 주고 가슴을 열고 밤공기를 친구 삼아 걸으며 의기소침해 있는 몸을 달래도 보았지만 쉽게 응답을 하지 않는다. 하긴, 하던 짓거리가 아니라 그렇다. 웬만해서는 집에 들어간 후에 집 밖으로 걸음을 옮긴 적이 별로 없던 친구가 갑자기 늦은 밤시간에 하지 않던 일을 하니 몸도 그리 익숙한 장면이 아니라는 듯이 쉽게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쓸데없는 짓거리로 그나마 조금 회복되려는 조짐을 깨버리지나 말게 하는 핀잔을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늦은 밤 체조(?)를 한 덕분인지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새벽 여명이 잠을 깨울 때 침대에서 구르듯 내려오던 습관 대신 담요 킥을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찬물 샤워로 정신을 깨운다. 아직 움직이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조금은 달라진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며칠 전부터 머리 속을 맴돌던 사고를 나름대로 정리하며 오늘은 일을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래본다. 물론 그런다고 갑자기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은 예상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몸이 견뎌주어야 한다는 희망과 마감이 다가왔다는 절박감에 샤워꼭지를 더욱 세게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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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없는 이국 생활의 자유를 확인하듯 벌거벗은 모습으로 전신거울을 마주하고 습관처럼 옷을 챙기다, 옷장 한 구석에 숨은 듯 매달려 있는 넥타이 무리를 발견한다. 넥타이를 매어본 적이 언제던가? 항상 더운 나라 베트남에서 넥타이에 정장을 입는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래, 오늘은 스스로  예사롭지 않는 날을  만들어 보자.”

 

넥타이 하나로 작은 변화를 인지할수 있다면 넘치는 응보가 아니겠는가? 오랜만에 와이셔츠를 입고 컬러를 세워 넥타이를 매어보는데 벌써 넥타이 매는 법을 잊었는지 잠시 손이 버벅거린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대강 구겨진듯한 매듭이 만들어 진다. 재킷마저 챙겨 입을 생각을 해 봤지만 비록 아침 햇살이라도 결코 만만찮아 보이는 베트남의 태양에 정장의 욕심은 버리고 오늘은 넥타이 하나로 만족을 하자.
숙소에서 사무실까지 고작 3분 거리를 걸으면서 날 선 복장이 주는 신선함을 남몰래 즐겨본다. 넥타이 안쪽 목줄을 타고 흐르는 땀이 끈적하게 가슴을 적시며 흐른다.

인터넷으로 둘러보는 국내 신문에서 새로운 정부의 요직에 배치된 인사들이 노타이에 백팩을 즐긴다는 것을 무슨 새로운 시대의 도전이라도 되는 양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보여주고 있다.
백팩을 매든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든, 넥타이를 매든지 말던지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진짜 중요한 것은 건 백팩이 아니라 그 위로 한뼘정도 더 올라가 달려 있는 자네들 머리 속에 국민의 애환이 녹아 있는가 하는 것 아니겠는가? – Stop! –
앞으로 이 칼럼에서는 정치에 관한 얘기를 언급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상기하며 입을 닫는다.
지난 호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글을 접고 쉬었으니 무려 한 달여 동안 글을 접은 셈이다. 그런데 쉬는 것도 관성이 붙는지 쉽게 글을 쓸 생각이 일지 않는다.

글은, 쓰는 사람 그 자신이다. 다감한 사람은 다감하게 쓰고, 비천한 사람은 비천하게 쓴다. 병든 사람은 병약하게 쓰고 지혜로운 자는 지혜의 글을 쓴다.
영원한 남성상 제임스 딘을 만들어 낸 영화 에덴의 동쪽의 동명 원작 소설인 <에덴의 동쪽>, <생쥐와 인간>등을 쓴 미국의 유명 작가 존 스타인 백의 말이다. 그 말이 맞는다면, 지금 쓰고 있는 이번 글은 아무래도 그리 밝은 모습을 보여 줄 것 같지는 않다. 병약한 몸이라며 미리 방어막을 치고 있는 꼴이다.
복장이 사람을 부르는 것인가? 오랜만에 둘러맨 넥타이 탓인가, 이날 따라 오전 내내 손님을 맞이하느라 한 줄의 글도 시작하지 못했다. 오늘은 반드시 글을 쓰기를 희망하며 아침부터 복장을 바꿔가며 난리를 쳤지만, 결국 쉽지 않은 성과에 실망이 묻어나리라는 것을 스스로 감지한다.

생쥐야, 아무리 계획을 잘 짜고 해봐야 일은 제멋대로 어그러져 기대했던 기쁨은 고사하고 슬픔과 공통만 맛보는 일이 허다하지 않은가? 희망과 절망은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다. 우리는 늘 희망을 얘기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절망이다.
<생쥐와 인간>에서 나오는 글줄이 마치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듯한 모양이다. 별나지 않은 문장이 마음에 담긴다. 희망을 찾아 나선 여행에서 결국 걷어낸 것은, 희망이라는 알맹이는 빠지고 절망의 거죽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상황. 글을 찾아 나선 여정에 글은 사라지고 노약한 육신의 거죽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확인한 셈이다.

이 부끄럽고 아쉬운 글이 인쇄가 되어 나온다는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지지만, 그렇다고 다시 처음부터 다른 주제의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가끔은 이런 글의 흔적도 남겨 볼 만하지 않은가 하며 너절한 글에 대한 면죄부를 던져준다. 그래도 오랜만에 글을 쓴답시고 에너지를 소모한 탓인가, 간만에 느껴보는 허기가 반갑고 고맙기마저 하다.

호치민시 빈탄군에 있는 어느 절에 3천 년에 한 번 핀다는 꽃, 우람바다가 피었다고 한다. 불경에서는 이 꽃이 피면 부처나 이상적인 왕이 나타난다는 전설의 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주말, 기회의 땅 베트남에 계신 독자 분들은 한번 정도 들려서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을 확인하는 것도 괜찮은 시간이 되지 않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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