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June 27,Tuesday

로터스, 감춰진 뿌리

 

나이가 들면 불편한 것 중의 하나가 건망증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건망증이 가져오는 불편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자꾸 할 일을 잊어버리는 것인데, 냉장고 문을 열고는 ‘뭘 찾느라고 문을 열었지’ 하고 다시 머릿속의 기억을 뒤져야 하고, 말을 하다가 본 주제를 벗어나 곁가지로 들어서다 보면 본 주제를 잊어 버리고 어,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지 하고 스스로에게 반문한다. 그러다 생각이 나면 다행인데, 생각이 안 나면 할 수 없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상대에게 “웅…, 근데 내가 지금 뭔 얘기를 하고 있냐” 하고 물으면 얘기를 듣던 사람(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곤 했는데 그게 유머로 통하면 다행이지만 진짜 잊어서 길을 헤매는 중이라는 것을 알면 은연중 던져지는 측은한 눈길에 얼굴이 붉어지곤 한다.
그래도 이 증상은 치매의 초기 증세는 아니고 그저 나이가 들면서 겪는 불편일 뿐이야 하고 자신을 달랜다.
사실 뭐 이 정도야, 조금 주의를 하고 정신을 차리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실수지만 결코 묵과해서는 안 될 심각한 경우도 있다.
해야 할 업무를 챙겨두고도 까맣게 잊은 채 하루 이틀 날을 넘기는 것 정도는 그래도 봐줄 만한데, 문제는 그 일을 처리했는지 아닌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은 케이스나, 누군가와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도 그 약속 자체를 송두리 채 잃어버리는 난감한 상황을 연출되면, 이건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래서 일단 일에서 손을 놓지 않는다면,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서포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어떤 이가 없을까? 딱히 업무적이라기보다는 일반 직원들과 너무 연령 차이가 나는 현실을 감안하여 약간의 내공을 기대할 수 있는 연령대에, 한번 일에 빠지면 쉽게 돌아버리는 이 인간과의 대화가 가능한 양반. 이곳에 베트남이니 베트남 사람이 좋겠다 싶었다.
사실 그런 상대는 없다. 공연한 욕심을 부린 것이다. 더구나 베트남인에게서 그런 상대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국인 중에 골랐다. 그런데 한국인을 인터뷰하는 경우 기본적으로 판단의 기준이 흔들리게 되는데,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거나 혹은 편한 대화를 가능하다면 다른 요소가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는다. 결국, 결정하는 당시 호감 있는 모습만 보이면 사실 일단 시작해 봅시다 하고 손쉽게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외국이라 그런가? 일단 마음이 통하는 동포를 만나게 되면 간이고 심장이고 다 꺼내주고 만다. 가능한 할 수 있는 모든 호의를 제공한다. 그러면 상대 역시 마치 가족이라도 되는 양, 개인적인 작은 일들마저 챙기며 가깝게 된다. 그러나 일단 그 관계가 일이라는 것으로 조합된 관계이다 보면 가끔 얼굴을 붉혀야 할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몇 번의 갈등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의 실상을 알게 되는데, 산이 높을수록 골이 깊다고, 정을 많이 준 만큼 실망도 크기 마련이다.
더구나 개인적 호의가 반복되면 그것이 권리로 착각되는지, 더 커지는 호의가 없음이 불만의 요소가 된다. 그렇게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관계가 돼 버리지만 그래도 한번 맺은 인연은 여간해서는 쉽게 못 버리는 지질한 성격이라 여전히 미련을 두고 바라보는데, 사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단점도 고치지 못하는 게 인간인데 어찌 타인의 잘못을 고쳐서 쓰겠다는 생각을 하는지 참 무모한 일이다. 잠시 고쳐질 수도 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 다시 돌아오게 마련이다. 그런 현실을 꼭 찍어 먹어 본 다음에야 깨닫고 나서, 아! 이곳이 <로터스의 사회>지 하며 현지의 특성을 외면한 자신의 안일함을 자책한다.

로터스, 연꽃이다. 흙탕물 위에 피는 연꽃은 표면에 작은 돌기가 무수히 있어 그 작은 돌기들의 움직임으로 물기를 구르게 만들어 먼지를 씻어내고 깨끗한 잎 표면을 드러내지만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 물속의 뿌리는 그 속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불투명하고 깊은 흙탕물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즉 표면과 아래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면서, 보여주는 겉과 감춰진 속 뿌리가 서로 다른 식물이다.
베트남에서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식물이다. 베트남에 오기 전의 신분은 전혀 모른 체 그저 표면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요소만으로 관계를 맺는 베트남에서의 만남. 기본적으로 관계의 위험이 도사린 곳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연꽃 로터스는 바로 베트남의 국화(國花)다.

 

” 표면과 아래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면서, 보여주는 겉과 감춰진 속 뿌리가

서로 다른 식물이다. “

 

이런 환경에서 실수 없이 함께 할 사람을 정하기 위하여 기존에 일상적으로 요구되는 개인서류 외에 잣대 하나를 추가했다. 전 직장이나 검증된 분의 추천서. 특히 각별하게 느껴지는 사이일수록 더 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대상자가 어떤 인성에, 어떤 능력의 소유자이고 또한 일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지도 측정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 중에 하나라고 믿는다.
이런 제도가 일상화된다면, 이국에서 직원을 뽑는데 안전장치 하나는 걸고 가는 것이다. 우리 독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외국의 경우, 이 추천서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하다못해 알바 자리를 하나 얻기 위해서도 반드시 추천서가 필요하다. 그 추천서 한 장을 얻기 위하여 몇 개월 열심히 무급 봉사를 하고 추천서 한 장 허락받는다. 좀 가혹하다 싶기도 하지만 그렇게 구성된 사회에서는 나중에 “그럴 줄은 몰랐어” 하는 따위의 해프닝은 쉽게 생겨나지 않는다. 최소한의 예절이 지켜진다. 그래서 이별도, 새로운 만남도 상식선에서 이루어진다. 직장에서 깔끔한 매듭은 당사자의 미래의 삶에 영향을 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로 남는다.
우리도 적용할만한 사항이 아닌가 싶다. 하다못해 메이드를 구하는 경우도 전에 일하던 집 주인의 추천서를 요구하자. 아마 수많은 잡음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 추천서 샘플을 코참 같은 곳에서 비치한다면 좋을 것 같다. 그들이 바빠서 못하면 본지에서 다음 호에 만들어 올려놓겠다.

주역에 보면 ‘혁언삼취유부’라는 말이 있다. 혁명과 개혁은 세 번은 성취해야 비로소 진정한 결과를 만든다는 말이다. 작년에 시작된 개혁이 벌써 두 차례를 넘겼다. 이 과정을 겪으며 몸 안의 기가 다 소진된 듯하다. 그런데 한 번 더 하란다. 한숨이 나오고, 화가 치밀어 오르며, 억장을 무너지지만, 며칠 시간을 두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또 한 번만 다시 하라는 얘기는 역설적으로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크게 어긋난 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믿고 싶다. 원래 가장 큰 어려움은 목표가 가까워졌을 때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래도 이 거칠고 힘든 일을 또 하라고요?
아니, 이제는 아예 죽으라 한다. 죽어야 살 수 있다고.
너를 내려놓고 따르라 한다.
누구 어디 안 계신가요? 우둔한 이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소서.

길고 긴 한 주가 저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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