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August 23,Wednesday

거울 속의 자아

나는 이상이라는 시인을 좋아한다. 어렸을 적 그의 ‘오감도’를 읽은 후, 무슨 이유인지 그 시가 머릿속에 계속 남았다.
하지만 이상의 시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는 ‘거울’이다. 나는 ‘거울’을 처음 읽었을 때 받았던 신선한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우리가 거울을 볼 때 그곳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뿐 거울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로 인식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상은 달랐다. 그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또 다른 ‘나’라는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고 그 존재에 대한 그의 관찰을 이야기했다. 나는 어떻게 이상이 그런 관점을
가질 수 있었는지가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웠다. 왜냐하면, 그 시점까지 나는 단 한 번도 거울 속 내 모습을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런 관점을 가질 수 있는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의 실마리를 나는 한참 뒤에나 찾을 수 있었다.

 

대학 시절 나는 철학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방식이 교수님의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학생들이 토론을 통해 결론에 도달하는 식이었다. 토론 주제 중에 ‘무(無)’란 무엇인가가 있었다. 열띤 토론이 이어졌고 나도 그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마치 거대한 벽 앞에 가로막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무(無)’란 ‘유(有)’의 반대 개념이라는 단순한 출발점에서 시작했지만 막상 더 깊게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생각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버렸던 것이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와 주장들이 쏟아졌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수업의 마지막에 교수님은 칠판에 ‘Existence(존재)’를 커다란 글씨로 쓰시고는 우리가 벌인 토론은 무에 대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토론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내가 받은 충격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컸다. 내가 존재하고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인식하고 있기에 그래서 안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에 대해 실제로는 지독할 정도로 무지했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아는 것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동물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마도 자기 자신을 꽤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일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면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많은 것들을 보고 인식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모습은 보지 못한다. 그래서 거울과 같이 무엇인가에 투영해야만 비로소 자신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 그 무엇도 완벽하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결국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은 투영하는 표면의 정도에 따라 굴절되고 왜곡된 자신의 모습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이상은 자신에 대해 알고 이해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진지하고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자신이면서 동시에 자신과는 다른 존재로 인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연유에서 인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상의 ‘거울’은 단순한 시가 아니고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로 다가온다.

‘거울’에는 이런 구절들이 나온다.

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 내 말귀를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소.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요.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요.

거울 속의 나는 나와는 참 반대요마는
또 꽤 닮았소.

 

일장기로,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꿔 논다 해도 전혀 어색할 것 같지 않은 똑 닮은 장면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게 되는 이상의 시 구절: ‘거울 속의 나는 나와는 참 반대요마는 또 꽤 닮았소.’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산다. 세상 어디를 가도 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쁜 사람도 있고 정의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조리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국가나 사회를 보아도 구성원들의 구조적 차이나 도덕적 차이는 크지 않다. 결국 그 국가의 운명은 그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가 아니고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득세하는지를 보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북한이다.

북한이라고 유전자 공동체이자 운명 공동체인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고 이 땅에서 앞으로 살아가야 할 그들의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을 위해 어떤 세상을 만들고 남겨 주어야 하는가를 깊이 고민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권력의 입맛에 맞는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 ‘반동’, ‘미제 앞잡이’로 몰리게 된다. 그리고 그 대신 ‘서울 불바다’와 ‘미제를 때려잡자’는 구호를 외치며 권력이 듣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하고 부패한 권력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는 무리들이 권력을 휘두른다. 북한에 미래가 없는 이유이다.

다른 인간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반동’이니 ‘미제 앞잡이’같은 딱지를 서슴 없이 붙이고 권력을 임의로 휘두르는 것이 마치 당연하듯이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으면 양아치처럼 막말과 협박을 서슴지 않는 그들을 보면 떠오르는 단어는 하나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들.

그러면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우리는 어떠한가?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이상의 시 구절:
‘거울 속의 나는 나와는 참 반대요마는 또 꽤 닮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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