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August 5,Thursday

독서

한국에 돌아오면 매번 버릇처럼 인터넷으로 쇼핑을 하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글을 쓰기 위해 읽을 거리를 찾는 서적 쇼핑이 최우선 순위다. 이제는 쇼핑도 일의 일환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현대인에게 책이란 정신적 식량의 하나다’뭐 이런 문구를 스스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가벼움을 위로한다.
이렇게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책을 찾는 것이라면, 책이 식량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책을 읽는 행위 즉, 독서는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식사가 된다. 하긴, 행복한 식사다.
그런데 이 부분 – 독서 -, 독서에는 다양한 옵션이 존재한다. 단순히 글을 읽는 것만으로 독서라고 정의하는 것은 너무 가볍지 아니한가? 그러면, 어떤 글을 어떻게 읽는 것이 독서인가? 이것이 오늘의 화두다.   

미국인 철학자 핸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자신의 저서 <월든(Walden)>에서 독서에 대하여 아주 고전적이지만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정의를 내렸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진정한 의미의 독서를 고귀한 지적 운동이라고 정의 내린다. 사람들은 육체를 키우고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정신에게는 인색함을 드러낸다면 독서는 육체보다 더 중요한 우리 정신을 함양하는 가장 고귀한 행위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그 독서도 그저 읽는 행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구분한다.
자장가를 듣듯이 심심풀이로 하는 독서는 우리의 지적 능력을 잠재우는 독서이고, 우리가 가장 또렷하게 깨어 있는 시간을 바치는 독서만이 참다운 독서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이왕 글을 배운 이상 그 글로 쓰여진 최고의 문학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그저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으로, 혹은 *남이 읽어주는 글을 듣는 것 만으로 만족하여, 평생을 무기력하게 살면서 가벼운 읽을 거리로 자신의 지적 능력을 소진해 버린다고 질타한다.

<월든>이라는 책은 소로우가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 근처 월든 호숫가 근방에서 작은 오두막을 짓고 홀로 산

2년 여의 생활을 쓴 책인데, 대자연을 예찬하고 현대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한 책으로, 미국 대학생의 필수 교양서적의 하나다. 미국의 대학 졸업생에게 졸업장 대신 이 책을 주는 것이 좋겠다 할 정도로 칭송 받는 저서다.
그는 의미 없는 이야기 책들을 말과 소의 먹이인 여물이라고 폄하하며 이런 책은 아무리 많이 읽어도 자신의 언어에 대한 발음이나 문법에 조금도 발전이 없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기술도 늘지 않는다며 이러한 독서 취향은 시력의 감퇴, 혈액순환의 장애 그리고 지적 능력의 전반적인 위축이나 퇴보를 가져올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전혀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의 무식과 저급한 수준의 책만을 읽는 사람들의 무식 사이에는 그리 큰 차이를 없다고 지적하며 독서의 대상으로 고전을 권한다.
“고전이야 말로 인류의 고귀한 정신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인가?”라고 반문하며“고전에 대한 연구를 그만두는 것은 자연이 낡았다고 자연의 연구를 그만두는 것과 다름없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알고도 읽지 않는 것은 플라톤이 바로 우리 이웃에 살고 있는데도 그와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모든 이의 입을 다물게 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또한 독서의 자세에 대하여도 언급한다. 어떤 자세로 글을 읽어야 하는가?
독서는 그 글이 처음 쓰여졌을 때처럼 의도적으로 그리고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 말은 가히 충격적이다. 우리는 고작해야, 귀한 책이라면 반드시 정독하고 몇 번에 걸쳐 다시 읽어보라고 권하는 것이 전부인데 그는 아예 그 글을 쓰듯이 읽으라고 한다. 이보다 더 정성스런 독서의 자세가 어디 있는가?

그렇다면 종합해보자.
결국 참다운 독서란, 인류의 고귀한 정신이 담긴 고전을 골라서, 가장 정신이 맑게 깨어있는 시간에, 그 글이 쓰여질 때처럼 신중하게 한자 한자 읽는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그는 특별히 그리스 시대에 쓰여진 고전 <일리어드>,<오딧세이> 등을 가능한 원어로 읽을 것은 추천한다. (무슨 독서의 벽이 이리 높은가?)
사실 고전은 읽어야 하지만 읽혀지지 않는 책이다.
이미 여러 매체나 다른 경로로 그 스토리를 익히 들어온 탓에 책장을 넘긴 적도 없으면서 마치 읽은 것처럼 스스로를 위로하며 독서의 동기를 휘발하는 책들이 바로 이런 고전들이다.
더구나 원어로 읽어야 한다면 아예 읽지 말라는 얘기가 되니 그것은 접어두고 가능하다면, 영어나 다른 언어로 쓰여진 책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어를 직접 한글로 번역한 책을 골라서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책을 골라서 호메로스가 이 글을 쓰여질 때의 자세로 충실하게 읽는 것이 소로우가 말한 진정한 독서와 그나마 유사한 작업이 아니겠다 싶다.

몇 번을 되 뇌이지만, 이 말이 묘하게 독서의 열망을 자극한다.
“쓰일 때처럼 신중하게 읽어라”
이 말은 진도가 나가지 않은 독서에 대한 염려를 사라지게 만든다.

헨리 소로우는 또한 말을 하는 것보다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는 정성들여 설명한다. 그는 “듣는 언어와 읽는 언어 사이에는 상당한 간격이 있다. 말로 한 언어는 일시적인 것으로 하나의 소리, 하나의 방언에 불과하고 그것은 동물처럼 태어나면서 무의식적으로 배우지만, 쓰는 언어 즉, 문자는 신중하게 선택된 언어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문명은 문자를 갖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고 문자는 시간과 거리에도 불문하고 고대의 보물들을 식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때때로 터져 나오는 웅변가의 열변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글자로 기록된 고귀한 말은 일시적인 구어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있다” 고 글의 역할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책은 이 세계의 귀중한 재산이며 모든 세대와 모든 민족의 고귀한 유산이다. 그것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어느 왕이나 황제를 능가한다”며 글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최근 점점 글 읽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을 느낀다. 나이가 들어감을 핑계로 부진한 진도를 위로하지만 사실은 독서하는 자세에 문제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자신도 모르게 자꾸 쓸 것을 찾기 위한 독서를 하다 보니 읽는 글 자체의 존중이 사라지고 독서의 깊이도 점차 얇아지며 가능한 짧은 시간에 많은 글을 읽는 다독을 위주로 책장을 넘기게 된다. 이 얼마나 우매한 작업이었나.

핸리 데이빗 소로우,
2백 년 전의 그가 2백 년 후에도 여전한 독서의 우매함을 꾸짖고 있다.
“그 글이 쓰여질 때처럼 신중하게
읽어라”

 

* 성경을 직접 읽지 않고 성직자들의 설교를 통해서 듣는 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현대인의 생활을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책에는 성경이 직접 언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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