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August 20,Sunday

베트남의 민간신앙

” 베트남에는 수많은 신자와 승려가 있는 불교, 기독교, 신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가 모두 인정되고 또 활동을 보장받고 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모든 물건이 다 영혼이 있다는 관념으로 옛 사람들이 은혜를 받기 위해 아주 많은 신, 특히 하늘, 달, 땅, 숲, 강산 등 농업과 관련된 사물들을 숭배하기도 한다.
베트남사람과 몇몇 소수민족의 오래된 관습들 중에 하나는 조상을 숭배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베트남 사람에게는 집안에 조상신위를 모시고 선인들의 은공을 기억하는 제사 관습이 아주 중요한 일로 인정받고 있다.
이번 호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혹은 지역적으로 지켜오던 민간신앙, 까오다이(Cao Đài), 호아하오(Hòa Hảo), 다오옹쩡( Đạo Ông Trần- Mr Naked), 다오즈아( Đạo Dừa) 등에 대하여 알아 보도록 하자. 이들의 민간 신앙을 통해 베트남 인들의 문화와 정서를 알아보는 일도 이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사려된다. “


까오다이교 (Đạo Cao Đài)

까오다이는 꽤 새로운 혼합적 유일신교로서 1926년 베트남에서 창시되었다. 까오다이는 약칭이고 전체 이름은 ‘다이다오땀기포도’(Đại Đạo Tam Kỳ Phổ Độ) 이다.
까오다이란 높은 곳이라는 뜻으로, 상제가 지배하는 곳을 뜻한다. 또는 우주를 세우는 상제인 ‘까오다이띠엔옹다이보탓마하탓’(Cao Đài Tiên Ông Đại Bồ Tát Ma Ha Tát)라는 긴 이름의 약칭이기도 하다. 이들의 교리를 잠시 들여다 보면, 까오다이 신자들은 상제가 자기 신교를 창시했다고 여긴다. 교리, 상징체계와 조직은 모두 다 상제의 몸인 득까오다이(Đức Cao Đài)가 직접 지정한다고 믿는다. 천국의 개념으로 보이는 떠이닌(Tây Ninh) 또아탄(Toà Thánh-성좌)를 건설하는 것도 상제의 안내에 의한다.
응오반쩨우(Ngô Văn Chiêu), 까오꾸인끄(Cao Quynh Cu), 팜꽁딱(Phạm Công Tắc) 그리고 까오화이쌍(Cao Hoài Sang) 등 까오다이교 최초 제자들은 ‘기포도트바’(Kỳ Phổ Độ Thứ Ba)의 시작인 신흥종교를 세우는 데 이에 대한 교시를 상제로부터 직접 ‘통공’(Thông Công- 연락) 받았다고 전한다. 천국을 지배하는 상제에 돌아온다는 최소의 목표와 불교의 개념인 윤회에서 탈출한다는 최상의 목표를 세우고 신자들은 살생하지 않기, 경읽기, 조상숭배, 채식하기 등 까오다이교의 경전을 실천한다.
까오다이교의 신자 수는 출처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한데, 대다수 2-3백 만 명으로 추산한다. 또 미국, 호주, 유럽에 신자 약 3만 명이 거주한다고 추산한다.

꺼붓(Cơ Bút – table frappante 종교의 기본 철학 정도로 이해된다)으로 까오다이교가 창시되고 종교의 경전이 만들어졌다.
꺼붓은 ‘다이다오땀기포도’의 근본바탕이다. 꺼붓을 통해 종교의 법률이 발행되고, 또아탄(성좌), 탄텃(Thánh Thất), 탄띤(Thánh Tịnh)이 형성되고, 경전이나 제례 철자가 성립되고 종교를 가르치는 문학작품들이 여러 세대를 거쳐 동서로 널리 전파되었다.
까오다이교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치는 세 인물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응오민쩨우(Ngô Minh Chiêu) 혹은 응오반쩨우(Ngô Văn Chiêu)로 불리는 인물인데 1878년 빈떠이(Bình Tây), 철런(Chợ Lớn)에선 태어났다. 레반중(Lê Văn Trung)은 1875년 Chợ Lớn에서 태어났다. 응오민쩨우를 대신하여 까오다이교 지도 역할을 한 사람이다. *팜꽁딱(Phạm Công Tắc)은 1934년에 운명한 레반중을 대신하여 까오다이교의 지도자가 되었다.

1925년 크리스마스 밤에 까오다이교는 정식 정착되었다. 그 후 까오다이교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고 신자가 수십 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1년 후에 명성 있는 까오따이교 신자 247명의 사인이 있는 ‘떠카이 다오’(Tờ Khai Tịch Đạo)가 당시 남부의 총독인 Le Fol에게 제출되었을 때 비로소 까오다이교가 종교로서 활동을 인정받았다. 그 후 까우다이교 창립자들이 떠이닌성 거께인(Gò Kén)에 있는 뜨럼뜨(Từ Lâm Tự) 절에서 프랑스 인과 베트남 정권의 대표들의 참석으로 개회식을 개최 하였다.

까오다이교의 교리에 의하면 상제가 나타나기 전에 종교가 있었다. 도덕경에 언급된 것처럼 그 종교는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고 변함도 없다. 일정 된 시점이 되었을 때 빅뱅(Big Bang) 현상이 발생했고 그에 의해 상제가 태어났다. 당시 우주가 형성 안되어서 상제가 우주를 세우기 위해 음과 양을 만들었다. 까오다이교는 자기의 생명을 숭배한다는 뜻으로 천안(Thiên Nhãn – 상제의 눈)을, 천하(세상)의 양심(le culte de la conscienses)을 숭배한다는 뜻으로 지존(Chí Tôn)을 내세운다.

까오다이교의 성지

Tòa thánh Tây ninh 떠이닌성 성좌
위치 :  Xã Long Thành Bắc, huyện Hòa Thành, tỉnh Tây Ninh동난쪽으로 4km, 호찌민시에서 서북쪽으로 1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특징 : 까오다이교의 유명한 예술 종교 건축물이자 떠이닌까오다이 교의 본부이다. 1933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955년에 정식 개관된 떠이닌성 성좌는 까오다이의 상징인 천안을 숭배하는 곳이다. 천안 외 까오다이교는 석가모니, 관세음보살, 예수, 공자, 노자 등도 숭배한다. 까오다이교에 따르면 성좌는 세상에 백옥상( Bạch Ngọc Kinh – 상제가지배하는곳)을 상징한다.
면적 40㎢ 구역에 위치한 떠이닌 성좌는 약 100개의 건축물을 포함하고 콘트리트와 대나무 재료로 건설되었다. 12개의 문이 있고 문마다 4령(용, 기린, 거북, 봉황) 그리고 연꽃을 부각한 것인데 그중에 제일 큰 문인 정문은 삼교(불교, 도교, 유교) 정신을 나타내며 각각 고유의 특색을 살리며 장식되어있다.
차례시간은 정오 12시이다. 성좌 방문은 언제든지 가능하며 신발착용 금지, 남성은 오른쪽 입구로 여성은 왼쪽입구로 양 옆의 입구로만 들어 가기 등 몇가지 규정을 지켜야 된다.


호아하오교(Đạo Hòa Hảo)

호아하우교는‘불교호아하오’(Phật Giáo Hòa Hảo)가 정식이름이다. 호아하오교는 1939년 7월 4일 베트남 쩌우독(Châu Đốc)성, 떤쩌우(Tân Châu)현 호아하오(Hòa Hảo) 마을에 서 후인푸소(Huỳnh Phú Sổ)라는 사 람이 창시한다. 호아하오교는 불교 교리를 바탕으로 사람이 자택에서 수양한다는 교리를 가 지고 있다. 1940년 여름 호아하오교 신 자수가 기록적으로 증가한다.  이 급속한 신조수의증가가 지배 정권에 대항 역량이 될 수 있다고 염려한 프랑 스 식민 정권에서 후인푸소가 미쳤다는 소문을 퍼트려 쩌관(Chợ Quán)정신 병원에 수감했다.  1942년 10월 일본 군대의 개입으로 출  소된 후인푸소가 사이공으로 이사한 후 1946년 9월 21일 국내 정치가들과 합 작해서 ‘베트남민주사회당’(Việt Nam Dân Chủ Xã Hội Đảng)이라는 정당 을 설립했다.

1945년 ‘비엣민’(Việt Minh – 베트남 독립동맹회)과 손을 잡아 프랑스 식민 에 대항 통일조직을 설립했다.  그러나 비엣민과 호아하오 간의 무력 충돌사건이 일어나고, 1947년 4월 16일 밤에 ‘비엣민과 호아하오 무장 세력 간의 충돌해결미팅’이라는 모임이 열렸다.  그 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후인푸소가 그때부터 흔적 없이 사라졌단다.  그 후에 후인푸소 대신 후인공보라는 사람이 호아하오 교의 지도자가 되었고 호아하오 정치 조직의 장군들은 1954년 휴전 때까지 비엣민에 저항하기 위해 프랑스정권과 손을 잡았다 제례불교에서 비롯된 호아하오교는 불교 의 인과 율 자비 박애를 강조한다.

호아하오가 형상 물이나 악신 숭배, 미신을 금지하며 종이나 목어 사용하지 않고 생수(결백의 의미), 꽃(정결)과 향 (추잡제거) 만으로 차례를 지내는 것 등 간소화 행도 방식을 중요시한다. 호아하오교 신자가 음력 중순 이틀과 하순 이틀 동안은 채식하며 쇠고기, 물소고기와 개고기를 피한다. 호아하오교 신자가 오전과 오후 매일 두번 제례를 지낸다. 2004년 메콩강 지역에 사는 호아하오교 신자는 약 2백 만 명이나 된다.

호아하오교의 성지
Điểm đến của đạo Hòa Hảo 안화사(An Hòa Tự) (Chùa Thầy라는이름도 있다.)
위치 Làng (xã) Hòa Hảo, quận Tân Châu, tỉnh Châu Đốc. (Nay là thị trấn Phú Mỹ, huyện Phú Tân, tỉnh An Giang)16㎢ 구역에 위치한다.
특징 안화사는 목기둥, 기와지붕, 석회벽 등으로 전통적 건축으로 건설되었다.
매년 음력 1일과 15일, 호아하오교 창시날인 음력 5월18일, 후인교주 생신날인 음력 11월 25일에 관광객 수백 만 명이 찾아와 차례를 올리고 특색있는 여러 종교활동에 참가하며 호아하오교의 심장으로 간주 된 이절에서 자기의 성심을 표현 하곤 한다.


옹쩡교(Đạo Ông Trần)

옹쩡(Ông Trần) 혹은 옹냐렁(Ông Nhà Lớn–큰집 아저씨란 뜻)은 본명이 Lê Văn Mưu(1855-1935)으로 고끼 엔양 성(Kiên Giang) 하띠엔 지역(Hà Tiên)출신이다. 바리어 붕따우 성에 속한 롱선(Long Sơn, Bà Rịa) 섬마을을 세운 사람이다. 1891년 Lê Văn Mưu가 가족과 함께 Vùng Vằng(바리어 붕따우 성 동북 쪽)로 이사하고 거기에서 염전 업을 시작했다. 가끔 서남부 지역이나 캄보디아에 소금을 배로 운송하여 판매하거나 쌀로 교환했다. 사업이 날이 갈 수록 잘되어 장기 체류를 위해 Mưu아저씨는 마을 을 형성하는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Mưu 선생님이 권력자의 허가를 받은 후에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Núi Nứa에 속한 Bà Trao 마을을 형성했고 현재는 Long Sơn섬이 그곳이다.

1904년서 홍수가 남부 지방에 심각한 피해를 끼쳤다. 소식을 알게 된 옹쩡은 쌀 창고를 열어 피해자에게 주었다. 그 사건 후 사람들은 옹쩡을 존경하기 시작했고 롱선 섬이 잘 살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이곳으로 모여들어 자리를 잡았다. 옹쩡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벌거벗은 사람이란 뜻이다. 그에게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간단하다.
“옹쩡은 고기잡이 할 때나 농사를 지을때 늘 웃통을 벗고 맨발에 반바지 차림으로 일하곤 했다. 게다가 헤어스타일도 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 뜨렸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금방 띄었다.”

옹쩡 교는 뜨안히에우응이아(Tứ Ân Hiếu Nghĩa – 사은교의) 도리의 기초를 근거해 형성되고 발휘된다. 옹쩡교는 다른 종교와 많은 상이점이 있다. 옹쩡교에 따라서 사람들이 “ly gia cắt ái”(분가하고 애정과 절교한단 뜻)를 실행할 필요는 없으며 교리 대신 자아수련에 집중한다. 옹쩡교가 사람 된 도리라는 말처럼 옹쩡교는 인(nhân), 의례(lễ nghĩa), 지식(trí), 신뢰(tín), 충성(trung), 효(hiếu)와 같은 사회의 도리들을 중요시한다.
오늘날 롱선 옹쩡종신자들이 여전히 길게 땋은 머리에 검은색 아오바바(베트남 남부 전통복) 차림의 옷을 입으며 남부지역의 특징이 담긴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구정맞이 대련 쓰기, 장례식은 24시간 내 장사하기, 결혼식은 날짜를 볼 필요 없이 매달 음력 1일과 16일 둘 중 하나에 정하기 등 옹쩡이 롱선 사람에게 전해준 특수한 관습은 여전히 남아있다.


옹쩡교의 성지
냐렁롱선(Nhà Lớn Long Sơn)
위치 냐렁롱선 또는 덴옹쩡(Đền Ông Trần – 옹쩡당 집이란 뜻) 은 기와지붕과 귀목 자재로 옛 건축 스타일로 건설되었으며 Nứa산밑에 면적 2ha구역에 위치한다.
특징 이 규모가 큰 건축물은 191년에 옹쩡과 신자들의 힘과 재물 공헌으로 건설이 시작되었고 1929년에 완성 되었다. 이 폐쇄 건축물은 옹쩡 사당구역, 옹쩡의 무덤구역 그리고 학교, 시장, 무주택 유민을 위한 기숙사, 쌀 창고, 쌈(Sấm) 배(옹쩡이 타왔던 배 5 대 중 하나) 보존장소, 목수 일을 하는 장소, 주방 등을 포함하는 복합구역이라는 주요 세 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건축물은 옹쩡교의 신양 특징뿐 만 아니라 야생의 신천지에 온 유민들의 단결성을 표현한다. 당시 냐렁이 그 지역의 제일 웅장한 건축물이어서 옹쩡은 옹냐렁(Ông Nhà Lớn- 큰집아저씨)으로 불린다.
1991년 8월 3일 허가번호 제1371/QĐ-VH 호로 냐렁 건축물 전체가 문화 정보부에서 국가급 역사- 문화 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옹쩡이 1935년 3월 24일에 서거했고 서당 구역 남쪽에 안장되었다. 매년 이날과 중양절(음력 9월9일)에 냐렁 롱선에 거대한 축제가 열려서 곳곳의 사람 수십만 명을 끌어 모우는 관광지 역할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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