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September 19,Saturday

새 아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나,

뭐가 그리 바빴을까?

언젠가 너에게 글을 보내야지 하면서도 바쁜 틈새로 그냥 빈말처럼 잘 지내지 하며 글을 보내는 건 마치 색만 살아있는 플라스틱 조화를 보내는 것 같아 수많은 세월을 함께 보낸 친구에게 예의가 아니다 싶어 그저 마음에만 두고 있다가 이제서야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핑계에 얹어 몇 자 적어보기로 했어.

 

축제,

새해는 늘 축제 같아.

새해를 맞이한다는 것이 따지고 보면 인간이 살아가며 지나는 시간 속의 한 순간에 불과한데 왜 우리는 인위적인 축제를 벌이고 서로 새 출발을 다짐하며 마치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처럼 난리를 칠까?

인생의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 우리의 생이 너무 길어서 한 달음에 다 돌아가지 못하니 마디를 정하고 그 마디마다 매듭을 주고 다시 마디를 자라게 하여 그 긴 세월을 서로 잇게 하는 것인가 봐. 대나무에 마디가 없으면 그렇게 길게 높게 자라겠어?

 

그러고 보면 매듭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야.

매듭이 주는 가장 큰 위안은 망각인 것 같아.

지난 해를 떠올리면 난 왜 이렇게 부끄러운 일만이 떠오르는지 몰라.

기쁘고 즐거운 일보다는 화내고 싸우고 갈등으로 심란한 마음을 달래던 기억만 떠오르는지…

그래도 새로운 매듭이 생기면 일단 그런 언짢은 기억을 더 이상 떠 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과 같은 것이니, 위안이 생기잖아 그래서 좋아.

 

그것뿐이 아니지 그렇게 매듭을 만질 때마다 또 다른 느낌이 드는 건 새로운 마디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는 거지. 그전에 잘못된 것이 있어도 일단 매듭을 넘기면서 면책이 되는 것 같아. 그래서 과거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거지. 연말 대 사면을 받은 기분이야. 뭐 그래 봐야 매번 그 밥에 그 나물인 비슷한 마디를 만들곤 하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삶의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는 건 큰 축복이지.

단지 세월이 가면서 그 놈의 마디가 점점 가늘어 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서글픈 일이긴 하지만 말이야.

 

지난 연말에 새해 인사를 나눌 친지들을 한번 둘러봤어.스마트 폰과 메일 그리고 가능한 모든 연락처를 다 뒤져봤는데, 거참, 예상외로 많은 숫자에 놀랐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수학문제가 가족과 이웃에게 받는 은혜를 세어보는 것이라 했는데 인사를 해야 할 지인들이 이리 많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랐다, 정말.

 

그런데 이상하게도 20년을 가깝게 살아온 베트남에서 쌓은 인연은 예상외로 많지 않더구먼.

하긴 베트남에서는 거의 사무실과 집만 왕복하며 살고 있으니 별다른 인연이 생겨날 틈이 없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는 뭔가 모를 단단한 벽을 느끼곤 해. 실제로 나 같은 하수의 눈으로는 그들의 속을 도통 모르겠어. 대다수의 사람들이 마치 일당 백이 가능한 일급 무사들 같아서 가깝게 가기도 두렵고, 설사 가깝게 간다고 해도 그의 진면모를 알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예 사귀는 것은 대충 포기하며 살아온 탓이 아닌가 싶어.

그럼 그 더운 이국의 땅에서 친구도 별로 없고 술도 못 마시는 주제에 무슨 재미로 그곳에서 사냐고 묻고 싶겠지.

이유야 명확하지,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으음, 둘째는, 그래, 그렇게 사는 게 견딜 만 하다는 거야. 거꾸로 생각하면, 한국에 가면 아무 하는 일없이 살아야 하는 게 무서운 게지. 그렇게 지나다가는 얼마 안 가서 밥 숟가락 놓겠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러니 묻지 마라, 차마 죽는 게 무서워 이렇게 산다고 할 수는 없잖아.

 

새해 아침 예년과 마찬가지로 올해 한국나이 93세가 되시는 노모께 세배를 올리고 역시 예년과 같이 주님의 은총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명심하고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라는 덕담을 받았어. 거의 수십 년을 매번 같은 덕담을 전하시는 어머니, 그리고 여전히 듣기만 하는 불효자. 그래도 나는 울 엄마가 90세가 넘어도 매번 꼭 하실 말씀을 빼놓고 하시는 반듯한 정신을 지니고 계시다는데 감사할 뿐이야.

 

그런 거 알아?

누군가의 모습이 가슴 가득히 채워졌을 때 느끼는 감정, 아마도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이고 그런 사랑을 통해 느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 아닌가 싶어. 내가 울 엄마가 가끔 가족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는 것을 들을 때나 이렇게 새해에 7형제 12손자 그리고 3명의 증손자까지 모두 이름을 기억하고 각자에게 적합한 덕담을 내릴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바로 그런 행복이야. 울 엄마는 나에게 그런 존재야. 사랑을 깨닫게 하고 행복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려주시는 분. 아마도 진정한 신앙에서 얻는 행복이 바로 그런 감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런데 어머니에게 느끼는 사랑과는 달리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느끼는 급조된 사랑이라는 감정은 너무나 소중하기는 하지만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같이 위험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위약한 감정인 것 같아. 작은 갈등이나 사소한 다툼만으로도 산산조각이 나는 경우를 흔히 보잖아.
 
그런 반면에 사랑과 배치되는 부정적인 감정, 분노를 시작으로 미움, 증오, 원망, 질시, 저주 등의 감정은 마치 철갑 옷을 두른 무서운 질병과도 같아서 일단 우리 뇌리에 들어오면 일 순간에 마음을 점령하고 정신 없이 뒤흔들어 버려서 그나마 유약한 사랑의 감정을 가차없이 박살내버리고 말지.
 
인간의 심성은 워낙 미약하고, 또 경쟁이 삶의 전술로 변질된 이 현대사회에서 행복을 실감하며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을 해봤지. 전력이 약한 축구팀의 전술과 같이 사랑이라는 골을 집어 넣고자 무작정 익지도 않은 사랑 타령을 하는 공격일변도의 전술을 꾸리기보다는 아차 방심하는 순간 우리 몸으로 들어와 온통 정신을 파괴하고 마는 미움, 증오, 질시, 원망, 저주들과 같은 부정적 감정의 공격을 방어하는 수비를 먼저 하는 것이 효율적 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올해는 분노로 시작되는 부정적 감정을 막는 <품격>이라는 최고의 수비수를 영입하기로 했어. 영입비가 만만치 않겠지만 어떻게든 만들어봐야지. 그리고 그 단단한 수비를 기반으로 <배려>와 <사랑>의 골을 넣도록 노력해봐야겠어.

어때? 오랜만에 세운 그럴듯하고 기특한 작전이라고 칭찬 좀 해봐.

 

그건 그렇고, 자네와 나,

언제 얼굴 한 번 보려나.

언젠가 보겠지. 안달하지 않아도 벌어질 일은 벌어지게 되어있으니까.

그려, 자네와 나,

항상 그랬듯이, 바람처럼 구름처럼 물처럼 같이 흐르기도 하고 때로는 따로 가기도 하고, 어쩌다 마주치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뭐!

 

갑오년 아침, 영민이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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