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November 24,Friday

피가로의 결혼

오늘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의 희극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돈 조반니>, <마술피리>와 함께 모차르트의 3대 오페라로 꼽힙니다. 이 작품은 1785년에서 1786년 사이에 작곡된 전4막의 오페라 부파로 보마르셰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로렌초 다 폰테의 대본에 곡을 붙인 곡입니다. 18세기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수도 세비야를 배경으로 한 이 오페라는 1786년 5월 1일 오스트리아 빈 부르크 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1781년, 고향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으로 온 모차르트는 이듬 해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을 발표하면서 오페라 작곡가로서 성공적으로 빈에 안착합니다. 하지만 독일어 오페라라는 파격적인 시도를 선보인 이 작품은 보수적인 음악가들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고, 이후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한동안 침체기를 겪게 됩니다. <피가로의 결혼>은 오랜 공백을 깨고, 모차르트가 오페라 작곡가로 한 단계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해 준 작품이었습니다.

1786년 5월 1일 빈 부르크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 이 작품에는 ‘이탈리아어로 된 징슈필’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었습니다. 초연 무대는 열광적이지는 않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로 공연이 이어질수록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딸 난네를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네 동생의 오페라 두 번째 공연에서는 5곡이, 세 번째 공연에서는 7곡이 앙코르를 받았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의 인기가 점차 높아지자, 살리에리와 리피니가 비슷한 시기에 각각 오페라를 완성했고, 작품의 상연을 놓고 모차르트와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경쟁이 과열되자 황제가 직접 나서서 <피가로의 결혼>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런 경쟁 구도 속에서 모차르트의 작품은 빈에서 더 오래 상연되지 못했고, 그 해 말 프라하로 건너가 공연됩니다. 하지만 프라하에서의 공연은 빈에서보다 더욱 열렬한 찬사를 받으며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 인기에 힘입어 1789년 <피가로의 결혼>은 빈에서 재공연 됩니다.

오페라 부파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피가로의 결혼>은 프랑스 작가 보마르셰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보마르셰 3부작’으로 잘 알려진 그의 희곡은 스페인 세비야를 배경으로 이발사 피가로와 바람둥이 알마비바 백작이 펼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1부 세비야의 이발사(Le Barbier de Séville), 2부 피가로의 결혼(Le Mariage de Figaro), 그리고 3부 죄 많은 어머니(La Mere Coupable)까지 전체 3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 1부 ‘세비야의 이발사’는 파이지엘로, 로시니, 존 코릴리아노 등이 오페라로 만들었고, 모차르트는 그 중 1부의 속편 격인 2부 <피가로의 결혼>을 선택했습니다.

알마비바 백작의 시종인 피가로와 백작 부인의 하녀 수잔나의 결혼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하루 동안의 해프닝을 다루고 있지만, 작품 안에는 백작이 하녀를 상대로 행사하려는 악습, 그리고 하인이 백작을 골탕 먹이는 설정, 백작 부인과 하녀 수잔나가 서로 옷을 바꿔 입는 장면 등 귀족 사회와 신분 제도를 통렬하게 풍자하는 요소들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장치들은 계급 사회에서 시민 사회로 전환되는 18세기 유럽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오페라는 오페라 자체도 유명하지만 서곡은 더욱 우리에게 익숙한 곡입니다. 오페라의 1막부터 끝까지 모짜르트 특유의 장난스러움과 재치가 녹아들었습니다. 오늘은 우아하게 오페라의 속으로 가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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