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March 29,Friday

함께하는 식사

 

오랜 친구가 저와 함께 외식이라도 하게 되면 푸념삼아 필자를 비난하는 메뉴가 있습니다.
“너는 참 멋없이 건조한 식사를 한다” 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맛 없는 식사가 아니라, 멋 없는 식사를 한다는 말이. 이 친구 하는 말은 식사를 하면, 음식을 화두로 시작하여 이런 저런 세상 사는 얘기를 하며 즐기면 좋겠는데 저는 그저 허기진 인간이 배를 채운다는 목적으로만 밥상에 앉는지 그저 딴 생각없이 먹기만 한다는 힐난입니다. 무슨 말인지 압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식사를 함께 하는데 좀 여유롭게 하면 좋겠는데 그저 허걱대며 먹어대는 모습이 마뜩치 않은 것이죠.

하긴 그렇습니다..
가만히 제 식사 습관을 뒤돌아보면 밥상에 앉으면 그저 먹는다는 목적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일단 식탁에 앉으면 먼저 나오는 반찬부터 공략합니다. 만약 좀 맛있는 반찬이 나오는 날이며 밥이 나오기 전에 이미 반찬으로 배를 반쯤 채우죠. 그리고 메인으로 나오는 요리와 밥이 나오면 그 역시 맛에 대한 품평은 일체없이 후다닥 먹어 치우고 식사를 마칩니다. 그 친구 말대로 참으로 멋없고 건조한 식사, 맞습니다. 그러니 식사를 하며 분위기를 즐기려는 그 친구에게는 도무지 식탁 상대로 적합하지 않은 인간이 됩니다. 그 친구는 이 말을 통해 “이젠 먹고 살만 한데 식사 매너 좀 고치는 게 어때” 하는 것이죠.

지금의 젊은이들은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긴 하지만, 고작 60여 년 전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의 한반도에서 살아남은 인간에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는 인간으로서 생존하기 위한 기본적 의식주 해결이 전부였습니다. 당시에는 그저 하루 3끼 밥 만 먹으면 행복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반찬이 맛 있는지 없는지를 따진다는 것은 사치 이전에 죄악이었죠. 그런 빈곤의 시절을 보낸 탓인지, 지금도 식사는 그저 먹는 것으로 그 행위의 목적이 충분히 달성됩니다. 음식의 질에 관계없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배를 채우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래서 멋없이 건조한 식사를 한다고 힐난을 받는 것이죠. 그런데 저와 같은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 친구, 진우상역의 김진홍 사장은 왜 식사에 멋과 맛을 찾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는데, 그 친구는 그 당시 잘 나가는 고위 군인을 부친으로 둔 덕분에 적어도 저보다는 식사의 질이 훨씬 여유롭고 양호했던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계신 장년층 어른들의 식사 습관을 한번 살펴보세요, 대부분의 그들에게는 식사시간은 그냥 먹는 행위를 하는 시간 일 뿐 다른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제가 이상한게 아니라 우리 친구가 다른 것입니다.

user image

아무튼 이렇게 식사를 본능적인 욕구의 해소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던 인간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인가, 최근 들어 조금씩 생각이 바뀌고 있습니다.
나이가 이런 변화를 만들었다기 보다 절대 빈곤이 사라진 풍요의 시대가 식사에 대한 다른 의미를 찾아가도록 만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요즘 식사는 어떤 의미로 변화되었는지 한번 살펴 볼까요?

우리는 흔히, 커피 한 잔 할까? 차 한 잔 할까? 하는 말을 자주 나눕니다. 이런 말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요?
진짜로 좋은 커피나 차가 있으니 함께 마시자는 목적일까요?

이 말의 뜻은 다들 짐작이 가겠지만, 시간을 함께 보내자는 의미입니다. 이런 말에서 나오는 차나 커피는 그 만남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저 시간을 함께 보내는데 사용되는 수단이자 핑계입니다. “아니, 커피 마시자며 왜 아이스크림을 먹는 거야” 하며 항의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시간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며 관계를 형성합니다. 이렇게 차를 나누는 짧은 시간을 한 두 번 같이 나누고 나면 이제 식사를 한번 할까요 하는 말을 서로 나눕니다. 좀 더 가까운 관계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죠. 커피나 차를 함께 하는 것도 시간을 함께 한다는 의미를 갖는데 이보다 더 무거운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함께 나눈다는 것보다는 훨씬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먹는다는 것 – 식사, 이것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생리적 욕구입니다. 그러니 식사를 함께 한다는 의미는 생리적 욕구를 같이 나눈다는 면에서 각별합니다. 우리는 얼마 전 만해도 가족이라는 말과 식구라는 말을 혼용하여 사용하여 왔습니다. 식구란 식사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가족과 같이 가까운 사람으로 생각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니 식사를 함께 하는 사람은 관계의 최상급에 위치한 사람이라고 봐도 크게 어긋난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최상급의 관계자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바로 식사입니다.
그러니 식사를 함께 하자는 말은 생리적 욕구의 공유를 시작으로,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나누며, 과거의 흔적이 드러나는 식사 버릇도 보여 주는 등 자신의 마음을 열겠다는 적극적 제안이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면에서 이런 기회를 자주 갖는 사람은 그만큼 풍요한 인간관계를 가질 가능성이 많겠죠.
식사를 함께 나눌 사람이 많은 이는 예전에는 큰 사랑채를 가진 부자라는 의미가 있었지만 요즘은 그저 단순한 물질적 부자를 넘어 사회적 관계의 풍요를 지닌 더욱 중요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듯합니다.
관계가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식사가 등장합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도 예배 후 식사를 제공하는 것을 보면 식사가 인간 관계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말해주는 듯 합니다. 예수님도 그를 따르는 군중들에게 물고기와 빵을 제공했습니다. 그 음식을 함께 한 군중은 예수님의 은혜를 직업 경험한 사람들로 기록됩니다.

이렇게 식사를 함께 하는 것에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의 의미가 내포되어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친구에게 힐난 받던 제 식사 매너도 이제는 좀 세련되게 변화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봅니다.

저희 회사도 마감을 끝내는 날에는 수고한 모든 직원들과 회식을 가지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합니다. 식사를 함께 나누는 의미에 대한 이런 숙고를 하기 전부터 그것이 관계 강화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얘기 입니다. 이제는 더욱 적극적으로 그런 기회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터넷의 무명시인이 올린 싯귀가 있습니다. 기억나는 대로 적으면,

사랑은 밥 한끼 먹는일
가끔 밥 한끼 먹고 싶은 인연이 있다
보고 싶어서/ 고마워서/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때로는 힘겨운 삶에 위로 받고 싶은 인연이 있다
많이 힘들지/ 물으며/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릴 것 같다. (일부생략)

혹시 누군가와 가까이 하고 싶고, 좀 더 깊이 알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그럼 정성껏 준비한 식탁에 그 사람을 초대하는 것은 어떨까요.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Copy Protected by Chetan's WP-Copyprot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