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February 29,Saturday

비판 그리고 비난

 

최근 미디어를 통해 들려 오는 소식들은 진짜 반가운 것이 하나도 없네요.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갈증이 첨예화되는 듯하여 불안감을 안겨주고, 한국은 베트남 보다도 심한 무더위에 온 국민이 고통 속에 지낸다고 하니 이 역시 반가울 턱이 없습니다. 더구나 한국에서의 여러상황은 너무나 당황스러워 귀를 막게 만듭니다.
지난 주에는 유력한 정치인이 자살을 했다는 보도가 나오는데 과연 자살인지 입막음을 위한 살해인지 알길이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유서까지 남기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신의 생을 정리하겠다는 사람이 시내 복판에 위치한 동생의 집에서 투신을 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됩니다. 만약 그대가 자살을 생각한다면 동생이나 지인이 사는 집에 가서 투신을 해서 그 지인을 당혹하게 만들고 싶겠습니까? 상식이 벗어난 일들이 상식처럼 포장되어 진실인 양 전해집니다.
정말 가끔, 진짜 가끔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소식을 좀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아, 이 소식 참 좋다. 이 좋은 소식을 함께 나누며 이 훈훈함을 함께 할 사람 누구없을까 하며 즐거움과 기쁨을 공유할 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 울화를 부르는 뉴스만 들려오죠. 그런 소식을 들으며 마음에 갈등만 지피다가 결국 한국 TV는 물론이고 인터넷 신문마저 들여다 보지 않습니다. 그래도 허전한 마음을 메우기 위해 페이스 북에서 자신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끼리의 하소연만 보고 들어 왔는데, 최근에는 그 마저도 안합니다. 이유는, 우리끼리, 이념적, 정치적 코드가 맞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나도 모르게 사고의 균형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여 그렇습니다. 세상은 한 가지 의견 만이 전부일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아무도 우리 의견에 비판도 하지 않고 온통 다른 의견을 가진 이를 비난하고 있으니 그 역시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지는 않습니다.

요즘 세상은 온통 비판으로 덮혀 있는 듯합니다.
정권이 바뀐 이후 국민은 둘로 갈라져 서로의 잘못만 지적하고 삽니다. 양보나 배려는 물론이고 용서나 이해조차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정권을 잃은 보수측은 비판을 넘어 비난의 강도를 높이고 있고 이를 보는 정권지지자들은 정권잃은 보수가 대안없는 비판과 비난을 일삼는다고 또 나름대로 비난의 강도를 더욱 높힙니다.
맞습니다. 넘치는 비판, 그러나 대안은 별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안없는 비판, 이것은 사회를 병들게 만들기도 하지요. 그러나 어떤 경우도 비판은 존재해야 합니다.
비판은 잘못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대안을 내라는 것은 또 다른 주제입니다. 공적인 단체나 사회를 운영하는데에는 완벽함이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바로 비판입니다. 물론 대안을 내놓는 비판을 한다면 비판이 상대에게 수긍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안은 비판과 함께 공존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되지만, 대안이 반드시 비판을 위한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비판의 대상이 정치나 사회의 전문 분야의 일이라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분야의 전문가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반면에 비판은 누구나가 가능하죠. 뭐가 원인인지 모르긴 하지만 잘못은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차이로 인해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말이 생겨나는 가 봅니다. 그러나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 할 지라고 비판의 대상자들은 그런 비판마저 귀를 기울이고 존중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바로 그런 대안없는 비판마저 수용하고 개선점을 찾으라고 수장이나 지도자로 모신 것이니까요. 단지 요즘 사회는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특히 정치 분야에서는 비판이 거의 관성적으로 비난으로 받아들여져 비판에 대한 수긍은커녕 그런 비판자를 적으로 인식하고 복수의 칼만 갈아 댑니다. 건전한 정치토론이 존재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비판은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지만 비난은 잘못을 이유로 욕을 하는 것입니다. 목적이 다릅니다. 비난은 욕에 방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은 잘못의 지적 그 자체입니다. 반드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의 지적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말이 한자어에서 비롯되어 좀 난해한 경우가 있는데 비판과 비난도 그런 경우에 속하나 봅니다. ‘비난’은 한자로 쓰면 헐뜯을 비(非)와 나무랄 난(難)인 반면 ‘비판’을 한자로 쓰면 비평할 비(批)와 판단할 판(判)입니다.
기본적으로 두 단어가 같이 사용하는<비>의 의미가 다릅니다. 비난의 비는 헐뜯다는 부정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그러니 이에 대한 확실한 구분을 미리 일러두고 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많은 한국분들이 베트남 직원과 한국인 직원을 두고 사업을 영위합니다. 사업자의 눈에는 직원들의 행동이 마뜩잖은 경우가 많죠. 그런 경우 비판을 합니다. 당연히 사업가로써, 책임자로써 할 수 있는 잘못에 대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방법이 어설픈 경우 비난으로 받아들여져 오히려 반발만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특히 개인적 비판을 많은 이들 앞에서 하는 경우, 비판이 비난 그리고 모욕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특히 공동체 의식이 강한 동양인은 대중 앞에서의 비판은 공동체의 이탈과 같은 소외감을 불러와 잘못을 개선하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되는 상황을 만듭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베트남에 와서 하는 흔한 실수 중에 하나입니다.

흔히들 베트남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대중앞에서, 다른 직원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게 된다면 그 당사자는 다른 직원들과 다른 부류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즉, 자신의 소속에서 제외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죠. 잘못을 수정한다는 것은 뒷전에 남고 내가 남들과는 다른 취급을 받는다는 소외감에 그 지적이 모욕으로 다가옵니다. 결과는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닫습니다. 대가족의 집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환경에서 자란사람일 수록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비판은 없어서는 안되지만 상황에 따른 요령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최근 저희 교민사회에서는 어떠한 비판이나 비난도 다 사라져 버린 듯합니다. 아주 클린한 사회가 된 것일까요? 유감스럽게도 오히려 반대의 상황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뻔한 상황에 대하여 그 누구도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총영사관에서조차 이에 대한 질문 자체를 사양합니다. 혹시 단순한 비판이 비난으로 받아들여져 고소고발의 원인이 될까 두려운 탓입니다.

비판이 때로는 아픈 일이긴 하지만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비판이 없는 사회가 병든사회입니다. 아무도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데 그 잘못이 개선될 리가 없지요.
조용히 병이 깊어가는 호찌민 교민사회입니다.

One comment

  1. Good job!
    In English, ‘binan’ and ‘bipan ‘ are same ‘ criticism ‘.
    Not easy to distinguish it is ‘ binan ‘, that is ‘ bipan ‘.
    In my opinion, when we ‘ bipan ‘ or ‘ binan ‘ somebody, something, the critics has alternatives in most case.
    At least in my c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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