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18,Thursday

누에보 탱고의 창시자, 아스토르 피아졸라

 

• 아르헨티나 이민자들의 춤, ‘탱고(Tango)’
16세기 중엽부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아르헨티나는 19세기 초 유럽의 시민 혁명의 영향으로 비로소 독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19세기말 유럽에서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인 공황을 겪게 된 아르헨티나는 경제 개발 정책을 시작하며 많은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곧바로 ‘이민 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상당수의 유럽 젊은이들이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몰려들게 되었는데, 이 젊은이들은 대부분 유럽의 가난한 농민이거나 도시의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고향에서의 빈곤했던 삶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도시에서 조금 더 풍요로운 삶을 살 것이라는 기대로 들떠 있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경제 위기와 배타적인 사회적 관념으로 인해 이민자로서의 외로움과 좌절감은 커져 갔다. 이들은 삶의 고달픔을 달래고자 함께 음악을 듣고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아르헨티나 ‘탱고’의 시작이다. 즉 ‘탱고’는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외국인 노동자들의 춤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아르헨티나의 탱고가 세계적으로 진출하게 된 계기는 1906년 경 유럽으로 향하는 해군 연습선에 ‘탱고’의 악보가 실려 가면서부터이다. 파리를 기점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탱고는 특유의 리듬과 관능적인 선율로 인해 곧 유럽 여러 도시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고, 이윽고 상류층들이 음악세계로까지 침투하기 시작했다. 즉 하층민인 이민 노동자들의 어두운 이미지를 담고 있던 유흥가의 탱고가 화려하고 도시적인 상류층의 탱고로 확장되는 기회가 된 것이다.
• 불량 청소년 ‘피아졸라’, 열등감의 시작
당시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온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의 외아들 ‘아스토르 피아졸라’.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오른쪽 다리가 뒤틀려 태어난 그가 친구들에게 장애인이라고 따돌림을 받을 것을 걱정한 아버지는 그의 여덟 살 생일날 ‘반도네온(일종의 아코디언으로 탱고에 주로 사용)’이라는 악기를 선물하며 친구삼기를 바랬다.
피아졸라가 아홉 살이 되던 해, 가족은 뉴욕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뉴욕은 마피아가 들끓고 인종 갈등이 심했던 곳으로 유년기의 피아졸라에게 교육적으로 좋지 못한 곳이었다. 피아졸라는 부모의 바램과 달리 학교 폭력에 가담하거나 등교를 거부해 두 번이나 퇴학을 당하는 등 어두운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또한 불량 서클의 친구들과 할렘가의 재즈 클럽을 드나들며 듀크 엘링턴과 같은 재즈 연주자들의 음악을 듣곤 하였다. 반도네온 연주에 능숙했던 그는 바하나 슈만 등의 클래식 음악에 재즈 음악을 접목시켜 연주하길 좋아했다. 비록 불량 청소년이었지만 클래식 음악 듣기를 좋아했고 음악성이 출중했던 피아졸라.
하지만 다분히 ‘크로스오버’적이고 자기 맘대로 이런 저런 악기를 접목시키려는 성향 때문에 당시의 보수적인 클래식음악가들에게 ‘제대로 못 배운 놈’이란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당연했다. 그는 전문적이고 보수적인 방법의 피아노 테크닉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손모양이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런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당대 최고의 탱고 거장 ‘카를로스 가르델’로부터 “넌 어떻게 탱고를 미국놈처럼 연주하냐 ?” 라고 질타를 받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재즈바를 전전하며 귀동냥을 하던 피아졸라의 머리 속엔 이미 다양한 음악 장르인 클래식, 재즈, 탱고가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 제대로 못 배운 놈, 배우기 시작하다.
미국 대공황이 발발하며 가계가 어렵게 되자 피아졸라의 가족들은 아르헨티나로 돌아가게 된다. 그의 부모는 생활비가 비교적 저렴한 아르헨티나에서 아들의 음악교육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다행히 정신을 차린 피아졸라가 처음으로 만난 선생님은 세계적인 아르헨티나 작곡가 ‘알베르토 히나스테라’. ‘제대로 못 배운 놈’이란 꼬리표를 떼려는 듯 그는 기초 화성부터 전문적인 작곡법 등을 열심히 배우게 된다. 피아졸라는 히나스테라와의 체계적인 음악공부를 발판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열린 ‘파비엔세비츠키 청소년 작곡 콩쿠르’에 나가게 된다. 그가 제출한 작품 제15번 ‘부에노스 아이레스 교향곡’은 정통 오케스트라 편성에 추가적으로 반도네온 두 대가 삽입된 것으로 기존 악기 편성에서 상당히 동떨어진 파격적인 설정이었다. 반도네온이란 악기를 클럽이나 캬바레에서 사용하는 악기로만 간주하던 당시의 클래식 청중들은 거세게 비난했고, 몇몇 관중은 ‘쓰레기’라고 폄하하며 난동을 부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곡의 독창성을 인정받은 피아졸라는 ‘파비엔세비츠키상’을 수상하게 되어 프랑스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게 된다. 보수파 클래식의 구태의연한 형식을 깨고 자기만의 혁신적인 스타일을 밀어 부친 피아졸라는 1년 동안 프랑스에서 공부하면서 프랑스의 전설적인 음악 교육자인 ‘나디아 불랑제’를 만날 기회를 얻게 된다.

• 명심해. 너만의 옷을 입어라!
탱고음악을 사랑했던 피아졸라는 그래도 고상한 클래식 음악가라는 소리를 듣길 원했나 보다. 그는 나디아 불랑제를 처음 대면했을 당시 자신이 클럽에서 탱고를 연주한다는 사실을 숨긴 채, 그동안 작곡해 놓았던 클래식 작품들만을 선보였다. 하지만 악보를 모두 살펴본 블랑제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 작곡가들의 모습이 보이는군…그런데 피아졸라의 정신은 어디에 있니?”
“피아니스트가 아니라고 했던가? 그럼 뭘 연주할 수 있니?”
피아졸라는 자신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밤마다 클럽에서 반도네온을 연주했다는 사실을 말하기가 너무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끈질긴 불랑제의 권유에 의해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게 되었고, 피아노로 탱고를 연주하게 되었다. 몇 마디 연주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렇게 소리쳤다.
“이 친구야! 진작 얘기하지! 이게 바로 피아졸라야!”
세계적인 음악 교육자의 이 한마디는 피아졸라로 하여금 그동안 작곡했던 모든 곡을 내버리게 만드는 결정타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피아졸라는 자신이 갈고 닦은 ‘클래식음악’의 바탕에 ‘아르헨티나 탱고’와 ‘재즈’를 입혀 ‘춤을 추기 위한 배경 음악의 탱고’가 아닌, ‘연주회장에서 감상할 수 있는 연주용 탱고’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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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바로 ‘누에보 탱고 (Nuevo Tango)’이다. 즉 ‘새로운 탱고’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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