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November 14,Wednesday

호치민에서 만난 작은 세계 – “프랑스”

프랑스는 베트남에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긴 외세 세력 중 하나다. 중국이 베트남의 전통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면, 근대 사회발전에 영향을 미친 외세세력은 19세기~20세기 중엽까지는 프랑스다. 프랑스는 식민지배기간 통치에 필요한 행정기관, 교통 인프라, 군사 인프라 등을 베트남 전역에 건축했으며, 커피, 와인 등의 프랑스 문화가 도입되어 베트남 문화로 편입됐다.
특히 식문화에 일가견이 있는 프랑스 답게, 베트남에서 프랑스의 흔적은 반미, 퍼, 커피, 카페 같은 주로 식문화의 흔적에서 찾을 수 있고, 베트남 사람들에게도 자랑거리가 된 프랑스식 건축에서도, 이들의 문화적 흔적이 돋보인다.
이번호로 4번째를 맞는 “호찌민에서 만난 작은 세계”는 사이공 곳곳에 숨어 있는 ‘작은 이태원’을 디테일 있게 탐색하는 코너다. 이번호에서는 베트남에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긴 외세 세력 중에 하나인 프랑스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이들은 주로 서양인 구역인 타오디엔에 거주하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프랑스 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은 따로 없으며, 이들은 흩어져 사는 편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흔적은 베트남 곳곳에 있듯이. 사이공 곳곳에 이들의 흔적이 있다. 그러면 문화의 향기를 느껴보러 프랑스에 가볼까? Bienvenue en france dans Saigon!

프랑스 외교부에 의하면 베트남 내 프랑스인 커뮤니티는 2017년 12월 31일부로 7832명이 등록되어 있어, 아시아에서 4번째로 많은 프랑스인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커뮤니티는 1800년대부터 존재했지만, 현재 프랑스인 커뮤니티와 1975년 이전에 존재한 식민시대에 뿌리를 지닌 프랑스인 커뮤니티와는 성격이 다른 커뮤니티다. 현재 프랑스인 커뮤니티 구성원의 대부분은 주재원이다. 2017년 기준으로 베트남에는 약 중소기업까지 포함하여 약 200여개 프랑스계 회사가 진출해 있다. 베트남에 진출한 대표적인 프랑스 회사는 다음과 같다 세계적인 제약회사 샤노피, 아벤티스, 세계적 호텔 업체인 아꼬르, 미디어 회사인 까날 플루, 금융회사인 BNP 빠리바, 에너지 회사인 EDF, 토탈, 중공업회사인 알스톰. 베트남에 진출한 프랑스 회사의 약 75%가 호찌민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8년 현재 베트남 내 프랑스 기업은 약 3만 4천명을 고용하고 있다.

베트남 프랑스인 커뮤니티 역사

초창기, 대항해시대와 포교
베트남과 프랑스는 아주 오래된 인연을 지니고 있다. 1500년경 유럽 대항해시대가 시작되자, 프랑스는 관심을 두지 않다가, 스페인 및 포르투갈의 해외 영향력이 감소하고, 프랑스의 성군인 앙리 4세가 즉위하자 인구분산과, 식민무역 이득, 카톨릭 포교를 명분으로 예수회랑 손을 잡고 동방에 선교사를 파견하기 시작한다. 프랑스는 동방진출의 후발주자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당시 타 서구세력이 진출하지 않은 인도차이나 지역에 진출하게 된다. 이 당시 베트남에 입국한 프랑스인중 한 명이 베트남이 현재 사용하는 베트남 알파벳이자 문자인 “쯔꾸옥응으(Chữ Quốc Ngữ)”의 창시자, 그리고 예수회 선교사이자, 파리 외방전도회를 창시한 알렉산드르 드 로드스(ALEXANDRE DE RHODES) 신부다. 그러나 베트남 내부의 카톨릭 배척, 또한 그리고 당시 항해기술의 한계로 인한 지속적인 교류를 보장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1800년대까지 일부 탐험가, 상인 등의 제한적인 교류만 이루어진다.

전성기, 지원과 침략
이 후 프랑스의 본격적인 베트남 진출은 프랑스 혁명 바로 직전부터 시도된다. 이 당시 떠이선 왕조의 등장으로 인해, 시암(지금의 태국)에 망명한 응우옌 가문의 후계자 응우옌푹아인 (Nguyễn Phúc Ánh / 阮福暎)은 시암에 주재한 피에르 피뇨 드 베엔(Pierre Pigneau de Behaine)주교와 만나 친분을 쌓아 프랑스와 협정을 맺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한다. 그 후 응우옌푹아인은 드 베엔 주교의 안내로 1787년 프랑스에 도착하여 루이 16세를 알현하고, 베르사유에서 응우옌 왕조와 프랑스의 공수 동맹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프랑스 국왕이 군대를 베트남에 파견하여 집권을 도와주면, 베트남은 다낭과, 꼰다오섬 영유권 및 주권을 양도하고, 베트남 전역의 상업권을 프랑스가 독점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조약이 체결된 후 프랑스의 인도식민지를 통해 용병을 조달 받아, 1789년에 드디어 베트남 침공을 감행하고, 12년 동안의 전쟁 끝에 떠이선 왕조를 멸하고, 응우옌 왕조를 창건한다. 바로 이때부터 협정에 따라 프랑스의 대규도 진출이 본격화된다.

그후의 정치적 상황에 의하여 1840년대까지 프랑스의 진출은 지지부진 했지만, 1600년도 초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은 프랑스인들이 다낭, 및 지아딘(사이공)을 중심으로 유입된다 그러나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열강의 아시아 침략이 본격화되고, 프랑스 내정이 안정되어 2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된다. 특히 영국이 아편전쟁을 통해 보여준 강제 개항 방식을 모방하면서, 베트남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으며, 1847년 다낭항 무력시위를 시작으로 이 후 10여년간 베트남에 압력을 가한다, 태생 상 프랑스의 지원으로 탄생한 응우옌왕조는 저항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제1차 사이공 조약(1862년 6월 5일)이 맺어졌다. 조약에 따라 다낭 외 3개 항구가 개항되었고, 꼰다오 섬 및 코친차이나의 동부 3성(省) 이 프랑스에 할양됐다. 또한 프랑스인에게 베트남 전역의 기독교 포교의 자유, 메콩 강의 항행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하였다. 바로 이 조약 이후, 베트남의 식민화가 결정되면서 프랑스 군인, 관리, 상인, 선교사들이 대거로 베트남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당시부터 식민통치가 사실상 끝나는 1940년대까지 베트남에 거주한 프랑스인의 규모가 최대 5만명정도로 추정되며, 이 중 군인은 2만명, 그 외 관리 및 상인, 선교사, 가족인원까지 합칠 경우 최대 5만명 정도가 베트남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쇠퇴기, 전쟁과 독립, 그리고 혼란: 1945년 이후, 지속된 전란 및 혼란으로 인해, 하노이 및 하이퐁을 중심으로 거주하던 프랑스 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외국인에게 조금 더 호의적이며, 사유재산을 인정한 남부로 내려왔다.
1960년대 프랑스 정부 조사에 의하면 남베트남에는 사이공을 중심으로 약 1만 7천명 정도의 프랑스 시민권자가 베트남에 거주 중인 걸로 조사됐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면서 사이공을 제외하면 지방에서는 안정적인 경제활동이 어려워지고, 아울러 베트남의 불어 사용인구가 줄어들면서 1970년대 경에는 대부분 본국으로 귀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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