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November 14,Wednesday

시작에 더하는 기대

 

우리에게 집착할 어떤 것도 없으니 자유롭고,
그러기에 쉽게 이 땅의 사람들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또 같은 이유로 그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앞일이라는 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살아가는 길목마다 ‘우연’이 도사리고 앉아 기다리는 탓이다. 우연은 여러 가지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때로는 비나 바람과 같은 자연의 현상으로, 때로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도 나타나는데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우연의 족적이 곳곳에 찍혀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우연이 만들어가는 일을 가리켜 나같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해 확신하는 사람들은 섭리라고 부르는데 어쨌거나 해석이 어렵고 신비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우연이 개인의 삶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방식 중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면서도 영향력이 큰 것이 ‘만남’이다. 실제로 많은 일의 시작이 우연처럼 이루어진 만남으로부터 비롯된다. 내가 베트남에 오게 된 계기도 이십오 년 전 프로젝트를 통해 관계를 맺게 된 사람과의 만남이 시작이었다면, 지금 베트남 현지법인에서 일하게 된 일도 오랜 지기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말미암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인생은 만나왔고 만나가는 사람들의 관계가 만들어 낸 조밀하게 엮인 캔버스 위에 그려진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만남에는 선물이라 여겨질 만큼 좋은 만남도 있고 악한 인연이라 할 만큼 나쁜 만남도 있다. 그러니 지금 만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또 그 속에서 나눈 이야기들이 어떤 것이지에 대해 민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씬짜오베트남과 나와의 만남도 그런 우연성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우연이 만남의 기회를 만들었고 만남의 결과가 다른 기회를 만들어 이 글을 쓰기까지 이르렀으니 말이다. 덜컥 글쓰기를 수락해 놓고 도망칠 길이 없는지 궁리하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늘어놓는 궁색한 변명이다.

나는 이방인이라고 말하기를 즐겨한다. 몽선생(夢先生)이라는 필명이 꿈꾸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것처럼 대화를 나눔에 현실성도 떨어지고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사교적이지 못하다. 그런 사람이 자기 터전을 떠나와 베트남 호찌민이라는 낯선 땅에서 생활을 하고 있으니 말이 씨가 되듯 제대로 이방인이 되어 버린 셈이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나는 이방인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런데 최근 종영한 드라마를 보고 문득 용어를 바꾸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유진 초이(이병헌 분)라는 인물로 인해서이다. 주인공의 한 사람인 그는 스스로를 가리켜 나처럼 이방인이라고 부른다. 그는 조선인이면서 조선에서 버림받았고, 미국인이면서 미국 사람이 될 수 없었던 경계의 사람이었다. 그가 처한 상황의 절실함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견주어 보면 나 같은 이는 이방인이라 일컫기가 쑥스러워진다. 그럼 무어라 부르는 게 옳을까? 그래서 찾은 단어가 ‘나그네’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각자의 처지가 어떻든지 간에 나그네이다. 이 십년 전에 온 사람은 지난 이 십 년간 나그네였고, 이제 막 공항에 도착한 사람은 지금부터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그네는 나그네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나그네는 머무는 땅에 지분이 없다. 내 땅이 아니기에 그러하다. 그렇다고 안타까워하지 말자. 우리에게 집착할 어떤 것도 없으니 자유롭고, 그러기에 쉽게 이 땅의 사람들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또 같은 이유로 그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밝혔듯이 나는 한국에 있는 설계 전문기업의 현지법인에서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법인을 세우고 난 후 짧지 않은 이곳의 생활에서 가장 큰 관심을 두었던 것은 어떻게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한 곳을 바라보며 더불어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급여를 많이 주는 것도, 다른 회사보다 좋은 업무환경을 제공하는 것도 지나 보니 미봉책에 불과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배운 것은 그들과 내가 너는 베트남인, 나는 한국인으로 구분되거나, 너는 현지 직원, 나는 주재원으로 구별될 수 없고 단지 같은 목표를 위해 동반자로 걸어가는 ‘우리’라는 인식을 공유할 때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본질적으로 ‘우리’라는 단어에는 ‘함께’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우리라는 단어로 묶인 사람들이 함께 도전하고, 이루고, 나누어야 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거기에 민족의 차이를 거론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런 구별은 쉽사리 차별로 변질되는 속성이 있기 마련이다. 7군의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강남, 강북으로 지역을 구별해 자기끼리 짝하여 우리 동네 운운하는 것은 우리라는 말의 의미를 차별로 변질시킨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나그네라는 인식은 크게 도움이 된다. 주인도 아니면서 임시로 주어진 것을 자기 소유인 듯 자랑하며 다른 이들을 차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임대자끼리 네 집이 크네 내 집이 크네 목소리 높여 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나그네임을 직시한다면 오히려 나그네이기에 같은 나그네 삶의 힘듦을 이해하여 격려할 수 있고, 또 나그네이기 때문에 주인의 것을 존중하는 미덕을 보여주기에 수월하다. 그것이 나그네의 미덕이다. 내가 주인이 아니므로 주인 된 이 땅의 사람들을 통하지 않고는 이룰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될 때야 말로 서로 다른 민족이 모여 ‘우리’가 될 수 있는 출발선이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베트남의 우리 회사와 7군의 어느 동네 얘기이기만 할까?
한국에서 들려오는 모든 갑갑한 소식들은 대부분 우리가 함께 사는데 익숙하지 못해 생기는 일이다. 나 역시 우리라는 단어를 수시로 쓰지만 나와 맞상대한, 생각이 다른 당신도 우리라는 것을 한국에서는 생각해 본 일이 별로 없다. 지금까지 우리라는 표현을 쓴 것은 내 편과 네 편을 구별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 더 솔직한 말이리라. 그래서 ‘우리끼리’ 라는 패거리 의식은 있었어도 ‘우리 함께’라는 공동체 의식은 갖지 못했던 것이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그런데 베트남에 와서 타민족과 더불어 살면서 우리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찾아 나가고 있으니 사람의 일은 정말 알 수가 없다.

씬짜오베트남의 제안을 수락했던 날까지 생겼던 소소한 일들은 몇 가지 우연이 겹친 결과이다. 잠시 돌이켜 이 일이 왜 생겼을까 자문하다가 문득 기대가 하나 생겼다.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우리’로 사는 방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에의 기대이다. 이 우연이 만든 만남이 나그네로 살면서도 번번이 정체를 잊고 남의 땅에서 주인처럼 행세하는 나를 돌아보게 하고, 그저 급여를 주고 일을 시킨 듯한 이 사람들이 실상은 나를 도와서 목표하는 바를 더불어 이루어가는 동료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기회가 될 수 있다면, 이러한 내가 경험하고 익힌 작은 지식과 깨달음도 나눌 만한 것이 되리라는 터무니없는 꿈을 품는다. 그렇다면 이 일은 나그네로서 살아가는 피차 간에 귀한 만남이 될 뿐 아니라, 내 인생길에 주어진 좋은 선물이 되지 않겠는가. / 夢先生

박지훈
건축가,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 정림건축 베트남 법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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