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December 18,Tuesday

시간이라는 이름의 적

 

호찌민시에서 생활한 것이 십 년을 넘어가면서 그간 틈틈이 써 둔 원고를 모아 지난 8월 ‘몽선생의 서공잡기(西貢雜記)’ 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출판을 하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선뜻 초보 작가의 글을 출간해 주겠다는 출판사가 있어 이루어진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뜻하지 않게 감사할 일이 더 생겼다. 원래 게을러 만사를 귀찮아하는 성미여서 책의 발간에 대해 알린 분이 극히 적었는데 한영민 회장님께서 서평을 써 주시면서 의도하지 않게 많은 분들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서평이 씬짜오베트남에 실린 이후 책을 구매할 수 있느냐는 분들의 문의가 늘어갔다. 갑자기 고민이 생겼다. 책이 한국에서 출판된 것이라 한국의 서점이나 인터넷 쇼핑으로만 도서를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거기까지 감수한다 해도 해외배송이라는 걸림돌이 있으니 어쨌거나 베트남에서 구매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고민 끝에 출판사에 연락하여 일정 분량의 책을 구입하여 호찌민으로 배송하는 것으로 하였다. 원하는 분들께 직접 전달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항공우편물 세관에서 책을 잡은 것이다. 동일한 책이 다수 들어오고 내용 중에 베트남 역사와 호찌민 주석에 대한 언급이 있어 확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관계당국에서는 베트남에서의 정론과는 다른 역사의 인식이나 그에 관련한 기술, 호찌민 주석에 대한 바르지 못한 평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우려하였다.
물론 서공잡기는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과 사회에 대한 긍정적이고 따뜻한 시각을 배경으로 써졌다. 또 외국인들이 어떻게 나그네로써 자기 정체를 인식하고 베트남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이다. 그래서 내용상 문제가 없음을 자신하던 차였다. 혹시나 하여 모 베트남대학 한국학과 교수께 검토도 받은 터였다. 그런데 세관에서도 무조건 책을 돌려보내라 거나 문제가 있으니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책의 내용에 따라 혹여 발생할 수 있는 불미스러운 일의 가능성에 대해 전달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서로 간에 입장의 차이만 다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관계기관을 통해 책의 검수를 요청해 보는 것도 생각해 볼만한 일이었다. 일부 문제가 있다면 이번 기회에 내용을 조정할 수도 있고 만일 아무 하자가 없다면 베트남 당국에서도 인정받는 셈이니까 손해 볼 일은 없다는 논리였다. 다만 벌금 정도의 불이익은 감수할 작정을 하였다. 세관 담당자는 서로 간에 어려운 일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 책을 회송하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하였다. 이전에 있었던 사례에 대하여도 설명을 해주었다. 하지만 이미 결심을 한 나는 담당자에게 회송 대신 검수를 요청했다.
“한국어로 써진 책이고 저희도 인력의 한계가 있으니 내용의 검수에 2, 3개월 소요될 수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릴 게요.”
아뿔싸….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대응 방식도 모색해 보면서 시간을 보냈고 담대한 마음으로 마음을 굳히고 연락을 했는데 담당자의 그 한마디에 상황이 종료되었다. 2, 3개월이라?

시간은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며 일을 하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그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그리고 시간 자체가 우리의 적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아무리 자본과 지식과 기술의 무기로 무장하고 있어도 ‘기다리세요’라는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 이런 책 한 권을 받는 데도 그러한데 큰 사업이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투자자에게, 사업자에게 시간은 중요하다. 산업시설에 투자하는 한국의 진출사들이 건설허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땅을 어떻게 든 먼저 파려고 하는 이유도 시간 때문이다. 개발 사업에 투자하는 회사들이 사업 계획을 세울 때 민감하게 여기는 것도 시간이다. 사업의 성공 여부가 타이밍에 달려 있다면 당연히 시간의 문제이고, 시간의 지연 때문에 투자금에 대한 금융비용을 감당할 여유가 없을 때, 본사를 설득할 시간의 여유가 없을 때에도 역시 아쉬운 것은 시간이다. 현지화된 회사를 목표로 하여도 직원들을 교육하고 비전을 공유하는 데에는 시간이 들어간다. 문제는 남의 땅에서는 이런 시간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시간의 문제는 모두 비용이 되어 우리를 압박한다. 그런데 시간은 이런 우리의 애환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갈 길로만 또박또박 걸음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고 지나간다.
그런데 이런 냉정하고 매정해 보이는 시간을 곁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를 상대하고 있는 베트남 사람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시간을 기다린다. 시간을 늘리기도 한다. 당하는 이에게는 답답해 속이 터질 일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이 가진 것의 가치가 늘어간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안다. 그러므로 투자와 거래와 경쟁은 결국 시간이라는 제3의 적을 하나 더 상대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들 편에 서있는 시간을 내 편으로 둘 수 있다면 이 땅에서의 경쟁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그러니 다른 이의 땅에서 일을 할 때, 시간이라는 상대를 어떻게 다룰지 고려해야 하는 것이 지혜이다. 이국에서의 삶이란 급하면 실패하기 쉽다. 그러므로 시간을 내 편으로 취할 수 없다면 차라리 시간이 개입되는 상황을 회피하는 것도 방법이다.

책의 경우로 돌아 가자. 2, 3개월을 검수 때문에 세관에 묶어 두는 것은 내게 손실이다. 차라리 인편으로 몇 권 들여오는 것이 낫다. 이 곳에서 도서 판매업을 하겠다는 의도도 아니고 책을 판매해 이윤을 볼 일도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결과가 좋지 못해 당국에 트집이라도 잡힌다면 더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자칫 이 곳에서 사업을 지속하는데도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걱정도 내심 들었다. 작은 일을 고집하다 집 전체를 태우는 우를 범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시간을 적으로 만들지 않을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것은 책임자를 직접 만나자고 요청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사된다면 들어보고자 하는 자세가 그들에게 있는 것이므로 적극적으로 해명하여 문제를 풀고 그것이 어렵다면 책의 검수 이전에 회송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럼 항공 세관과의 협의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책임자는 직접 면담에 대한 요청을 선뜻 받아들였다. 덕분에 베트남 와서 처음으로 항공 세관을 방문하게 되었고 비록 직원을 통해서지만 책의 내용에 대해 설명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질의의 과정을 거친 세관 당국자는 뜻밖의 호의를 보여주었고 결과적으로 모든 책을 통과시켜 주었다. 책의 통과에 대한 어떤 벌금이나 서류의 작성도 없이 말이다. 잔뜩 긴장했던 내게 조금은 의외의 결론이었다. 향후 주의할 부분들에 대해 담당자에게 들어야 했던 것은 이 과정의 마땅하고도 유일하게 치른 대가였다. / 夢先生

 


 

박지훈
건축가,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 정림건축 베트남 법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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