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April 19,Friday

대우 킴으로 불린 인물, 김주성 회장

[ 한주필이 만난사람 ]

베트남이 바꾼 운명을 놓지못하고 26년이 넘도록 베트남과 살아가는 한영민 주필. 그는 글쟁이라는 소리를 은근히 즐긴다. 20여년 호구책으로 사용한 무역쟁이보다는 어감이 좋은 탓이란다. 젊은 칼럼 리스트들이 그의 나이를 조심스레 묻고는 혀를 내민다. 글의 나이와 신체의 나이가 차이가 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는 둥 …. 그 철없이 젊은 글쟁이가 이제 사람을 만나러 나선다. 교민들이 만나고 싶은 인물을 찾아 그들의 호기심을 풀어내는 데는 한주필의 베트남 경력이 한 몫을 하리라는 기대로 이 코너를 마련했다. 독자들의 추천은 인물 선정의 우선 고려 사항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기대한다.

하노이 교민사회의 시조, 한국기업 베트남 진출의 선구자

대우 킴으로 불린 인물, 김주성회장

하노이 진출을 결정하고 자연스럽게 교민사회의 원로 분들을 찾아 나섰다. 연세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곳에서 가장 오랫동안 생활하신 분을 찾았다.
그분들 중의 한 분이 바로 김주성 회장이다.
그는 수교 전부터 김우중 대우 그룹 회장의 베트남 진출의 구상을 맨 앞에서 진두지휘하며 대우의 베트남 진출을 이끈 인물이다. 1990년도 김우중 회장의 명으로 대우그룹의 베트남 진출의 타당성을 검토한 후, 베트남과 한국의 수교 전인 1991년 2월 캐나다 법인장에서 베트남 법인장으로 옮겨 베트남에 입성한 하노이 교민사회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분이다.
그는 실제로 그 후 30년 가까이 하노이에서 지내면서 대우의 베트남 사업을 총 지휘하며 한인기업들의 베트남 진출의 길을 열어 주었고, 동시에 하노이 한인사회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하노이에 새롭게 진출하는 본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할 분이고 또 그와 면담을 통해 하노이 교민사회의 초기 시절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면담신청을 넣었다.

그를 찾아 새롭게 본지의 하노이 업무를 맡은 이기훈 실장과 함께 한국인 사업체만 몰려 있는 참빛빌딩 15층을 찾았다. 김주성 회장은 지금도 대우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참빛빌딩은 올 때 마다 느끼는 점인데 참 엘레베이터 사용이 불편하다. 평시에는 그런데로 감수할 만 하지만 점심시간에 겹치면 그야말로 전쟁이다. 상주인원에 맞는 엘리베이터를 마련하지 않은 것인지, 정원보다 많은 인원이 상주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한인회와 영사관이 있는 탓에 비자 관련 베트남인의 출입이 많아서 그런 모양이다 라고 또 한수 접어둘 이유를 찾아낸다.

아무튼 대우 투자 컨설팅사 라는 이름이 붙은 사무실에 들어서자 바로 옆문이 김회장의 직무실이다. 그의 화려한 경력에 비해 그의 사무실은 기대보다 크지 않았다. 책상과 책장 그리고 6~8인용 정도로 보이는 회의 테이블과 그 주변을 꽉 채운 서류들. 여유롭다고는 볼 수 없는 환경의 직무실에서 타원형 테이블을 마주하고 인사를 시작했다.

“내가 뭐 할말이 있나, 이제 난 일선에서 은퇴한 마당에 조용히 지내고 있는데…” 하며 오랜만에 마주한 인터뷰가 좀 생소한 듯한 모습으로 다가선다.
“본지의 소개와 하노이 한인사회의 뿌리를 찾아 왔습니다.”하자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일이라면 내가 할 말이 있기는 하겠지.” 하며 미소를 되찾는다.

그의 나이는 1940년 생으로 올해 80세이다. 연세답지 않게 곧은 자세로 자리를 잡고, 편한 미소를 던지는 그의 모습에서 오래동안 대기업의 최고임원으로 지낸 그의 관록이 묻어나온다.

베트남 개방 초기의 열악함을 그대로 감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91년 김회장이 베트남을 처음 찾을 때로 돌아간 다음 다시 내려온다. 이미 익숙한 계단인 양 과거의 베트남에 대한 얘기가 시간 별로 풀려나온다. 처음 이야기는 당시 베트남의 열악한 환경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루었다. 필자 역시 1993년 처음 베트남은 찾은 처지라 공감하는 것이 많다.
단, 필자가 있던 호찌민과 하노이는 그 거리 만큼이나 다른 듯했다. 어찌보면 하노이가 훨씬 열악한 상황이었다. 팩스를 보낼 때나 받을 때 한 장당 1불씩 받았다는 하노이, 그러나 당시 호찌민은 팩스 한 장 보내는데 6불, 받는데 1불이었다. 호찌민이 훨씬 비쌌다.
하지만 숙소의 열악함은 호찌민보다 더한 듯하다. 그래도 일급호텔에 머무르신 분이니 실제 호찌민의 일반 교민들이 생활하던 곳과는 그 또한 천양지차다. 이렇게 엘리트 코스를 걸은 분들의 말씀을 들으면 그 비교치가 다르다. 하긴 캐나다에서 오신 분이니 당시 베트남의 열악함이 더욱 심각해 보이긴 했으리라.

대우가 베트남에 진출하게 된 계기는 1991년 당시 베트남 정부의 MPI장관을 지내다 나중에 수상에 오른 판반카이 장관이 한국을 방문할 당시 대우 김우중 씨를 잠시 면담하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김우중씨에게 베트남을 방문해 달라고 초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왜 대우는 베트남에 투자를 했는가?

대우 김우중 회장이 한국에서 은퇴후 왜 베트남에 있는가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궁금했었다.
그 보다 먼저, 왜 대우가 베트남에 투자를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단지 베트남 장관이 초대했다는 이유가 전부는 아닐테고 뭔가 각별한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질문에 대하여 답은 아니지만 김우중 회장이 처음 외국에 나간 것이 1968년 경 베트남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처음 맺은 외국의 인연이 베트남이라는 것은 그런대로 접수할 만한 이유이긴 하다. 아마도 전쟁 중에 사이공을 찾은 모양인데 그것이 김우중 회장의 첫번째 외국 여행이었다는 것을 알고 보니 그도 역시 우리와 별로 다를 바 없는 과정을 겪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일까? 아마도 첫 해외여행이 유럽이 아니라 베트남이었기 때문인가?
마음 속에 담긴 천박함이 이렇게 드러난다.
김우중 회장은 개인적으로 필자에게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대학시절 그의 성공스토리는 돈 없고 백 없는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었다. 필자 역시 그 꿈을 좇아 대학시절 전공 공부는 제쳐두고 오파상으로 세계를 누비는 꿈을 키워왔고 실제로 대학 졸업 후 20년 넘게 오파상을 하며 세계 50여개국을 누볐다. 그리고 지금은 직업을 바꿔 베트남에서 글쟁이 노릇을 하고있다. 인생의 행로는 정말 미로다.
아무튼, 김우중 회장이 처음 방문한 곳이 베트남이라 이곳에 애착이 생겨 투자를 했는가 생각했는데, 김우중 회장은 단지, 후진국에 사업 거리가 많다는 사업적 목적이라는 이유 한가지로 이곳에 진출했다는 것이다. 베트남은 뭔가 우리와 각별한 관계가 있는 것 같고 그래서 한국인들이 이곳을 찾는다는 순진한 사고를 해오던 필자에게는 참으로 건조한 느낌의 이유다.
김우중 회장을 직접 면담하여 그가 왜 노후를 이곳에서 보내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현재 병치료로 한국에 들어가 있어 면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시 김주성 회장의 얘기로 돌아가자.
김주성 회장이 그런 낮설고 열악한 하노이에 들어와 제일 먼저 한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대우 일이 아니라 당시 제일은행의 부탁을 받고 Vietcomm Bank와의 합작 라이센스를 받은 것이다. 그 결과로 베트남에 최초의 한국계 은행인 FirstVina뱅크가 생긴다. 지금의 신한베트남은행의 전신이라고 보면 된다. 그 제일비나가 조흥비나, 신한비나를 거쳐 결국 신한베트남은행으로 통합되는데 그 시추돌을 올려 놓으신 분이 바로 김주성 회장이라는 얘기다. 신동민 현 신한베트남은행장은 이런 얘기를 알고 계신가 모르겠다.

대우의 첫번째 베트남 투자는 대우호텔이다. 대우가 베트남에 제일 먼저 투자한 것이 3차 서비스업인 호텔이었다는 것이 김우중 회장의 사업적 성향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는 먼저 대우 호텔 부지를 선정한 얘기를 들려준다. 김우중 회장이 베트남 방문시 정해 준 5군데의 후보지는 현지인 보상 문제로 난항이 예상되어 임의로 다른 곳을 잡고 서울에 가서 김우중 회장을 만나 보고를 하는데 김우중 회장은 아마도 자신이 지정한 부지와 다른 것에 대하여 의아해하며, 왜 그 자리인가? 물었다. 그때 김주성 회장이 김우중 회장의 그 질문에 답한 이유가 흥미롭다. 김주성 회장은 그 부지를 선정한 이유로 5가지를 들었다.

  1. 신공항가는 길목이다.
  2. 하노이 도시의 발전 방향이다.
  3. 땅 값이 저렴하다.
  4. 늪지대라 현지인이 살지 않아 보상비가 없다.
  5. 호수 주변이라 경관이 좋다.

호텔이 어떤 사업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언젠가 이건희 삼성그룹 총수가 신라 호텔 총 사장에게 호텔 사업이 어떤 사업에 속하는가 하고 물었다. 호텔 사장은 당연히, “서비스 업입니다.” 하자 이건희 회장은 고개를 가로 저었고, 다시 정치산업이라고 하자 이회장은 더 알아보라고 하고 돌아가니 신라호텔 사장은 진땀을 흘릴 수 밖에. 호텔경영을 책임지는 자신이 호텔 사업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오너와 다르니 이를 어찌하는가, 낭패에 빠진다.결국 그 사장은 두 달 여의 고민 끝에 일본 출장을 다녀와서야 이회장이 원하는 답, 호텔사업은 ‘부동산 사업’ 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김주성 회장의 생각도 그러한지 잘 모르지만 적어도 김주성 회장이 김우중 그룹 총수에게 보고한 5가지 조건은 부동산 투자를 필요한 요소와 같다고 봐도 될 듯하다. 그렇게 한국의 대표주자 대우그룹이 대우호텔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하노이에 자리를 잡는다.
한국과 베트남의 초기관계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김주성 회장의 행적은 한국과 베트남의 초기 관계 정립의 역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최초의 한국계 은행의 베트남 진출을 성사 시켰고 하노이시와 서울시의 자매 결연에도 관여를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1995년, 도 므어이 당서기장의 한국 방문시 베트남 정부의 요청에 따라 그의 전용기에 함께 합승하여 그의 옆자리에 앉아 한국에 대한 여러 조언을 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당 서기장이 다니는 모든 행사에 동참하는 조언자 역할을 해냈다.
그런 인연으로 김주성 회장은 하노이 정.관계에서는 ‘대우킴’으로 불리게 되었고, 당서기장도 대우가 진행하는 각종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지게 되니 자연스럽게 프로젝트 진행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베트남와 한국의 관계 정립에 김회장의 입김이 알게 모르게 많이 작용한 것으로 생각할 수있다.

그는 베트남에서 1991년부터 1999년까지 무려 30여개의 굵직한 투자 프로젝트를 진행시켰다. 그가 이렇게 많은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서기장을 포함하여 하노이 고위관리들과의 인맥이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우호텔사장으로 근무하면서 1996년 김영삼 대통령, 1998년 김대중 대통령,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의 방문을 맞았을 뿐만 아니라 아세안 회의가 열릴 때 세계 각국의 최고 지도자들을 모시는 영광을 누렸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 방문시 한국 전용 산업 공단과 한국 문화원 개설을 요청하여 한국문화원이 베트남에 건립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우 투자 컨설팅 사 설립

그리고 1999년 은퇴를 하고 대우 투자 컨설팅사라는 이름으로 개인사업장을 오픈하여 지금까지 베트남을 지키며 베트남을 찾는 한국투자자를 위한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베트남은 참으로 묘한 곳이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쉽게 돌아서지 못한다.
김주성 회장은 1991년에 베트남에 들어와 2019년 지금까지 근 30년을 베트남에서 자신의 황금시기를 보냈다. 웬만하면 지겨울 만도 한데 아직도 매일 사무실을 나와 손님을 맞는다. 인터뷰 시간 대부분을 그의 과거 얘기로 채워졌다. 그 얘기를 통해 한국과 베트남 관계의 역사를 엿보기는 했지만 그의 개인적 사고는 잘 모르겠다. 해서 물었다.

진정한 성공이란 ?

우리 젊은이들에게 들려줄 얘기, 특히 베트남에 진출하는 젊은이를 위한 조언은 무엇인가?

“최첨단 산업과 전통 문화가 함께 공존하는 이 곳 베트남에 우리 젊은이들이 진출하는 것을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며 그는 운을 뗀다.

“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가진 우리 젊은이들에게 축하를 보낸다. 이제는 좁은 한국에서 나와 세계로 그대들의 기개를 맘컷 펼쳐라. 그러나 두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우선, 이런 꿈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조상들, 특히 우리나라의 경제개발을 이끌어, 이곳 베트남의 위정자들도 한결같이 배우기를 원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우리 과거 지도자에 대한 감사가 첫번째요, 두 번째는 이곳에 베트남에 와서 혹시 물질적인 풍요가 우리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이들을 얕보거나 이들의 문화를 경시하는 태도에 대한 경계가 그것이다. 젊은이들이 꿈에도 바라는 성공이란 물질적인 풍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성공이란 말 그대로, 세운 뜻을 이루는 것이다.

진정한 성공이란, 각자 개인적인 철학에 의하여 자신이 가치있다고 여기는 삶의 비전, 목표를 세우고 스스로 정진하여 달성하는 것이 그것이나, 그 일은 반드시 이웃과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미쳐 사회를 발전시키고, 그 발전된 사회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들어 창업의 위험을 피하고 가장 안전한 직업인 공무원을 꿈으로 안고 사는 젊은 이들이 많아진다는데, 이것은 약진하는 한국의 위상과는 전혀 방향이 다른 것이고 우리의 성장 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심히 우려되는 사항이다. 물론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위정자들이 젊은이들에게 꿈을 실어주지 못하는 것이 한가지 원인이긴 하지만, 우리 역사를 볼때 박정희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언제 우리가 정부의 도움으로 꿈을 키운 적이 있었던가, 이제 우리 스스로 이런 가능성이 넘치는 곳에 나와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꿈을 개척하기를 기대한다.”
그의 간곡한 마음이 담긴 멘트를 끝으로 약 두 시간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필자의 마음이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이렇게 올곧은 꿈을 안고 살아온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실로 감사할 일이나, 과연 그가 이루기를 원하는 그 꿈이 우리 젊은이에게도 전수 될 수 있을 지 의구심이 일기 때문이다.
과거로 시작하여 밝은 성공의 이야기를 담아주던 인터뷰가 현실로 돌아오니 우울함이 덕지덕지 줄을 이어 붙어 나온다. 우리의 꿈과 시대적 현실의 차이를 어떻게 좁혀야 하는지 모두 함께 고민을 해야 할 때지만 아직도 국민의 관심사와는 무관한 일로 에너지를 소진하는 고국의 현실이 마음을 무겁게 누른 탓이다.

아, 이놈의 하노이 하늘은 언제나 햇볕을 보여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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