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September 22,Wednesday

[컬럼]3.1 운동 100주년 특집 –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3.1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영향

구한말, 조선을 병합하려는 일본의 집념이 대단했습니다. 일본은 1867년 메이지 유신 후 줄기차게 조선 침략에 주력했고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전쟁도 불사하며 조선을 탐냈습니다. 1904년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 후 최종적으로 미국과 카쓰라 테프트 밀약을 맺고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 행사할 권한이 있다고 합의했습니다. 이제 조선을 보호할 국가는 사라지고 일본은 을사늑약(乙巳勒約 / 을사조약), 군대해산, 한일합병 등 순서대로 조선을 먹어 갑니다.
한편 조선 내부에서도 눈치 빠른 친일파가 양성되어 서로 충성 경쟁을 합니다. 일진회는 송병준, 이용구를 중심으로 한일합병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이완용은 소설가 이인직을 비서로 채용하여 한일 합병서를 만들게 합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최초의 신소설 “혈의누” 작가라고 배웠던 그 이인직은 우리민족의 치욕의 문서 한일합병서를 만들었죠.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께가 서명한 한일 합병서는 1910년 8월 29일 공표되고 대한제국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한일병탄 후 14만명 애국지사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활동합니다. 그중에 온 가족이 독립운동가였던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
이회영 선생은 백사 이항복의 11대 손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넷째 아들입니다. 한일 합병서가 공표되자 우당 선생의 여섯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여 나라를 위해 모든 재산과 목숨을 받칠 것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여섯 형제의 재산을 전부 처분하는데 당시 쌀값 기준으로 환산하면 현재 가치가 600억원 정도이고, 땅값을 기준으로 할 경우 현재 가치는 2조가 넘는다고 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것도 일제의 수사망에 포착될까 급하게 처분 하느라 제값을 받지도 못했고, 게다가 시간이 없어서 처분하지 못한 재산도 많았다고 하니 이회영 선생 형제들의 재산이 엄청났던 것을 알 수 있었데요.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탐관오리도 아닌 애국지사들인 이회영 선생 형제들의 재산이 어떻게 많을 수 있을까요 ?
이회영 선생의 큰형인 이석영은 어릴적부터 아들이 없는 큰아버지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이유원은 영의정을 지냈고,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관습은 친딸이 아닌 양자에게 재산을 상속하였므로 이회영의 큰형인 이석영은 양부 이유원 재산 대부분을 상속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회영 선생은 큰형 이석영을 집중적으로 설득했고, 이석영의 승낙으로 이회영 선생은 거금의 군자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유원의 재산 형성 과정을 알아볼까요?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틈 바구니 속에서 이유원은 뛰어난 처세술로 소론 출신이지만 비교적 순탄하게 출세를 합니다. 이유원이 함경도 관찰사(평양감사) 재직시 화폐 제조의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화폐 제조가 완성될 즈음에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즉위하여 대원군의 섭정이 시작됩니다. 눈치 빠른 이유원은 안동김씨 세도의 핵심 김좌근에게 보낼 50만냥을 (현재가치 300억원 정도) 대원군에게 보내고 곧 좌의정으로 승진합니다. 그러나 이후 이유원은 대원군의 견제를 받아 수원 유수로 좌천이 되었고, 대원군 실각 후 민씨 세력에 붙은 이유원은 영의정으로 승진합니다. 당시의 부정부패 행태를 고려하면, 이유원은 상당한 치부를 했다고 추정되고 그 재산은 고스란히 이회영의 큰형이자 이유원의 양자, 이석영에게 넘어 갔을 것입니다.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간도로 간 이회영 선생은 삼원보에 땅을 산 후 이동녕등 독립 지사들과 힘을 합쳐 신흥학교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독립투사를 양성 합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 선생도 신흥학교 출신입니다. 삼일운동을 계기로 신흥학교는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는 신흥무관 학교로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100여년 전 수 많은 애국자들이 활동했고, 그 힘이 전국민에 번져 일어났던 사건이 삼일운동입니다.
1919년 1월, 삼일운동의 기폭제가 되는 윌슨 대통령의 ” 민족자결주의 ” 가 선언됩니다. 민족자결주의 선언은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 터키, 오스트리아 등의 식민지들을 독립시키기 위한 선언이지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는 해당 사항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식민지배를 받는 나라들에게 복음으로 들려온 민족자결은 우리 민족을 크게 자극했습니다. 또한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승하 했을때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전 민족에게 퍼졌었습니다.
이에 격분하여 먼저 행동을 한것은 일본 유학생입니다. 1919년 2월 8일 최팔용, 송계백, 이광수 등 11명 운영위원을 중심으로 동경 YMCA 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거리로 나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고, 운영위원 중 이광수를 제외한 10명은 모두 일본 경찰에 체포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본 유학생들의 봉기는 국내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동학혁명의 주도 세력인 천도교를 중심으로 기독교, 불교 등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모여 33인의 민족대표가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 주도하여 삼일 만세운동이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천도교와 기독교는 종교별로 각각 거사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일본 유학생 송계백이 국내로 들어와 최린에게 전 국민의 하나된 거사를 제의하게 됩니다. 최린과 송계백의 노력으로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민족 대통합에 합의하였습니다.
이렇게 고종황제의 인산일 이틀 전 3월 1일을 거사일로 하고 준비를 합니다.
육당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만드는데, 일제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 부인을 둔 친구의 집에서 며칠을 머물며 작업을 하고, 인쇄는 보성사에서 2월 27일 밤 10시, 3만 여매를 인쇄 완료하고 28일 아침부터 전국 각지로 배달 했습니다.
삼일운동 준비를 하면서 최린은 최남선에게 ” 이번 거사를 주도하는 사람들 중 나중에 친일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라고 하자 최남선은 “글쎄 그런 사람이 없어야 할텐데” 라고 답합니다. 하지만 최린, 최남선, 이광수, 김성수 등은 나중에 친일파로 변합니다.
드디어 거사일인 1919년 3월 1일 12시 민족대표 33인은 종로 태화관에 모여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오후 2시 독립선언서 낭독을 합니다. 동시에 최린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을 시켜 총독부에 독립선언 사실을 통보합니다. 통보를 받은 일본 경찰대 80여명은 태화관을 포위했고, 민족대표 33인은 일본 경찰의 포위 속에서 만세 삼창을 외친 후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갔습니다.
한편 탑골공원에서는 중등학교 (현재의 고등학교) 학생들 4~5천명이 모여 오후 2시가 되자 이름 모르는 한 학생이 단상에 올라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삼창하자 모여있던 모든 학생들이 따라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행렬을 두개로 나눠서 하나는 정동의 미국 영사관을 향하고 다른 행렬은 총독부를 향해 행진했습니다. 당연히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죠.
야사에 전하는 내용에 의하면 유림도 삼일운동에 동참 하기로 하였으나, 유림 대표 김창숙, 김정호는 태화관에 늦게 도착하여 일본경찰 포위 속에 있는 태화관에 들어갈 수 없자 “우리 유림들은 나라에 큰 죄를 지었다.” 라며 통곡을 하면서 탑골공원으로 갔는데 군중들이 “이놈아 통곡은 왜 하느냐, 나라를 망칠 때는 너희 놈들이 온갖 죄는 다 지어놓고 유림이라고 오만하게 자부하느냐.” 라고 했다고 하네요.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3월 1일 해질녁에는 한양 도성 밖으로 번졌고 3월 2일 부터는 경기도 충청도 등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두 달간 계속된 만세운동은 200만명 이상의 국민이 참여했고, 시위 횟수도 2천회가 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또한 일본의 탄압에 의해 7,500명 이상이 희생되었습니다.
하지만 삼일운동은 국내에서만 일어난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일어나 삼일운동이 전세계의 신문에 보도 되기도 했었습니다. 또한 우수한 문장인 독립선언서가 번역되어 전세계로 퍼졌습니다.
삼일운동은 대내외에 엄청나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첫째, 상해에 임시정부가 생겼습니다. 상해로 모인 독립투사들은 독립운동의 구심점 필요성을 느껴서 수립된 것입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 대한민국 ‘ 이란 국호를 제정하고 민주공화제, 대통령제 등을 선언합니다. 그 후 1948년 제헌국회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을 천명하고 대한민국 국호를 사용합니다.
둘째, 일본의 조선통치 방법 변화입니다. 강압적인 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본은 문화통치를 표방하는데 방법이 아주 교활합니다. 수 많은 사례 중 두 개만 소개 하겠습니다.
우선 조선인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느낀 일본은 친일파를 대거 양성합니다. 삼일운동 이전까지는 자발적인 친일 부역배가 존재했으나 삼일운동 이후는 협박 회유 탄압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조선인 중 친일세력을 양산했습니다. 처음에는 소극적인 협조를 하던 친일파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친일활동을 하여 민족 분열을 일으킵니다. 삼일운동 후 조선 신문의 발간을 허용하여 다음은 일제의 역사왜곡이 시작됩니다. 우리 역사의 어두운 면은 확대 강조하고 밝은 면은 축소 은폐합니다. 게다가 조선 민족의 비하를 집요하게 추진합니다. 모든 민족은 장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일제는 우리 민족의 우수한 면은 덮어 버리고 단점만 부각시켜 주입합니다. 일제의 술수로 그 당시 우리 민족은 열등감에 세뇌된 사람이 많아 아직까지 국민 전체를 비하하고 외국을 찬양하는 사례가 있어서 일제의 슬픈 잔재가 존재합니다.
한편, 간도의 우당 이회영 선생의 신흥학교는 삼일운동을 기점으로 신흥 무관학교로 개칭되고 독립군 장교 양성에 주력합니다. 1920년 10월 21~26일 김좌진 장군의 북로 서정군은 3백명의 독립군으로 일본의 3개 사단 병력을 물리친 전투를 벌였는데 우리는 이 전투를 청산리 대첩이라 부릅니다. 신흥무관학교는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에게 장교 공급처 역할을 했습니다. 임시정부의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은 우당 이회영의 친동생 입니다.
삼일운동은 우리 민족을 크게 일깨우고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식민지배를 받는 인도와 병든 호랑이 중국도 자극을 받아 국민적 저항이 일어납니다. 중국의 한 신문의 기사내용을 소개합니다.
” 동이족의 후손인 어리석은 조선 백성들도 민족 단결을 이루고 일제에 항거하여 만세운동을 벌였는데 중화를 자랑하는 중국이, 우리가 교화시킨 조선민족보다 못하단 말인가.”
당시 동아병부 (아시아의 병든나라) 라고 조롱받던 중국이 교만심과 수치심이 동시에 나타나서 그런 기사를 올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기사 때문에 중국은 북경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5.4운동을 벌입니다. 즉 일제를 배척하고 중국 군벌정치를 반대하고 중국의 근대화를 주장했던 운동입니다. 또한 인도의 간디는 삼일운동 소식을 듣고는 무저항 운동을 전개하여 영국의 인도 식민지 지배의 부당함을 전세계에 알렸습니다.
오래된 과거도 아니고 바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일으킨 삼일운동은 이렇게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헌법의 정신의 알리는 헌법 전문에 삼일운동의 정신을 항상 기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느껴집니다.

| 참고사항 |
삼일운동 당시의 만세 구호가 ” 대한독립만세 ” 와 ” 조선독립 만세 ” 중 어느 것이 맞을까요 ?
예전에 필자도 궁금했던 내용인데요. 정답은 둘다 맞다 입니다.
당시의 국호는 1897년 대한제국으로 바뀌었죠. 그래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은 ” 대한독립만세 ” 를 외쳤고 또한 지식층 들은 대게 ” 대한독립만세 ” 를 선창했습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그런 개념을 잘 모르고 우리는 조선 백성이다 라는 생각에서 ” 조선독립만세” 를 많이 외쳤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후 전 세계에 알린 문서에는 ” 대한독립 선언서 ” 라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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