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March 29,Friday

서평쓰기의 괴로움

 

감히 서평, 책에 관한 글을 쓰기로 했다. 깊지 않은 베트남 생활을 글줄로 엮어 내기엔 살아 낸 웅덩이가 작다. 퍼 낼 물이 없는 우물과 같다. 이와 같음을 알고 책에 관한 글을 쓰게 된 건 흔쾌히 용기를 준 ‘몽 선생님’의 선의의 부추김에 힘 입은 바가 크다. 나름 독서법이 있어 그 방법대로 읽어 내리고 메모해 둔 기록이 있었다. 기록이 묻히고 사라지기 전에 활자화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기던 터였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읽은 이 없다는 싱거운 고전의 정의를 부수어 보고자 절치부심한 때의 흔적이다. 겁 없이 스스로 공부했다는 자동사를 쓰지만 여전히 만족할 수 없다. 아마도 끝까지 그 지혜들을 실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읽은 책을 남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어깨를 낮추어야 한다. 자칫 교만 떤다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저작의 저자를 소개할 때에도 지적 권위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뜻을 전달하려는 게 아니라 지식으로 군림하려 드는 자는 세 살 아이도 눈치챈다. 하여 다시 한번 돌아보고 쓴다. 본격적으로 펜을 들려니 다산 선생이 앞을 떡하고 가로막고 선다.
” 글 지으려는 자는 먼저 독서의 방법을 알아야 한다. 우물을 파는 사람은 먼저 석 자의 흙을 파서 축축한 기운을 만나게 되면 또 더 파서 여섯 자 깊이에 이르러 그 탁한 물을 퍼낸다. 마침내 물을 끌어올려 천천히 음미해보면 그 맛이 그저 물이라 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또다시 배불리 마셔 그 정기가 오장육부와 피부에 젖어 듦을 느낀다. 그런 뒤에 펴서 글로 짓는다. ”
(정민, ‘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 중에서)

한 자도 되지 않는 깊이의 흙탕물을 퍼 마시곤 배부르다 여겨 배고픈 자들을 어여삐 여기는 상황이 아니고 무엇인가. 서평은 글의 태생부터 조심스러운 텍스트여서 신중에 신중을 다짐한다. 나름의 독서법을 소개하여 한 자의 깊이라도 미리 보여 드려야겠다. 오해를 없애야 매달 한 편의 서평을 이어갈 수 있겠다. 밑도 끝도 자가 자신이 읽은 책을 평가하는 대서 오는 가소로움을 미리 감당하는 백신이라 여겨 주시면 감사할 따름이다.

우선 소개할 책들의 선정 기준은 가능하면 오래된 책으로 할 예정이다. 말하자면 저자가 죽은 지 오래된 책, 다시 말하면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을 골라 소개할 작정이다. 묵직한 책, 인류의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도 살아남은 책이 주는 강력한 메시지는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 입을 꽉 다물고 식은 땀을 내며 신중하게 고르겠다 다짐한다. 둘째, 전체를 소개하려 드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텍스트 하나 하나를 해석하는 주석과 같은 서평은 엄두를 내지도 못하기도 하거니와 재미도 없다. 마지막으로 감상은 꾹 참는다. 변화무쌍한 내 감정에 기대어 고전을 소개하면 독자는 허무하다. 그것은 멋지다거나 아름답다거나 착하다거나 하는 정언명령 같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허공에 쏘는 총질이다.
이와 같이 선정한 책을 지난 7년여간 읽고 씹어 삼켰다. 간단히 독서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는 되도록 1주일을 넘기지 않고 읽으려 노력했다. 책은 원전(原典)이거나 원전을 번역한 것이다. 원전에 대한 해설이나 원전의 효과적인 이해를 위해 풀이해 놓은 책은 불가피한 때가 아니면 참조하지 않았다.
책을 읽을 때는 늘 한 손에 펜을 들고 읽는다. 읽으면서 내 마음을 무찔러 들어오는 문장과 단락이 있으면 밑줄을 그어 표시했다. 내 의견이 생기거나 불현듯 떠오르는 연관 심상이 있을 경우엔 토를 달거나 밑줄 옆에 빼곡히 서 두었다. 그렇게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표시한 문장과 내 의견을 하나 하나 타이핑해서 데이터 베이스화 시켰다. 마지막으로 내가 저자의 입장이 되어 묻는다. 내가 저자라면. . .
그 물음의 답으로 책에 관한 한편의 칼럼을 씀으로 읽기를 마쳤다. 개인적으로 감동적인 저작은 같은 방법으로 세 번 읽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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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은 공부의 방법으로 다섯 가지를 말했다.
첫 번째 박학(博學)이다. 많이 읽어 넓게 배우는 것이다.
두 번째 심문(審問)이다. 읽는데 그치지 않고 깊이 묻는 것이다.
셋째는 신사(愼思)다. 질문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넷째로 명변(明辯)을 들었다. 신사로 얻어진 자신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명확하게 분별하는 것이다.
다산은 공부의 마지막 단계로 독행(篤行) 할 것을 제시한다.

배운 것을 삶의 밑바닥부터 자연스럽게 스며 들게 하여 행동으로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다산의 기준에서 보면 첫 번째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공부의 결실이 단 하나의 배움이라도 구체적인 생활 속으로 끌고 들어와 실천하는 삶이라면 우리는 모두 형성의 관점에서 학생일 테다. 월에 한번 그러니까 월에 두 번 나오는 ‘ 신짜오베트남 ‘ 의 격호간으로 서평을 쓰기로 마음먹으면서 위 사실이 한 없이 거슬렸다. 글의 처음에 ‘ 감히 ‘ 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이유로 헤아려 주시길 바란다.

다음 호에는 연암을 소환한다. 연암(1737~1805)은 18세기를 온전히 살다간 조선 후기 학자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첫 번째로 소개하는 이유는 이 나라의 과거와 현대의 지혜가 온전히 담긴 웅덩이기 때문이다. 고려를 지나 조선 600년은 연암으로 흘러 들고 실학으로 비롯된 근대의 사상이 열하일기로부터 흘러 나간다. 열하일기는 시대를 앞 서는 사상과 이념으로 인해 금서가 되어 근대 그러니까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비밀의 책이 되는 운명을 겪었다.
그 때문일까,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치환해도 전혀 손색없는 강력한 메시지가 여기저기 담겨 있다.
그러나 연암은 그것을 열하일기 속에 꽁꽁 숨겨 놓았다. 지금의 학자들은 연암의 심오한 텍스트를 여전히 해석하지 못한다고 한다.
할 말은 모두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치고 빠지기의 명수, 단 한 번의 긴 여행으로 당시 국제사회의 질서를 간파해 낸 혜안, 혀를 내 두르는 비유와 촌철살인의 명문, 티끌에서 시작해 우주까지 다녀오는 넓은 철학적 사유의 스펙트럼, 독자와 숨바꼭질하는 재치가 기다린다. 다음 호에서 이어간다.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런 티징멘트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장재용 작가, 산악인, 경영혁신가

E-mail: dauac97@naver.com 다음브런치: brunch.co.kr/@dauac#articles 블로그: blog.naver.com/dauac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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