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March 28,Thursday

헌신의 성화상, 클라라 슈만

클래식 역사에 등장하는 음악가들 중 자국의 지폐에 등장한 여성이 있다. 19세기 유럽 음악계를 풍미했던 독일의 여류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이다. 그렇다. 독일 낭만주의 대표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이자 피아니스트, 작곡가로 알려진 클라라 슈만이다. 한 나라의 철학과 문화를 반영하는 지폐에 여류 피아니스트의 초상화라니. 독일에서의 그녀의 위상이 느껴진다. 우리는 그녀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클라라 슈만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본다.

천재소녀‘클라라 비크’
19세기 독일의 저명한 피아노 교수였던 프리드리히 비크의 딸 ‘클라라 비크’는 어려서 소리에 잘 반응하지 않아 부모님의 속을 태웠다.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인가 걱정한 아버지는 클라라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얼마가지 않아 자신의 딸이 천재임을 알게 된다. 비크 교수의 열성적인 조기 교육 덕택에 클라라는 이미 9살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했다. 당시 클라라의 연주를 들은 평론가들중 한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 천재 소녀는 음악적으로 탁월한 것 뿐만 아니라 대여섯명의 사내아이들이 지닐 법한 힘을 가지고 폭발적인 연주를 한다”. 11세때부터는 서유럽 곳곳으로 순회 공연을 다닐 정도로 유명해진 클라라는 요즘의 ‘아이돌’과 같은 인기를 누렸다. 클라라의 유명세에 힘입어 비크 교수의 피아노 교수법은 명성을 얻게 되었고, 천재소녀 클라라는 비크 가문의 자랑이 되었다.

하숙생 ‘슈만’과 연인 ‘클라라’, 그들의 ‘혼인 소송’
어느 덧 16세의 꽃다운 아가씨가 된 클라라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그의 이름은 ‘로베르트 슈만’. 클라라의 집에서 하숙을 하며 아버지 비크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있던 슈만이 클라라의 마음을 빼앗게 된다. 두 사람이 연인이 된 것을 발견한 비크 교수는 노발대발한다. 물론 애제자였던 슈만의 재능을 인정하고 가족처럼 대해주긴 했지만 슈만과 클라라의 관계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게 된 비크는 극렬히 반대한다. 이유는 뻔했다. 애지중지 키워온 자신의 딸 클라라는 유럽을 주름잡는 슈퍼 스타였던 반면 슈만은 미래가 불투명한 무명의 작곡가였기 때문이다. 비크는 둘을 갈라놓으려 끊임없이 클라라의 연주여행을 기획하지만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애틋해졌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당시 클라라는 19세로 아직 미성년자였다. 작센 왕국 시절이었던 당시의 법에 따르면 만 20세가 되어야만 부모의 동의없이 결혼할 수 있었다.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비크 교수의 끊임없는 방해 공작으로 인해 클라라를 잃을까 노심초사하던 슈만은 더 늦기 전에 결혼을 강행하기 위해 비크를 상대로 라이프치히 법원에 혼인 허가 소송을 제기한다. 소송은 치열했다. 하지만 1심과 2심을 거친 후 법원은 슈만과 클라라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버지와의 의절을 불사하며 슈만과 결혼을 하게 된 클라라. ‘클라라 비크’에서 ‘클라라 슈만’이 된 그녀는 이제 행복하기만 하면 되었다.
피할 길 없는 ‘가족력’, 붙잡기 힘든 ‘정신’
클라라의 남편 슈만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바로 조울증과 우울증. 그의 정신적 질환은 가족력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일찍이 슈만의 누이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이후 이야기지만 슈만의 차남 또한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을 보면. 20세때 걸린 매독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더욱 나빠지기 시작한 슈만의 뇌기능은 결혼을 한 이후에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작품에 극도로 매진한 이후에 오는 탈진, 우울, 환청, 환각, 공포감에 시달리는 슈만의 정신병은 30대 중반이 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그런데 사랑의 힘은 참 무모하고도 대단하다. 클라라는 이미 결혼 초기부터 슈만의 증세를 느낄 수 있었지만 슈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격려하며 보살폈다.
그 덕분이었을까? 두 사람의 사랑과 신뢰가 깊어가는만큼 슈만의 창작열은 더욱 불타올랐고 클라라의 든든한 내조와 헌신 덕분에 당시 슈만은 수많은 명작들을 작곡할 수 있었다. 하지만 40대 초반을 넘기면서 정신분열증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한없이 추락한 현실감각으로 헤매던 슈만은 급기야 어느 겨울날 라인강에 투신한다. 지나가던 뱃사람의 도움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자신의 정신때문에 치를 떨던 슈만은 스스로 정신병원으로 걸어들어간다. 그리고 3년 후, 면회온 클라라를 알아보지 못하는 슈만.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클라라 앞에서 “나는 알아…나는 알아…”라며 뜻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이틀 뒤 천사들 곁으로 떠났다. 그의 나이 겨우 46세였다.

일방적인 희생, 그럼에도 그대를 기리며…
클라라 슈만은 어느 낭만파의 거장에 못지 않는 충분한 음악성과 기량을 지닌 음악가였다. 하지만 슈만과의 결혼을 택하는 순간부터 일방적인 희생을 자처했다고 볼 수 있다. 정신 질환으로 인해 가정을 돌보기는 커녕 자신의 몸건사조차 할 수 없었던 슈만으로 인해 클라라는 자신의 음악 커리어 상당부분을 희생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더 나아가 당시 한창 인기를 구가하던 슈만의 명예를 생각해 모든 아픔을 함구했다. 클라라는 고인이 된 슈만의 음악을 알리는 것이 본인의 사명인 양 남은 인생동안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슈만의 작품을 연주하고 또 연주했다. 76세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1300회의 연주를 개최한 클라라 슈만. 실로 놀라운 횟수이다. 클라라의 레파토리는 고전파와 낭만파를 넘나들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레파토리는 바로 그녀의 남자 ‘슈만’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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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는 슈만의 사후에 쓴 일기에 이런 글을 남긴다. “이 세상 남자들 중 가장 훌륭했던 그이는 내가 요즘 그의 작품을 제대로 연주하는 걸, 연주다운 연주를 하는 걸 결코 듣지 못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자주 슬픔에 빠지곤 한다.” 치유될 길 없는 정신병으로 그토록 자신을 힘들게 했던 남편이었지만, 클라라는 평생토록 오로지 슈만을 사모하고, 존경하고, 그리워했다. 그러한 클라라는 극복과 인내의 아이콘, 헌신과 사랑의 매개체로서 독일인들의 마음 속에 여전히 자랑스럽게 우뚝 서 있다.

 

 


김 지 희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졸업(교육학 학사) / 미국 맨하탄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석사) / 한세대학교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박사) / 국립 강원대학교 실기전담 외래교수(2002~2015) / 2001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 이후 이태리, 스페인, 중국, 미국, 캐나다, 불가리아, 캄보디아, 베트남을 중심으로 연주활동 중 / ‘대관령 국제 음악제’, 중국 ‘난닝 국제 관악 페스티발’, 이태리 ‘티볼리 국제 피아노 페스티발’, 스페인 ‘라스 팔마스 피아노 페스티발’ 《초청 피아니스트》 E-mail: pianistkim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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