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5,Thursday

열하일기(熱河日記)

 

 

“바다에는 배 간 자리 찾을 길 없고 산에서는 학 난 자취 볼 수 없어라”

열하일기 ‘남주 이야기’에 나오는 시구(詩句)다. 연암은 꼭 이렇게 살다 갔다. 노론 명문가 출신의 양반가에서 태어났지만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살림이 넉넉하지 못해 남의 집에 세들어 살며 거처를 전전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황해도 금천의 연암골이었다. 박지원의 호는 여기서 유래했다. 연암은 1780년 청나라 건륭제 칠순연의 축하 사절단으로 팔촌 형님 박명원을 수행하는 자격으로 참가하게 된다. 당시 건륭제의 별궁이 열하 (오늘날 중국 허베이성 청더, 河北省 承德)에 있었다. ‘다른 사람은 북경까지 갔다가 돌아왔는데, 자기만은 북경 위쪽 승덕의 열하까지 다녀왔다는 자랑을 책 이름 속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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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1737~1805)은 18세기를 온전히 살았다. 서양에서는 대혁명의 시기였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가 프랑스 대혁명을 이끌었고 다윈의 ‘종의 기원’으로 촉발된 무신론(無神論)이 고개를 드는 격변의 때였다. 같은 시기 한반도는 어두웠다. 오랜 왕조의 끝자락이었으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두 차례 모진 환난 이후 명분만을 놓고 벌인 기득권들의 당파 싸움에 백성의 삶은 외면됐다. 그럼에도 멸망한지 130년이 지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며 초강대국이었던 청과 겨뤄보려는 북벌론이 대세였던 때였다. 연암은 당쟁과 무관했지만 지리멸렬한 정치판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외교적 사태 파악에 어둡고 아둔한 내정(內政)의 시대를 온 몸으로 안타까워했다. 미상불 곧 망해 버릴 청나라 인줄 알았는데 실제로 다녀와서 눈으로 보니 멸망은커녕 나라의 주인으로 사회, 문화적 발전이 굉장했던 것이다. 연암은 이런 현실을 인지했지만 현대로 치자면 서슬퍼런 국가보안법이었던 ‘북벌론’앞에서 정반대의 논리였던 ‘북학’을 곧 바로 내 지를 수는 없었다. 할 말을 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연암은 열하일기에 모두 쏟아낸다. 그것은 오랫동안 터지기를 기다려온 봇물과 같은 것이어서 3개월간의 짧은 여행기에 중국의 역사, 지리, 풍속, 토목, 건축, 의학, 인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문학, 지리, 천문, 철학 등이 자신의 사유와 한데 뒤섞여 망라된 융합적 글쓰기 형태로 나타난 것이 열하일기다.

열하일기는 시간의 순서대로 쓰여진 기행문이다. 날짜와 지역, 시간, 만난 사람들을 열거하고 길 위에서 경험했던 일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무엇보다 열하일기의 백미는 여행의 순간 순간 연암이 들여다 놓은 사유에 있다. 이별에 슬퍼하고 백성의 핍진한 삶에 분노하며 불합리를 일갈하고 자연을 섬기며 우주를 이해하려는 그의 사유가 책 곳곳에 배치돼 있다. 열하일기를 읽으며 연암이 그 시대 조선을 이끌었다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가 되었을까를 상상한 적이 있다. 플라톤의 철인 정치에 더한 상앙, 한비자의 냉철한 법가 사상과 세종의 위민이 더해져 가슴이 따뜻한 나라가 되지 않았겠는가 하고 말이다.

열하일기는 불온하다.
누구나 말하고 싶지만 말하기 어려운 것들을 연암은 말했다. 열하일기 안에서 시대의 금기를 죄다 건드리고 다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허생전>, <양반전>, <호질> 등의 경쾌한 풍자소설이 모두 열하일기를 통해 전해진다. 정조는 열하일기의 이러한 불온성을 간파하여 문체반정(文體反正)을 공포한다. 정조는 사람들이 연암의 글에 감동하고 따라하고 퍼뜨리면서 불온성이 온 나라에 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문체를 바로 하여 사람들의 사상을 되돌려 놓겠다는 의지다. 이렇게 열하일기는 서책 하나로 온 나라의 정책이 좌지우지 되는 파괴력을 지닌 글이었다. 그 힘으로 이른바 북학파로 불리는 ‘연암 그룹’이 만들어진다.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 이름만 들어도 혀를 내 두르는 이들이 모두 연암의 사람들이었다.

열하일기는 혼란스럽다. 본문 일부를 소개한다.
화담 선생이 외출했다가 집을 잃고 길에서 울고 있는 자를 만났다. “너는 왜 우느냐?” 그가 대답했다. “제가 다섯 살에 눈이 멀어 지금껏 스무 해입니다. 아침에 집을 나와 길을 가는데 갑자기 천지 만물이 맑고 분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기뻐서 돌아가려고 했더니, 골목은 갈림길이 많고 대문은 다 똑같아 제 집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웁니다.” 선생이 말했다. “내가 네게 돌아가는 법을 가르쳐주마. 도로 네 눈을 감아라. 그러면 네 집을 찾을 수 있을 게다.” 이에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려 제 걸음을 믿고서 바로 집을 찾아갔다.
-열하일기 중 <창애에게 보내는 답장 2> – 체수유병집 (정민 지음)에서 재인용

연암은 이런 식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기 쉽게 말하지 않는다. 결코 직선으로 다가서지 않는다. 늘 우회로를 만들고 치고 빠진다. 모든 말을 다해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연암은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장님이 갑작스레 눈이 떠졌다. 그런데 눈 감고도 가던 길이 눈이 떠지니 갈 수가 없다. 난감하다. 다시 눈을 감으니 그때서야 제 집을 찾아 갔다. 눈은 떠졌으나 나는 보이지 않는다. 떠진 눈은 나의 것이 아닌 것이다. 주체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이겠다. 당시 조선은 눈뜬 장님과 같다는 말로 주체가 사라져 길을 잃었다고 일갈하는 풍자다. 연암의 표현에 기가 막힌다.

열하일기는 깊다.
이 세상을 이루는 단 한가지 원형을 설명하려 인간은 무단히 애를 썼다. 2천여년을 거슬러 가보면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세상의 근원이 물이라 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질료, 헤라클레이토스는 불, 피타고라스는 세상이 수(數)로 이루어진다 했으며, 파르메니데스는 존재 자체라 했다.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 쌓이고 모이고 엉킨 것이 오늘 이 대지가 한 점 작은 먼지의 집적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먼지와 먼지는 서로 의지를 삼아 먼지가 엉키면 흙이 되고 먼지가 거친 놈은 모래가 되고 먼지가 단단한 놈은 돌이 되고, 진액은 물이 되고, 더우면 불이 되고 맺히면 쇠가 되고 자라면 나무, 움직이면 바람, 뜨거워 화하면 벌레, 우리는 벌레의 한 종족” <P. 359, 열하일기, 리상호 역, 보리출판사>

현대 과학은 우주가 빅뱅으로 처음 만들어졌으며 탄소 등으로 구성된 우주 먼지가 서로를 끌고 당겨 별을 만든다고 설명한다. 연암의 기막힌 연역은 현대 과학자들도 울고 갈만 하다. 다른 사신들이 중국의 자금성 위용과 웅장한 성곽, 광활하게 펼쳐진 산세들을 이야기할 때, 연암은 깨진 기와를 보고 우리 땅에 맞는 기와 재료를 분석한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물리적인 제약으로 어쩔 수 없는 건축물과 땅덩어리가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며 생활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재료와 공간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실사구시, 이용후생은 열하일기에서 비롯된다.

열하일기는 넓다. 연암은 말한다.
“세간 사물로서 극히 작은 것으로 겨우 털끝 같은 것이라도 하늘이 내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이 어떻게 일일이 다 명령을 했겠는가. 감히 묻노니 이를 준 자는 누구일 것인가? 다시 묻겠다. 하늘이 이를 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또다시 묻겠다. 이를 사용하여 물건을 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P. 473, 열하일기, 리상호 역, 보리출판사>

이 기절할 질문들 보라. 연암은 만물이 어찌 그리 적합하게 지적으로 설계되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서양에서 2천년간 논란이 됐던 신의 존재 증명을 연암은 지금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연암은 지극히 칸트적 견해에 가깝다. 경험세계에만 적용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은 존재를 무한소급 할 수 없다는 견해다. 즉 전지전능의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 theory)에 반대의 입장을 펴고 있다. 말하자면 오존층의 두께가 생물 보호에 어찌 그리 적합할 수 있는가에 대해 하늘(神)이 한 일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 세간의 신학자들이 연암 앞에서 무참해진다.
우리는 연암을 읽고 무엇을 얻는가. 그의 짧은 기행을 기이한 조선의 한 사내의 이야기로 넘겨야 할까. 열하일기는 갖은 이야기와 잡다한 가십을 열거한 雜記(잡기)로 책상 옆에 치워둬야 하는 책이 아니다. 200년 전의 사람이 오늘 우리에게 情理(정리)를 이야기하는 것을 읽어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당시의 중국)들이 쌓아 놓은 업적이나 물리적 토지의 광막함을 부러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만의 엣지(edge)를 가지고 세상 앞에 당당히 나서는 것이다. 연암의 시선은 의기소침한 사회에 통렬한 똥침을 놓는다.
지금 베트남은 18세기 열하일기의 청나라 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이 곳을 기회의 땅이라고 하니 말이다. 오랜 편견과 좁은 식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겐 기회가 보이지 않는다. 꼭 이와 같이 18세기 조선은 청을 외면하려 했다. 실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가 본적 없고 가 봤다 하더라도 겉만 보았기 때문이다. 연암이 광활한 요동벌과 처음 마주쳤을 때 “좋은 울음터다. 한바탕 울 만하구나.”라고 했다. 그리고 울음에 대한 웅변을 토해내는데 그것이 저 유명한 열하일기 호곡장론 (好哭場論)이다. 갑갑한 자궁을 벗어나 사지를 뻗으니 참소리의 울음이 나오고 이 울음이 바로 일체 거짓이 배제된 진정한 울음이라 했다. 우리는 좁은 곳을 벗어나 큰 울음을 울 수 있는 이곳 베트남에 왔으니 연암을 다시 살려내어 장대하고 생각하고 제대로 살아 조그만 제국 하나를 세워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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