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5,Thursday

유쾌한 금수저, ‘펠릭스 멘델스존’

클래식 음악에 약간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서양 음악가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선율의 시인 ‘쇼팽’을 꼽는 것 같다. 그리고 천재적인 음악가로는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의 이름을 어김없이 꺼낸다. 더 나아가 위대한 음악가는 언제나 ‘악성 베토벤’이 주인공이다. 이 세 사람은 천재적인 음악은 기본이요, 저마다의 ‘색깔있는 라이프 스토리’를 보유한 음악가들이기에 지금까지 대중의 관심 밖으로 벗어난 적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Songs without words (무언가)’로 유명한 독일 출신의 음악가 ‘펠릭스 멘델스존’은 대중들에게 어떠한 색깔로 각인되어 있을까? 그는 쇼팽의 달콤함, 모차르트의 순수함, 베토벤의 치열함처럼 한 단어로 단번에 표현되는 그런 인기있는 음악가인가? 개인적으로 멘델스존의 음악을 떠올리니 ‘명랑함’이라는 단어가 언뜻 생각나다가 이내 ‘고상함’을 거쳐 ‘신중함’으로 바뀐다. 그의 음악은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 녹아 있다. 대표곡 ‘무언가’를 차치하고라도 제목은 모르지만 이미 우리가 귀와 가슴에 담고 있는 친숙한 그의 작품들이 상당히 많다. 멘델스존, 오늘 그대에게 조금 더 다가간다.
멘델스존은 소위 ‘뼈대있는 집안’ 출신이었다. 일찌기 18세기에 계몽주의 철학을 알린 철학자 ‘모세 멘델스존’이 그의 할아버지였고, 독일 함부르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은행가였던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 외에도 멘델스존 집안에는 아버지, 어머니쪽을 통틀어 유명인사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렇게 부와 명예를 두루 겸비한 집안 환경 덕분에 멘델스존은 구김살없이 천진한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그랬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으니 모차르트처럼 돈벌이를 위해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됐고,무서운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속에서 제 2의 모차르트가 되기 위해 베토벤처럼 치열하게 음악을 쟁취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평생 가난에 허덕이며 자신의 피아노를 단 한번도 가지지 못했던 슈베르트의 삶이나, 나고 자란 조국 폴란드가 전쟁을 맞아 피난 간 이후 평생 타국을 떠돌며 자신의 나라를 그리워했던 쇼팽의 한맺힌 정서, 그리고 조현병 때문에 밥 먹듯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던 절친 슈만의 고독함 역시 멘델스존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여느 신동들과 다름없이 피아노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멘델스존은 든든한 아버지 덕분에 견문을 넓히고자 유럽의 여러나라를 마음껏 여행할 수 있었으며, 집안에는 가족 전용 오케스트라가 상주하고 있었다. 결혼생활도 아주 순탄했다. 그 어떤 예술가도 가지지 못했던 단란한 가족의 가장이 되었다. 그야말로 부족함 없이 완벽한 환경을 가졌던 멘델스존. 그래서일까? 멘델스존의 음악에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예술가들이 지니는 심오한 정서나 처절한 예술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평을 듣는다. 다시 말해, ‘예술이란 고통의 산물이다’라고 믿는 이들에 의해 그야말로 금수저였던 멘델스존의 음악은 깊이 없이 밝고 화려하기만 한 음악으로 평가절하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의 태동기에도 꿋꿋하게 고전과 낭만의 다리 역할을 하며 자신의 ‘내면’를 표현해 나갔던 지조있는 음악가였다.
‘고통을 뚫은 예술의 가치가 더 높다’는 생각에 갇혀 멘델스존을 저평가했던 시선은 이제 거두어져야 한다. 왜냐면 멘델스존은 작곡과 연주만이 주활동이었던 작곡형 음악가들과 달리 음악교육자, 지휘자, 기획자로도 역사에 한 획을 그었기 때문이다. 굵직한 예로, 20대 중반에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부임한 멘델스존은 그저 ‘팔만 휘젓던’ 기존 지휘자의 모습을 버리고 작품의 해석과 연주에 실제적인 영향력을 펼치는 최초의 ‘전문 지휘자’가 되었다. 덕분에 오케스트라의 곡 해석력과 연주력은 자연히 상승하게 되었고, 극장을 채우기 위해 관객을 호객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좋은 음악은 자석처럼 좋은 청중들을 끌어당겼다. 결국 멘델스존은 이름도 없던 지방 오케스트라를 일약 국제적인 스타 오케스트라로 키워냈고, 그로부터 20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도 라이프치히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위상은 현재까지 대단하다.
뿐만이 아니다. 멘델스존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100년만에 부활시킨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마태 수난곡은 ‘마태가 전한 복음서를 다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곡’으로 연주시간이 약 3시간 가량 소요되는 장대한 곡이다. 인터넷이나 음악전문지, 심지어 유명한 음악가가 저술한 서적에서는 이 사건을 그냥 주워 들은대로 써놓고 있다. 즉 멘델스존 부부가 고기를 사러 푸줏간에 들렸다가 고기를 싸주는 종이가 바흐의 수난곡 악보였다는… ‘카더라’식의 내용으로 말이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멘델스존은 14살 생일파티 때 할머니로부터 바흐의 수난곡 악보 일부분을 선물 받았고, 이후 고음악을 수집하는 스승의 지인들이 도와주어 악보 전체를 손에 쥐게 되었던 것이다. 3시간이나 소요되는 길고 지루한 ‘수난곡(솔리스트들과 합창 그리고 오케스트라가 함께 하는 대곡)’을 무대에 다시 올린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에도 멘델스존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아야 할 ‘대작’이 땅에 묻혀 있는 것을 절대 볼 수 없었고 뚝심있게 밀어부쳤다. 연주회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계기로 ‘100년만에 바흐를 재발굴’한 ‘기획자’ 멘델스존의 이름은 대중들에게 뚜렷이 기억되기 시작했다.
완벽해 보이던 멘델스존에게도 ‘아킬레스건’은 있었다. 바로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멘델스존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일찌기 자신의 뿌리를 감추려 기독교로 개종했고 멘델스존은 아버지를 따라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하지만 독일 사람들은 멘델스존 집안이 대대로 유대인인것을 알았기에 보이지 않게 차별을 일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편파적인 눈길을 극복한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라는 도시를 유럽 음악의 중심지로 성장시켰다. 한 때, 히틀러는 유대인 멘델스존을 나치정권의 숙청대상에 올려 놓고 그의 작품 연주를 철저히 금지시켰었다. 그의 유품과 악보는 불태워졌으며 라이프치히에 있던 그의 동상은 파괴되었었다. (2008년에 복원되었다) 그래서인지 멘델스존의 음악은 한동안 대중의 곁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음악가들의 작품들이 승승장구하던 그 세월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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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다시 유쾌한 금수저 멘델스존을 만날 수 있게 되어서. 밝고 경쾌하며 끊임없이 긍정의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멘델스존의 음악이 긴 세월의 공백을 깔끔히 날려버리고 청량한 공기처럼 우리의 숨결과 함께 하고 있어서.


김 지 희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졸업(교육학 학사) / 미국 맨하탄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석사) / 한세대학교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박사) / 국립 강원대학교 실기전담 외래교수(2002~2015) / 2001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 이후 이태리, 스페인, 중국, 미국, 캐나다, 불가리아, 캄보디아, 베트남을 중심으로 연주활동 중 / ‘대관령 국제 음악제’, 중국 ‘난닝 국제 관악 페스티발’, 이태리 ‘티볼리 국제 피아노 페스티발’, 스페인 ‘라스 팔마스 피아노 페스티발’ 《초청 피아니스트》 E-mail: pianistkim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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