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March 28,Thursday

오디세이아

‘나’를 찾아 떠나는여정

아일랜드 출신의 대문호, 제임스 조이스 James Joice는 ‘율리시즈(Ulysses)’를 썼다. 1922년 출판된 이 책은 출판과 동시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소설은 ‘의식의 흐름’ 이라는 이제껏 없던 기법을 소개했다. 주인공이 하루 동안 겪는 사건과 모험을 철학적 형태로 그려낸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소설이라 문학계는 극찬했다. 외설적 표현으로 금서禁書가 되기도 했던 이 소설은 실은 ‘오디세이아’의 플롯을 빌려온 것이었다. 책의 제목 또한 같아서 율리시즈는 오디세우스(Odyssus)의 로마식 표기다. 소설 율리시즈의 열여섯 번째 에피소드에는 이런 대화가 나온다.

블 룸 : 자네는 왜 아버지의 집을 떠나왔나?
스티븐 : 불행을 찾아서지요.

불행은 인간의 숙명이다. 불행은 떠나지 않는 자에겐 찾아 오지 않지만 불행을 겪지 않은 인간은 어엿할 수 없다. 오디세이아는 불행을 찾아 떠난 인간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다.

일리아스 Ilias는 명예로운 인간에 대해 물었다. 인간의 목숨이 한없이 가벼워지는 전장戰場에서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생명과 두려움 앞에 대처하는 인간적 방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마디로 명예롭게 살고 죽는 이들의 이야기였다. 반면, 오디세이아 Odysseia는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던 오디세우스라는 사나이가 집으로 가는 10년간의 여정을 그린 이야기다. 박진감 넘치는 전쟁 씬은 없다. 단지 떠나올 때의 지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여정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보여준다. 마치 인생은 태어나 온갖 고난을 겪고 태어난 모습으로 다시 죽는 것임을 알려 주듯이 말이다. 나를 찾아 떠난 그 오랜 세월이 결국 나에게 다시 돌아오는 길이었다는 가벼운 말로 묵직한 인생을 설명하듯. 그래서인가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 Ithaka 섬으로 가는 길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당신은 어디에서 온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다. 결국 오디세이아는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이자 고전적 해답의 실마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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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로 들어가자. 그전에 약간의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귀향하기 전의 행적에 대해 알아보자. 원래 오디세우스는 헬레네(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 의해 트로이로 납치됐던 문제적 여인)의 구혼자였다. 눈치가 빨랐던 오디세우스는 헬레네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을 것을 알고 일찍이 포기한다. 그렇지만 완전히 포기할 순 없어 헬레네의 언니였던 페넬로페를 자신의 아내로 줄 것을 그 아버지 틴타레오스에게 물밑 요청을 한다. 그 대가로 구혼자 중 누군가가 헬레네의 남편이 된 이후에 다른 구혼자들의 반란을 잠재우겠다 약속한다. 오디세우스는 구혼자 전체에게 신사협정을 요구하고 정해진 남편에게 문제가 생기면 모두 힘을 합쳐 도와준다는 맹세까지 성사시킨다. 이 협정이 훗날 트로이 전쟁에 그리스 ‘연합군’이 참전하는 도화선이 된다. 따지고 보면 트로이 전쟁의 격발은 오디세우스가 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겠다.
그런데 실제로 헬레네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납치 당하고 그 남편인 메넬라오스가 협정을 근거로 참전을 요청하자 정작 오디세우스는 미친 척을 하며 회피한다. 하지만 메넬라오스의 전령 팔라메데스의 꾀에 넘어가 참전하게 된다. 이후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책사 노릇을 톡톡히 해 내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우리가 잘 아는 ‘트로이 목마’는 그의 아이디어였다. 오디세우스는 임기응변에 능하고 주도면밀한 인간이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한마디로 얍삽했는데 그때는 잔인하면서도 잔꾀 많은 얍삽한 인간이 미덕이었던 때였으니 오디세우스는 위대한 인간으로 추앙 받았던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몇 년간 요정 칼립소의 섬에서 보냈다. 칼립소는 그를 사랑했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그 즈음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를 찾겠다는 신념으로 먼 길을 나서게 되는데 아테나 여신은 오디세우스의 친구인 멘토르의 모습으로 변하여 텔레마코스에게 여행 중에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우리가 자주 쓰는 멘토 ‘mento’는 오디세이아에서 비롯한다). 책 5권에서 오디세우스는 벌거벗은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폭풍우를 만나 외딴 섬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는데 그 섬의 공주인 나우시카(Nausikaa)가 오디세우스를 발견한다. 그녀는 그를 궁전으로 데리고 가 따뜻하게 맞았고 융숭하게 대접한다. 여기서 오디세우스는 궁정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표류하며 겪었던 모험담과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요정 칼립소에게 붙잡혀 그 섬에 살게 된 사연을 이야기한다. 이때 들려준 오디세우스의 모험담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부분이다.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에게 붙들려 그의 동료 4명이 희생당하고 어렵사리 동굴에서 빠져 나온 이야기, 무시무시한 식인종의 땅에 상륙해 겪었던 고초, 마녀 키르케(Circe)의 섬에 이르러 부하들이 돼지로 변했지만 오디세우스는 몰뤼라는 마술의 약을 먹고 가까스로 모면한 이야기, 지하 세계로 내려가 죽은 자들과 만나고 그 중 눈먼 예언자였던 테레시아스의 혼령을 만나 앞으로 자신의 운명이 겪게 될 일을 알게 된 일, 얼굴은 사람이고 몸은 새의 형상인 세이렌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모두 죽게 되는데 귀를 밀랍으로 막고 배의 돛대에 몸을 묶어 유혹에서 벗어난 일 등을 겪는다. 곡절 끝에 오디세우스는 마침내 고향 이타카 섬에 발을 딛게 된다. 거지로 변장해 남들이 모르게 접근하여 그가 떠나 있는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냈고 아내 페넬로페의 정절을 확인한다. 이후 아들과 함께 자신의 아내 페넬로페를 괴롭힌 뻔뻔스런 구혼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페넬로페와 해후한다. 이로써 20년 동안 떨어져 있었던 부부는 재회하게 되고 성대한 축하연이 벌어지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5백 페이지에 달하는 이야기를 요약하는 것은 무리다. 그렇지만 두꺼운 책임에도 술술 읽힌다. 줄거리를 이끌어 나가는 힘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 전개는 자연스럽다. 우연과 필연을 적절히 녹여내고 절정을 부각시키기 위해 절정 이전의 전후 설명이나 상황 전개의 속도 조절 등 혀를 내 두를 정도다. 3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이야기는 가슴 떨리고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헐리우드 관계자들이 맹탕이 아닌 바에야 괜한 이야기로 블록버스터를 만들지는 않을 테다. 오디세이아는 잊힐 만 하면 헐리우드에 초청되는 여전히 인기 있는 소재다. 떠남, 고난, 극복, 귀환이라는 영웅의 경로가 그대로 살아있다. 사람들은 영웅을 원하고 영웅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3천년이 흘렀음에도 영화, 소설, TV쇼 오락 프로그램까지 오디세이아의 플롯을 빌린 소재는 다양하다. 오디세이아가 인류의 가슴에 살고 있는 이유다.

우리 삶은 오디세이아다. 오디세이아는 우리의 삶과 같다. 오디세이아는 인간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욕망들을 건드린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형태로든 떠나고 고난을 겪게 되고 고난을 극복하며 성장하고 마침내 떠난 자리로 다시 돌아와 다음 세대에 밑거름이 되며 죽는다. 그 사이에서 우리가 했던 일들이 ‘나’를 정의하게 될 텐데 나는, 당신은, 우리는 어떤 오디세이아로 기억되고 싶은가? 그전에 물어야 한다. 우리는 떠날 수 있는가? 불행을 찾아 나서는 일은 그래서 위대하다. 떠남은 원초적 유혹이다. 그곳에 있을지도 모를 무엇인가에 대한 기대다. 이 기대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을 유혹했다. 인간의 역사는 이 유혹에 넘어가 홀연히 떠난 이들의 역사다. 길을 떠나고 현실을 떠나고 일상을 떠나는 데서부터 역사의 변곡점은 시작되었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척박한 토양을 떠난 그리스는 문명을 일구며 지중해를 제패하지 않았는가.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간다. 떠난 이들은 다시 돌아가는 것을 목숨과 같이 여겼다. 트로이 전쟁 10년을 치르고 고향인 이타카 섬으로 돌아가기 위한 눈물겨운 오디세우스의 10년 행로는 3천 년 간 인간의 사유를 지배했다.

‘인간은 자궁이라는 이름의 무덤에서 나와 무덤이라는 이름의 자궁으로 돌아간다.’

돌아오기 위해 떠나고 떠나기 위해 돌아온다. 먹기 위해 싸고 싸기 위해 먹는다.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오고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다. 사랑은 미움을 동반하고 미워하는 것은 사랑했기 때문이다. 채우기 위해 버리고 채우려 버린다.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이 빌어먹을 순환은 저주에 가깝지만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원형이다. 그 소모적 삶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인류의 행위는 결국, 인간이 인간에게 가는 길이다. 인간이 가진 원초적 행위와 오디세이아는 다르지 않다. 새로움 없이 진행하는 일상은 인간에게 떠남을 부추기고, 평범을 기웃거리는 존재는 우리에게 떠남을 추동한다. 오디세이아는 불행을 찾아나선 자들이 영웅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가는 여정이다. 비록 큼지막한 영웅은 될 수 없지만 오디세이아의 여정을 따라 우리 삶도 신화가 될 수 있다 믿는다. 늦지 않았다. 불행을 찾아 나서 보는 건 어떤가


장재용

작가, 산악인, 경영혁신가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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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blog.naver.com/dauac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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