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0,Saturday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5월의 한국을 방문하면 우리나라가 정말 아름답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1년에 한 번쯤 방문하는 한국이니 내가 즐기고 싶은 계절, 5월에 한국에 오게 된다. 이번에도 아이들과 함께 친가, 외가 방문을 목적으로 한국에 왔다. 우리가 있는 곳은 부산이라 뒷산에 핀 파릇파릇한 새잎도 예쁘고, 잔잔한 부산의 봄바다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튄다. 벚꽃은 이미 다 졌지만, 담장마다 핀 빨간 장미는 진한 봄향기를 전하고, 상큼한 연두색의 새잎들은 어리고 부드러워 꼭 우리 아이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호 글은 이미 쓸거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아이와 함께 다니면서 겪고 느낀 점을 쓰면 되겠지, 한국의 아름다움과 육아환경의 차이에 대해 쓰면 두 페이지는 금방이겠군…호호호. 이번 호 글은 술술 나오겠어’ 하며 다른 주제나 소재로 쓸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이 에세이 마감 날인데 계속 생각해왔던 글이 아닌 다른 글을 써야겠다.
한국에 오고 며칠 후,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친정엄마와 함께 시골에 혼자 계신 외할머니댁에 다녀왔다. 외할머니는 90이 다 되어 가시는 고령의 나이지만, 외증손자 이름, 나이도 정확하게 기억하시는 아직 정정한(?) 편이시다. 외할머니가 계신 곳은 ‘장지골’. 얼마나 골짜기인지 마을 이름에도 ‘골’이 들어가 있는 시골 중 시골이다. 어린 시절 친척들과 뛰어놀던 큰 나무 아래 정자는 삼사십년이 지나도 그대로이다. 그것뿐이겠는가. 집집마다 시멘트 담벼락에는 30년은 더 됐을 것 같은 ‘자나 깨나 간첩 조심’ 같은 반공구호들이 어색하지 않게 빛바랜 채 새겨져 있다. 앞산 나뭇잎을 세어 볼 수 있을 만큼 깨끗하고 맑은 그 산골에서 시연이와 시우는 모기, 파리를 잡겠다고 파리채를 들고 신이 났다. 나와 남동생은 여기서 인생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별의 별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어댔다. 할머니의 짐차인 유모차가 사진에 걸린다며 다시 찍고 다시 찍고, 남동생과도 어린 시절에 놀던 것처럼 웃고 떠들고 신이 난거다. 외손자, 증외손자가 이렇게 각자의 재미를 찾아 장지골을 즐기고 있는 그 시간에, 친정엄마는 할머니집 부엌 청소부터 시작했다. 냉장고 구석구석을 닦고, 지저분한 수세미도 새것으로 바꾸고, 유통기한이 지난 식재료들은 쓰레기통으로. 청소가 끝나고는 집에서부터 챙겨온 점심거리로 점심을 준비했다. 외할머니는 입맛이 없다며 조금 드시고 마셨지만, 상에 앉아계시면서 외증손주들 재롱도 보고 자식들 밥 먹는 모습을 끝까지 보셨다. 이제 점심을 다 먹었으니 치워야 할 시간. 친정엄마는 또 바쁘시다. 설거지하면서 보이는 대로 주방 청소를 마무리하고, 마지막엔 화장실 청소까지. 외할머니 드실 찬거리들 몇 개까지 준비하고 나니,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 앉으면서 친정엄마는 ‘아이고, 허리야. 오늘 처음 자리 잡고 앉아보네’ 하신다. 엄마에게는 친정집이니 좀 앉아서 외할머니와 이야기도 나누고 쉬고 하면 좋으련만, 궁둥이를 붙일 새가 없이 일만 하다 부산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나와 남동생, 시연이 시우는 맑고 예쁜 한국의 시골 풍경을 잘 감상하다가 왔는데 말이다. 내가 할 말은 ‘어휴, 좀 쉬엄쉬엄 하지~’라며 한 소리 거들어주는 거 밖에는 없다.

그리고 며칠 뒤, 오늘은 우리 집 제사다. 일을 많이 줄여서 한다고는 하나, 그래도 제사는 지내야 하니 며칠 전부터 친정엄마는 제사준비로 바쁘셨다. 마음 같아서는 돕고 싶지만, 시연이 시우를 본다는 핑계로 애들이랑 뒹굴뒹굴 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제사 당일. 한국 와서 매일 친정집에 삐대고, 일 있다며 애들 부탁하기만 했는데, 오늘마저 그럴 수는 없는 일. 내 특기이지 취미인 집안 대청소를 오늘은 내가 하겠다며 큰 소리를 쳤다. 세탁조 청소를 돌리고, 지저분한 것들이 쌓여있는 베란다부터 청소하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들어보니 버릴 것들, 정리해서 다시 놓아야 할 것들, 먼지 낀 것들, 제법 손댈 것이 많았다. 허리가 아프다 싶을 만큼 청소를 하고 나니, 다른 곳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나 이것저것 정리 할 것이 많은 곳은 주방. 주방 곳곳에 찌든 때를 닦고,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고 마지막 설거지까지 마무리한다. 다음은 책꽂이. 결혼 전 책 욕심이 나서 사서 꽂아둔 많은 책들. 결혼하고 10년째 꺼내 보지 않지만, 엄마가 마음대로 버릴 수 없어 그대로 꽂혀 있던 그 책꽂이의 책을 정리해본다. 추억이 담긴 책, 버리고 싶지 않은 좋은 책, 이걸 왜 샀나 싶은 책, 하나하나 기억하고 추억해보며 대부분의 책을 정리한다. 집청소의 마지막은 바로 화장실 청소. 바닥의 물기까지 쫙 닦고 나니 개운하다.

오늘 집청소를 해보니 외할머니집에서 엉덩이 한 번 못 붙이고 계속 집안일만 계속 하던 친정엄마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친정엄마는 아직 젊고(배드민턴 동호회에서 63세 할머니는 ‘처녀’라 부른다니…) 건강하시지만, 몇 십 년째 하는 집안일, 이제는 별 재미없다고 하신다. 웬만하면 일을 만들어 하고 싶지 않다는데, 해도 표시도 안 나는 집안일. 이제는 자식들도 다 컸고 집에 어린아이들도 없으니 굳이 깨끗하게 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 하신다. 나는 애들 낳고 키우면서 깨끗하게 쓸고 닦는 게 이제 습관처럼 몸에 배어있다 보니 친정집 살림을 보면, ‘어휴, 저 먼지를 안 닦고 있나’ 싶기도 한데, 엄마 말을 듣고 보니 이해도 된다. 친정엄마가 외할머니댁에 가면 잠시도 쉬지 않고 집안일을 하고 오는 그 마음이나 내가 친청엄마 제사를 앞두고 집안일을 하고 난 뒤 느끼는 그 마음이 같겠구나 싶다. 자식은 내리사랑이라고는 하나, 자식들 키우느라 힘들게 보낸 부모님의 그 시절을 이해하고 이제 그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자식의 부족한 마음을 ‘치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렇게 글을 쓰지만, 정작 무뚝뚝한 경상도 딸은 “살림, 해도 표시도 안 나는데 그냥 대충 하고 사시다가 내가 내년에 와서 대청소 한 번 해 주께요.”라는 말로 ‘사랑하고,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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