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18,Thursday

베를리오즈의 ‘무서운 교향곡’

<영화와 음악 사이의 ‘교집합’>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해변. 그곳을 산책하고 있는 여인 로라. 얼굴이 쓸쓸하다. 그녀의 남편 마틴이 극도의 결벽증과 심한 의처증으로 로라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장실의 수건들은 언제나 일직선으로 줄을 맞춰 걸려 있어야 하고 주방의 식기들은 모두 가지런히 각을 잡아 배열되어 있어야 한다. 흐트러짐이 있는 날엔 어김없이 구타가 돌아온다. 그렇게 그녀의 삶은 매일이 지옥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틴과 로라는 요트를 타고 밤바다로 나간다. 알려진 일기예보와 다르게 그들은 폭풍우를 만나게 된다. 배가 격렬히 출렁이고 거의 뒤집힐 지경이 된다. 그런데! 거센 비바람과 사투를 벌이던 사이 로라가 사라진다. 마틴은 로라를 애타게 찾지만,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그녀가 입고 있던 구명조끼뿐. 로라가 익사했다고 판단한 마틴은 장례를 치른다. 하지만 이후 짜릿한 반전이 나온다. 이 모든 것이 로라의 치밀한 탈출 작전이었던 것. 평소 물을 무서워하던 그녀는 마틴 몰래 수영을 배워두었으며, 거사가 이루어지던 하루 전날 해변가의 가로등 전구를 모두 깨고 자신이 헤엄쳐 나갈 장소를 미리 표시해 두었던 것이다. 가슴 졸이며 마틴과 바다로 나간 로라는 천운처럼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바다로 몸을 던져 탈출에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녀의 운명은……<영화를 안 보신 분들을 위해 ‘후략’>]

1991년에 개봉한 미국의 스릴러 영화 <적과의 동침>의 초반부 줄거리이다. 현재 최소한 4학년 중반 이상을 지나고 있는 분이라면 어느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영화로 이 영화는 당시 대히트를 쳤다. 이미 귀여운 여인으로 유명했던 줄리아 로버츠가 ‘귀여운 척’을 던져버리고 변신했던 슬픈 ‘로라’, 텔레비젼 드라마 연기자 출신이었던 ‘패트릭 버긴’이 영화배우로 변신해 펼친 섬뜩한 ‘마틴’, 조셉 루벤 감독의 섬세하고 디테일한 연출력, 그 외에도 탄탄하고 짜임새있는 줄거리를 제공한 ‘낸시 프라이스’의 동명 소설 등은 이 영화 흥행의 일등공신이었다. 그렇다면… 음악으로 조금 눈을 돌려볼까? 이 영화의 모든 음악을 관장했던 영화음악의 거장 ‘제리 골드스미스’는 마틴의 병적인 집착과 광적인 편집증을 묘사하기 위해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사용했다. 영화 속에서 <환상교향곡>은 마틴이 좋아하는 음악이었다. 그는 아내와 동침을 할 때마다 하나의 의식처럼 이 곡을 틀었다. 그리고 탈출에 성공한 아내 로라를 숨막히게 추적해 그녀를 위협할 때 사용했던 음악 역시 <환상교향곡>이었다. 사실 <적과의 동침>의 배경음악으로 <환상 교향곡>을 사용한 것은 골드 스미스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과 <적과의 동침>사이에 흐르는 ‘정서적인 교집합’을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환상적인…무서운 교향곡>
<환상교향곡>은 프랑스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가 1830년에 발표한 대규모의 오케스트라곡이다. 이 작품은 베를리오즈의 연애사와 밀접한 관계를 하고 있어 유명한데 작곡배경을 살펴보면 왜 이 작품이 <적과의 동침>에 삽입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문학에 한창 빠져있던 27세 청년 베를리오즈는 어느 날 한 극단의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관람하게 되었다. 연극의 여주인공 ‘헤리엇 스밋슨’에게 첫 눈에 반한 베를리오즈는 용감히 프러포즈를 했지만 단칼에 퇴짜를 맞았다. 계속된 구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무반응이었다. 퇴짜는 당연했다. 헤리엇은 당시 소위 잘 나가는 연극 배우였지만 베를리오즈는 가난한 무명의 작곡가였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상당히 강했던 베를리오즈는 깊은 슬픔에 빠져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파리 근교를 배회하다가 탈진하여 의식을 잃게 되었다. 죽은 듯 잠에 빠진 베를리오즈는 기이한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꿈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환상교향곡>이다.
<환상교향곡>의 악보에는 이러한 글이 쓰여있다. “사랑에 미치고 인생이 싫어진 젊은 예술가는 아편을 마신다. 아편에 있는 독약의 양은 죽음에 이르기는 약해 깊은 잠과 꿈을 가져다줄 뿐이다. 그 속에서 예술가의 사랑이야기가 재현되어 환상적이고 무서운 결말로 이끌어간다.”

이러한 드라마틱한 상상을 바탕으로 한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은 모두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악장 <꿈, 정열> 이상형을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 젊은 예술가, 즉 극장에서 헤리엇을 보고 첫 눈에 반한 베를리오즈.
2악장 <무도회> 그녀를 무도회에서 만나고 싶은 로망이 있었던 것일까? 예술가는 무도회에서 그 여인을 만난다.
3악장 <전원의 풍경> 아!! 하지만 그녀에게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슬픈 마음을 억누를길 없어 무작정 도시를 빠져나와 전원으로 나왔지만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한다.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 실연의 아픔은 예술가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그는 음독자살을 시도하지만 치사량에 못미쳐 죽지 못하고 대신 무서운 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꿈 속에서 그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랑하는 여인을 죽이게 되고, 살인죄로 인해 단두대로 끌려가 최후를 맞이한다.
5악장 <마녀의 밤축제와 꿈> 예술가는 계속되는 꿈 속에서 처형을 당한 후 자신의 장례식에 난입해 악마들과 축제를 벌이는 마녀들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는다. 이런 기괴한 스토리가 배경이 되었다니. 베를리오즈는 이 곡을 두 번에 걸쳐 파리에서 초연하였는데, 신기하게도 연주는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이에 탄력을 받은 베를리오즈의 음악활동은 점점 더 영역이 커지게 되었고 그로부터 2년정도가 지난 후에 그는 스타 작곡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환상교향곡>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자 결국 헤리엇 스밋슨도 그 연주회를 보러 오게 되었다. 음…궁금하다. 베를리오즈는 자신이 이 곡을 작곡하게 된 배경에 대해 헤리엇에게 이실직고(^^) 하였을까? 이렇든 저렇든 베를리오즈는 그토록 짝사랑하던 헤리엇과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다. 앙큼한 헤리엇. 더 이상 무명 작곡가가 아닌 베를리오즈가 이제야 남자로 보였나보다. 아쉽게도 그들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그렇다. 베를리오즈가 헤리엇에게 퍼부었던 끊임없는 구애, 그럼에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던 사랑에 대한 좌절과 분노, 그 분노의 힘으로 펜을 들어 상상해 낸 기괴한 꿈 속의 예술가, 꿈 속에서 환각에 빠져 여인을 추적하던 예술가의 광기어린 모습, 이 모든 것들은 영화 <적과의 동침>의 주인공 마틴이 열연했던 편집증적이고 집착적인 모습, 끊임없이 쫓기던 로라가 질식할 듯 두려워하던 심리와 상당히 닮아있다.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과 <적과의 동침>은 정말로 ‘환상의 조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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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지 희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졸업(교육학 학사) / 미국 맨하탄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석사) / 한세대학교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박사) / 국립 강원대학교 실기전담 외래교수(2002~2015) / 2001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 이후 이태리, 스페인, 중국, 미국, 캐나다, 불가리아, 캄보디아, 베트남을 중심으로 연주활동 중 / ‘대관령 국제 음악제’, 중국 ‘난닝 국제 관악 페스티발’, 이태리 ‘티볼리 국제 피아노 페스티발’, 스페인 ‘라스 팔마스 피아노 페스티발’ 《초청 피아니스트》 E-mail: pianistkim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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