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March 29,Friday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 ‘정도전’

 

 

지난 이야기
고려말 상황은 무신정권과 원간섭기 180년 세월이 빚어낸 기득권 층의 횡포가 극심하던 시절이었고 게다가 자주독립이 요구되는 시절이었죠. 의지가 강한 공민왕은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내우외환이 겹쳐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소장파 성리학자들에게 고려개혁의 과제가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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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파 수재, 가시밭 길로 정치인생 시작
개혁의 화신 정도전은 필자가 열심히 자료를 찾은 조선시대 인물 중 한명입니다. 그의 출생과 현실개혁의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 같은 인물, 정도전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암울했던 고려말 1342년 충북 단양 도담삼봉 외가에서 정도전은 출생합니다. 정도전의 집안은 경상도 봉화 지역의 호장출신으로 지역의 유지입니다. 정도전은 공민왕 9년 1360년 18세의 나이로 소년 급제를 할 정도로 수재 였습니다. 급제 후 공민왕의 총애를 받는 청렴한 소장파 신진사대부 중 한명인 정도전은 이색학당 출신입니다. 정도전은 동문수학한 정몽주와 친구인데 5살 연상의 정몽주가 친구로 삼을 만큼 뛰어난 학문적 자질을 인정 받았습니다. 그러나 명분이나 경우에 어긋나는 사람에게 심한 상처를 주는 언사가 많아 적을 많이 만듭니다. 또한 가끔 말 실수를 하여 자신의 속내를 들키기도 하는데요 이런 성격으로 인해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태종 이방원에게 살해 당합니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에 동참한 정도전은 이상국가 건설의 꿈을 지닌 듯 합니다. 1370년 신돈의 개혁정책 당시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된 스승 이색을 따라 성균관 교수직을 역임하며 신진사대부 동료 및 선 후배를 만나 많은 인맥을 형성 하기도 했지만, 정도전이 32세가 되던 1374년 공민왕은 살해되고 정도전은 험한 가시밭 길을 걷게 됩니다.

공민왕은 몽고의 간섭을 거부하고 부원배를 소탕했고 친 명나라 외교를 펼칩니다. 그러나 공민왕이 죽자 권문세족의 수장인 이인임은 공민왕의 친명외교를 버리고 친 북원 외교를 추진 합니다. (한족들의 반란으로 북쪽 몽고로 쫓겨난 원나라를 북원이라 부릅니다) 고려가 친 북원 외교로 돌아섰다는 정보를 들은 명나라는 사신 채빈을 고려로 파견하여 진위를 확인합니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노발대발한 사실에 겁이 난 이인임은 사신 채빈을 죽이는 무리수를 둡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북원의 사신이 고려에 오자 신진사대부는 적극 반대하는데 정도전이 선봉에 서서 제일 극렬하게 반발합니다. 이인임은 정도전에게 북원 사신의 접대를 맞는 접반사에 임명하고 불응할 때 처벌할 계획을 세웁니다.

북원 사신의 접대를 맡는 접반사에 임명된 정도전은 이인임에게 말합니다. “소인은 북원 사신의 목을 베든지 아니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낼 것이니 각오하시오” 이인임은 분노하여 정도전을 귀양 보내면서 “천한 출생은 어찌할 수 없구나” 라고 했는데 이는 정도전의 모계가 천한 노비 출신인 것을 비꼬는 말 입니다. 정도전의 외증조모는 사찰의 노비 출신이고 외조모는 양반의 첩이 되었습니다. 정도전은 외가의 내력으로 인해 반대파의 조롱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큰 깨달음을 얻은 귀양생활
그러나 정도전은 귀양지인 전라도 나주 회진현 거평부락 소재동에서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정도전은 귀양지에서 쓴 [소재동기]에서 밝히기를 “백성들이 우매하다고 알았는데 양반들의 탐욕과 세상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참고 묵묵히 자신들의 직분을 다한다. 또한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불우한 사람들을 도울 줄 안다” 정도전은 삼봉집에 “임금과 관료는 백성을 위해 존재할 때만 가치가 있다” 라고 밝혔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본주의 사상입니다. 정몽주는 귀양간 친구 정도전에게 맹자를 보냈는데, 맹자에 소개된 역성혁명에 관한 구절을 읽고, 백성을 저버린 왕조를 교체하는 혁명사상을 기른 듯 합니다. 고려를 지키려는 정몽주가 보낸 맹자가 고려를 망하게 하는 씨앗이 되었으니 역사가 주는 교훈이 참 아이러니 합니다.

유배생활 5년 만에 수도 개경을 제외한 곳에서 살아도 좋다는 조건부 해배가 됩니다. 정도전은 인왕산 기슭에 삼봉재라는 서당을 열었는데 이인임 일파는 국가 정책에 반하는 불온 사상을 가르킨다는 죄를 만들어 삼봉재를 헐어 버립니다. 정도전의 분노는 뼛속까지 스머듭니다. 유배생활 9년 드디어 정도전은 유배에서 풀립니다. 정도전의 나이가 불혹을 넘었지만 그의 개혁사상은 더욱 불타 오르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평균 수명이 오십 남짓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참으로 대단한 집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도전의 승부수
1383년 유배에서 풀린 정도전은 승부수를 던집니다. 즉 자신이 못 가진 힘을 빌리러 함주 막사로 이성계를 찾아 갑니다. 당시 최영과 이성계 두 장군이 고려의 군대를 양분하고 있었는데 권문세족 출신의 최영과 신흥 무장세력 이성계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이성계를 선택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입니다.

1383년 함주(함흥) 막사에서 이성계를 만난 정도전은 “이런 군대로 무슨 일이든지 못하겠습니까?” 라고 운을 뗀 후 현실개혁에 대한 자신의 청사진을 제시한 것 같습니다. 두사람의 대화 기록이 없어서 확인 할 수 없으나 사흘 밤낮을 함께 했다는 기록으로 짐작하면 두사람은 의기투합한 것 같습니다. 힘과 이상의 만남, 무력과 사상의 만남으로 표현되는 이 사건은 역성혁명의 출발입니다.

이성계의 추천으로 관직에 복귀한 정도전은 책략가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 하는데요. 우선 최영 장군과 결합하여 이인임의 전횡에 대응하는 신진사대부 중용, 성인이 된 우왕의 친정체제 지원 등 개혁을 위한 초석을 놓고, 이인임의 전횡에 불안해 하는 우왕을 설득하여 어명에 의해 이인임 일파를 불시에 습격하여 참살합니다. 전광석화 같은 이 작전으로 권문세족은 힘 한번 못 쓰고 신진사대부 주도의 정국이 됩니다.

운명의 위화도 회군은 정도전의 책략 같은 생각이 듭니다. 위화도 회군이 있던 날 정도전은 이성계의 가족을 전부 함흥으로 대피 시킵니다. 이성계의 회군 소식을 들은 우왕은 즉시 이성계의 가족을 체포하려 했으나 허탕만 칩니다.

정국을 장악한 정도전의 개혁
위화도 회군 후 정도전 본인이 정국을 주도하자 민본정책인 계민수전을 (합법적인 소유토지를 제외한 전국의 토지를 국가가 몰수하여 실 경작자인 농민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제도) 선언하자 토지 소유자들의 엄청난 반발이 생깁니다. 신진사대부 전부가 중소 지주층 출신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개혁세력에 동참한 의식있는 권문세족 출신도 있었지만 정국 변화를 파악하고 당을 바꾸는 철새가 600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토지개혁 반대세력이 커지자 이색은 토지 주인과 농민이 반반씩 양보하는 절충안을 제시합니다. 스승 이색의 절충안을 정도전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도적질한 물건을 원주인이 찾으면서 도적과 합의해서 반반씩 나누는 법은 없다” 이런 정도전의 주장에 모든 백성들은 환호합니다. 이때부터 이색과 정도전의 사제 지간은 금이 갑니다.
하지만 항상 뜻을 같이 하던 조준의 설득에 못이겨서 결국 원안의 80% 정도 수용된 토지개혁안 과전법이 탄생합니다. 과전법이 공표되고 토지 문서를 사흘간 과전법으로 새나라 건국의 초석을 다진 것은 맞지만 이때부터 신진사대부는 급진 개혁파와 온건개혁파 두개로 갈라집니다. 권문세족이 사라지고 권력과 재산에 대한 욕심때문에 당이 쪼개지는 분당사태를 초래합니다. 그러나 힘을 가진 급진개혁파가 승리하고 조선이 건국 됩니다. 조선건국을 주도한 정도전은 건국 후 많은 일을 처리하면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하나씩 살펴봅시다.
1.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625년 전 정도전의 설계로 탄생했습니다. 도성 4대문 이름도 (숭례문, 흥인지문, 돈화문, 숙정문) 정도전이 지었으며 현재의 서울시내 주요 도로는 조선건국 당시 설계된 것입니다.

2. 조선의 정궁(법궁) 경복궁을 설계하고 경복궁의 4대문 이름과 (광화문,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 경복궁 전각 이름을 전부 정도전이 지었습니다. 경복궁은 중국의 자금성보다 25년 먼저 지었고 경복궁을 보고 감탄한 명나라 사신은 경복궁 설계도를 요구합니다. 명나라는 경복궁의 설계도를 가지고 20년 동안 자금성 공사를 했는데 현재 자금성은 동양 궁궐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자금성의 기본 구조는 경복궁과 일치합니다.
필자가 중국에 갔을때 가이드 하는말 “자금성은 동양궁궐의 모델이며 한국의 경복궁도 자금성을 모방해서 지었다”라고 합니다. 다른 한국 관광객도 그렇게 알고 있어서 필자는 조선족 가이드에게 엄청 항의 했습니다. 다음날 인터넷 검색을 한 가이드는 필자의 말에 동의는 했으나 명나라 기술자가 도움 줬거나 어떤 내막이 숨어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중화사상]에 물든 중국의 모습이 기가 막힙니다.

3. 조선 최초의 헌법 조선경국전은 정도전 작품인데 우리가 알고있는 조선의 헌법 “경국대전” 주요 내용 대부분은 조선경국전 내용과 일치합니다.

4. 요동정벌을 위해 지은 “진법”은 나중에 세종대왕의 극찬을 받고 군대 운용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600년 전에 정도전은 재상 중심주의 정치를 주장했는데, 세습되는 국왕이 계속 현명할 수 없으니 수십년 동안 행정능력이 검증된 사람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국왕은 재상 임명권을 가지도록 하는 제도인데 현재의 입헌 군주제와 비슷합니다.또한 민본주의 사상에 의한 부국강병을 추구한 정도전의 사상이 담겨있는 조선경국전 내용 하나 소개합니다.
“백성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순박하지만 속일 수 없다.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은 복종하지만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임금을 버린다”

* * 참고사항 시경 주아편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여 경복궁 이름을 지었는데 시경의 해당 구절을 소개합니다. [기취이주(旣醉以酒) 기포이덕(旣飽以德) 군자만년(君子萬年) 개이경복(介爾景福)],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의 말년은 복이 끝 없어라.
즉, “경복(景福)”은 끝 없는 행복” 이란 뜻 입니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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