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December 10,Tuesday

비가 내리고

아침나절임에도 도착해서 맞이한 서울의 하늘은 한마디로 우중충했다. 구름은 엉성하게 드리워 있었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부산함 사이로 바람이 지나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점의 시원함도 없었다. 바람 사이 가득한 물분자들은 금방이라도 비로 변해 쏟아 부을 태세로 한껏 긴장한 채 대기를 채우고 있었다. 짧은 거리를 움직이면서도 흐르는 땀으로 인해 등 짝에 셔츠가 달라붙는 찜찜함을 느끼며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2박 3일의 출장 기간 내내 높은 습도와 부옇게 흐린 하늘은 영 기분을 편치 못하게 했다. 그리고 일정의 마지막 날, 하늘은 마침내 참고 참았던 빗방울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쏟아지는 빗소리는 잠을 이루기 어렵게 했다. 기왕에 내리려면 하루라도 전에 올 일이지, 떠나는 날 겪어야 할 도로의 혼잡함과 비에 젖을 옷이 줄 눅눅한 느낌이 아침부터 맥이 빠지게 했다. 그리고 오늘은 출국 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지 않은가. 우산을 찾아야 했다.
전철역으로 걸어가는 중에 택시를 탔다. 아니, 택시가 나를 태웠다. 이동하기에 먼 거리여서 택시를 탈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손님을 구별하는 기사 아저씨의 민첩함이 내 귀찮음을 알아보고 재빨리 차를 세웠기 때문이다. 약하게 틀어 놓은 에어컨이 젖은 셔츠를 말려 주었다. 몸이 편해지니 차창 밖 주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부러 택시를 탄 것처럼, 비 오는 풍경을 보기 위해서 그랬던 것처럼 순식간에 주위의 모습에 빨려 들어갔다. 남산1호 터널을 넘어 돌아 가며 눈을 가득 채우는 남산 둔턱의 푸르름. 청명한 하늘 아래 보는 푸르름과 비 오는 날의 녹음이 가진 푸르름이 다른 색깔이라는 것을 아는지. 한남대교를 건너며 바라보는 한강의 물빛이 비가 오는 날이면 달라지는 것을 아는지. 한강 주변의 아파트들과 강남을 들어서며 만나는 높은 건물들이 비 오는 날이면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을 아는지.
도시는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이미지들은 마음 속에 그려지는 그림으로 우리가 환경에 대해 가지는 총체적 표현이다. 케빈 린치(Kevin Lynch)라는 사람이 있었다. 도시와 건축 환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피해 갈 수 없는 이름이다. 그는 미국의 도시계획가였는데 도시설계이론에 공공 이미지(public image)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도시가 주는 이미지의 구조와 특성은 무엇인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연구하였다. 그는 연구를 통해 우리가 장소에서 발견하는 시각적 이미지가 어떻게 무의식 가운데 하나의 도시 이미지가 되어 가는지 밝히고자 했다. 그런데 그가 말한 장소를 규정하는 물리적 실체 뿐 아니라 하늘도, 구름도, 그리고 비도 도시의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서울의 비와 호찌민의 비가 다른 이미지를 가진 것처럼 말이다.
호찌민의 비는 어떤 모습일까. 비가 오는 날 호찌민의 하늘을 어떠했나. 서울의 비는 정적(靜的)이다. 호찌민의 비는 동적(動的)이다. 호찌민에서 비로 인해 그려지는 도시의 이미지는 쏟아지는 빗 속에서 엔진을 돌려 움직이는 도시이다. 강한 도전이 있고 부딪힘이 있고 그 사이로 숨 쉬고 있는 일상의 냄새가 있다. 그에 비해 서울의 비는 추억, 연민, 그리움, 이런 단어들을 떠오르게 하는, 보다 정서적이고 감정적이다. 그리고 슬프다. ‘비처럼 음악처럼’이라는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오 그렇게 아픈 비가 왔어요

차가 논현로 쪽으로 방향을 틀며 속도를 떨어뜨렸다. 차들이 줄을 지어 서있다. 브레이크 등의 붉은 점멸이 빗 속에서 유혹한다. 차창에 빗방울이 붉게 번진다.
호찌민의 비에는 그런 유혹이 없다. 마주 보고 살아 가야할 도시 환경의 일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보다 역동적이다. 힘이 있다. 그래서 비가 내리면 우울하기보다는 시원하다. 여름날 무더위를 식혀주는, 쏟아지는 장대비를 지켜보듯 시원하다. 오래전 비 내리는 마당을 바라보며 하셨던 아버지의 말처럼, 쏟아 부을 때는 정말 ‘장(壯)하게’ 내린다. 그런 비를 바라보면 슬프고 우울한 마음도 덩달아 씻기는 듯하다.
호찌민의 비가 겪어 내야 할 삶의 한 단면인 것은 오토바이의 움직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오토바이가 그들의 일상이고 생활인 것처럼, 비도 그렇다. 그래서 오토바이들은 비를 구별한다. 달릴 수 있는 비가 있고 달릴 수 없는 비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쏟아지는 빗속을 달려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릴지라도 그들이 달리면 달리고 멈추면 함께 멈추어야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우기의 어느 날 자유 질주의 욕망을 마음껏 빗속에서 발산해 보고 싶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빗속을 뚫고 달리기 시작한지 불과 수분이 지나지 않아 고통과 더불어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이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를 따라야 한다. 때때로 질주 본능을 식히고 고가의 교각 옆에 기대서서 비가 멈추길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니 사람들이 멈춰서 우비를 꺼내면 여러분도 꺼내고, 비 피할 곳을 찾아 시동을 끈다면 여러분도 그렇게 해야 한다. 한국에서라면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오토바이도 그러하겠지만 무엇보다 나아갈 때와 멈출 때를 구별하게 하는 비가 없으니까. 하지만 거꾸로 호찌민에는 당신이 떠나던 그 밤을 떠올리며 가슴을 애절하게 하는 비가 없다. 붉은 빛으로 번지는 앞 차의 브레이크 등을 바라보며 핸들을 잡는 매디슨 카운티 다리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비가 없다. 그렇게 도시를 가름하는 이미지가 다르다.

저 멀리 산자락에 구름이 피어 오른다
도착했어요, 손님.
기사의 목소리가 그만 깨어 나야지 하는 소리로 들린다.
어느덧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비가 가늘어졌다.
이제 곧 개일 모양이다.

앞서 언급한 케빈 린치는 ‘도시의 이미지(The image of the city)’라는 저술을 통해 도시를 시각적인 그것에서 이미지를 가진 도시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공공 이미지로 느끼는 공통의 요소를 분석하고 이로부터 추출한 물리적인 형태를 구역(district), 가장자리(edge), 통로(path), 랜드마크(landmark), 교점(node)라고 분류하여 도시 이미지의 5대 요소라 구분하였다. 이런 이미지들을 통해 사람이 도시를 기억하게 된다고 말한다. /夢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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