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3,Tuesday

조선건국, 파벌싸움

지난 이야기
우리나라 최초의 당파싸움에서 패배한 권문세족은 일부만 살아남고 대부분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두번째 당파싸움에서 패배한 신진사대부 온건파는 낙향하여 100년 동안 성리학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여 다시 권력에 도전합니다. 이른바 사림파의 등장입니다.

1,392년 신진사대부 강경파는 대비 안씨를 (공민왕의 후비 안씨) 겁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가 고려 제35대 국왕으로 등극합니다. 이성계는 민심을 의식하여 궁궐에서 생활하지 않고 집에서 출퇴근 합니다. 일국의 국왕이 출 퇴근한 사례는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또한 등극 당시에 “모든 법과 제도는 고려의 것에 따른다”라고 선포하여 자신은 역성혁명을 한 것이 아니라 천명에 의해 선양을 받아 고려를 통치하는 것으로 포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즉위 한달 후 조선건국을 선포합니다.
고려말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온건 개혁파 두 세력을 차례로 제거하고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의 역성 혁명파는 조선 정국을 재편하면서 내부에서 반대파가 생깁니다. 즉 당내에 대립하는 비주류 계파가 생겼는데요 정도전을 중심으로 하는 주류 계파에 불만을 가진 비주류 계파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이들 비주류는 두 종류가 있는데 첫번째 부류는 조선이 건국 되면서 신진사대부 온건개혁파가 전향한 경우이고, 두번째 부류는 눈치 빠른 고려 권문세족들이 권력의 향배에 따라 움직인 철새 정치인들 입니다. 이러한 철새들이 나중에 태종 이방원과 함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주류파들을 죽이고 정권을 탈취하게 됩니다.

조선건국 후 이성계는 처음부터 자신을 따른 신진사대부 강경파 중심의 권력구도를 만듭니다. 이는 당연한 수순이지만 비주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함께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느끼게 됩니다. 게다가 신진사대부 강경파의 핵심 정도전은 권문세족 출신의 철새들을 싫어하여 요직에서 배제하고 견제합니다.
권문세족 출신의 철새 중 대표적인 인물로 하륜을 들 수 있는데, 고려말 부패정치의 대명사 이인임의 조카 사위가 하륜입니다. 하륜은 매우 눈치가 빠르고 영리하여 이인임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고 고려말 권문세족들의 부패가 극심했던 상황을 유추하면 하륜의 부정축재는 상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진사대부 강경파가 이인임 일파를 죽이고 권문세족이 몰락하자 하륜은 이색학당에서 동문수학한 정몽주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합니다. 정몽주의 도움으로 살아난 하륜은 신진사대부 온건파의 일원이 되었으나 이번에는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살해 당하고 신진사대부 온건파도 몰락합니다. 다시 조준의 도움으로 하륜은 정치생명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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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직한 개혁가 정도전은 철새 정치인 느낌을 주는 하륜을 당연히 좋아하지 않았고 머리 좋고 눈치 빠른 하륜은 때를 기다립니다. 새로운 국가의 기초를 다지는 일을 추진하면서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선언하는데 이는 엄청난 파장을 부릅니다. 사병이란 권세가의 힘을 의미하는데 왕족과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군대는 국가 통솔로 일원화 하려는 것입니다. 게다가 정도전은 사병을 군대에 흡수 시켜서 요동정벌을 계획합니다. 무신정권 시절 생긴 사병제도는 많은 폐단을 노출시켜 공민왕 시절부터 폐지를 계획했습니다. 게다가 이성계는 건국에 공이 많은 이방원을 제쳐두고 어린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는데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하륜이 아닙니다.
세자책봉과 사병혁파 두개의 난제에 봉착한 이방원을 찾아 가서 하륜은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데 이방원이 대단히 만족했다고 하니 하륜의 처세술이 대단합니다. 야사에 소개되기를 하륜이 관상을 잘 보는데 이방원은 왕의 상을 타고나서 주군으로 모실 결심을 했다고 전합니다. 조선건국 초기를 대표하는 인물 하륜과 정도전은 이렇게 대립하게 됩니다.
조선건국 초기의 인물 중 조준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조준은 하륜 못지않은 명문가의 권문세족 출신이며 성리학을 공부한 성리학자 이지만 이색학당 출신은 아닙니다. 조준 자신은 권문세족 금수저 출신이지만 권문세족의 부패가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괴롭히는 원인으로 보고 신진사대부 혁명파와 뜻을 같이 합니다. 권문세족 중 신진사대부 혁명파 인물은 조준이 유일 합니다. 위화도 회군 후 백성들의 토지를 수탈한 좌군 도통사 조민수를 탄핵하여 곧은 성품을 드러낸 조준은 토지개혁을 시행할 때도 농민을 위한 제도가 옳지만 혼란을 막기 위해서 신진사대부 온건파의 의견도 20% 정도 수용하고 협상을 이끌어 냅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정도전 보다는 조준이 성숙된 정치를 한 것 같습니다.

조선건국의 영웅이자 국왕의 아들 이방원의 지원을 받은 하륜은 권문세족 출신들을 포섭하는데 이들 권문세족들은 대부분 사병을 가지고 있었고 정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라 쉽게 하륜과 뜻을 함께 합니다. 그러나 조준은 중립을 지킵니다. 비록 정도전의 요동정벌, 태조 이성계의 세자 책봉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지만 신중한 처신을 합니다.
조준의 묵시적 동의를 받은 하륜은 사병을 거느린 많은 권문세족 출신들의 도움을 받아 조선건국 6년 후 1398년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세자 방석을 죽입니다. 이른바 제 1차 왕자의 난 입니다. 이로써 신진사대부 혁명파의 주류 세력들은 치명타를 입고 사라집니다. 정도전은 조선건국을 계획했고 건국 후에는 경복궁 설계와 한양 도성의 사대문과 기본 도로망 등 새 국가에 많은 실적을 남기고 그렇게 사라집니다. 왕자의 난 2년 후 1400년 즉위한 태종 이방원은 자신이 왕자 시절에 그렇게 반대했던 정도전의 사병혁파 정책을 실시합니다. 왕과 왕자의 입장 차이일까요? 아무튼 태종 이후 우리나라에 사병제도는 사라집니다. 또한 정도전이 주장했던 재상 중심주의 정치 제도는 태종의 아들 세종때 재상들의 합의 기구 의정부 서사제로 부활됩니다.
이렇게 신진사대부 개혁파 주류 세력들이 사라지고 이합집산의 세력집단이 정권을 잡습니다. 이들은 태종 세종 치세를 지나고 세조의 왕위 찬탈 사건인 계유정난 후 “훈구파”라고 부릅니다. “훈구파”란 공신책봉을 받은 “훈신들의 집단” 이라는 뜻 입니다. 이들 훈구파는 새롭게 등장한 사림파와 100년간 치열한 정권 투쟁을 합니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의 강력한 왕권 중심주의는 신하들의 권력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들 세종의 치세까지 염두에 두고 공신과 외척을 제거합니다.
신진사대부 혁명파의 주류들이 사라지고 권력을 잡은 세력들 중에 권력 지향적인 권문세족 출신과 일부 신진사대부 세력들이 포진하여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군 태종 이방원은 권력을 나누지 않는 성격이죠. 눈치가 빠른 하륜은 고려말 자신이 누렸던 권력을 포기하고 재산 축적에 집중합니다. 하륜은 말년에 부정축재로 탄핵을 많이 받았으나 금상 태종의 즉위에 대한 공로를 인정 받아서 처벌을 받지 않고 천수를 누리다 갑니다. 영리한 하륜은 태종이 경계하는 군권을 멀리하고 외척이 되는 것도 거부한 덕분에 와석종신을 합니다.

현대의 정치와 비교하면 하륜이 부도덕한 정치가 같지만 600년 전에는 하륜이 처세를 잘한 정치가 입니다. 그러나 조준은 고려말 권세를 누리던 권문세족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이상국가 건설의 꿈을 실현합니다. 조선건국 후에도 자신은 권력에 집착하지 않고 재산 축적에도 초연한 삶을 삽니다. 이러한 조준도 정도전과 멀어지고 하륜과 가까워진 것을 보면 정도전 보다는 하륜이 처세를 잘한 것일 수도 있겠죠. 하륜과 조준은 죽을 때까지 친하게 지냅니다.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에 “하조대”가 있는데 하륜과 조준이 노년의 여유로움을 즐긴 곳입니다. 동해 물결과 암석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공신 책봉이 많았는데요 이들 공신은 수십 만평의 토지와 면세의 특혜을 받고 많은 노비까지 받았습니다. 게다가 공신 책봉을 여러번 받은 경우도 많아 고려말 권문세족을 연상시킵니다. 사실은 조선초 훈구파에는 고려말 권문세족들과 그 후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해를 따라가는 해바라기 처럼 권력을 따라가는 권력 바라기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공신들이 “훈구파”의 씨앗이 되어 도덕정치를 강조하는 “사림파”와 100년간 치열한 권력투쟁을 합니다. 영원한 권력은 없듯이 강력한 “훈구파”도 사림파에 패배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다음 시간에 조선초 공신의 종류와 훈구파 형성과정 그리고 사림파의 성격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다음 이야기
새로운 나라 조선이 건국되고 혼란기를 거치면서 많은 공신들을 양산하는데 이른바 “훈구파”의 탄생입니다. 다음 시간에 공신책봉과 훈구파의 형성과정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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