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October 21,Monday

권문세족의 몰락

공신들은 수백만평의 토지와 수백 명의 노비를 소유하고 세금면제 병역면제,
게다가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까지 가졌으니 가히 조선은 공신들의 나라입니다.

지난 이야기
조선건국 초 혼란기에 있었던 네 번의 공신책봉은 훈구파 탄생의 씨앗이 됩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삶이 무너질 정도로 심한 것은 아니었고 태종의 강력한 왕권강화 정책으로 공신들의 전횡도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태평가를 부른 세종 문종 치세를 지나 세조때 부터는 본격적인 공신의 세상이 됩니다. 성종때 등장한 사림파는 부패해진 훈구파와 치열한 권력투쟁을 예고합니다.

당파싸움의 휴식기와 한명회
고려 말부터 조선건국 초기까지 치열한 세 번의 당파싸움 끝에 정국은 잠시 휴식기를 가집니다. 태종의 잔인한 공신숙청과 외척제거를 경험한 대신들은 경제적 부를 누리며 조용히 삽니다. 우리는 세종대왕의 치세를 태평세대라 부르는데 이는 권력투쟁 없는 행정의 안정기를 뜻하는 말도 됩니다. 견제세력 없는 권력은 부패하기 쉬워 부패의 싹이 틉니다. 반대 세력이 없는 정치 속에서 권력에서 멀어지거나 경제적 부를 축적하지 못한 양반들은 반전 기회를 잡아야 하는데 평화 시기에는 방법이 없어 때를 기다립니다.
문종이 승하하고 12살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때를 기다리던 소외된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어린 임금이 등극하면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데 단종은 어머니 할머니 모두 없어서 12살 어린 나이로 직접 정사를 살피는 친정을 합니다. 임금이 무능하면 권력을 탐하는 무리가 생길 것이고 심지어 왕위 찬탈까지 넘보는 사람도 생깁니다. 건국 60년 만에 조선은 또 혼란기를 맞이합니다.

이러한 혼란기에 한명회가 등장합니다. 우선 한명회에 대해 살펴봅시다.
1415년 고려의 옛 수도 개성에서 태어난 한명회는 20년간 과거에 낙방한 공부와 거리가 먼 사람인데 공부와 지략은 다른 것인 모양이네요. 공부 머리와 사업 머리가 다른 것과 비슷합니다. 계속된 과거 낙방으로 한명회는 음서로 관직에 진출합니다. 1452년 단종 즉위년 한명회는 말단 종9품 경덕궁 궁지기로 있었는데 경덕궁이란 태조 이성계가 살던 개성의 잠저입니다.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주택을 잠저라고 함) 한명회와 관계된 일화 하나가 있는데요, 한명회는 개성 벼슬아치들의 모임인 ‘개성계’에 가입하고 싶다고 말했다가 ‘경덕궁 궁지기도 벼슬이냐’ 라는 비아냥거림을 듣습니다. 훗날 한명회가 출세하자 ‘개성계원’들은 후회를 했고 이사건 후 자신이 좀 유리하다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개성계원’(어리석은 사람이란 뜻) 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조선 초 ‘분경’이란 제도가 있었는데 권력가에게 인사 청탁을 하러 찾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두 왕숙의 자택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단순한 인사 청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황보인과 김종서는 모든 대신과 종친들의 분경을 금지시킵니다. 큰 꿈을 가진 수양과 안평 두 왕숙은 거칠게 항의합니다. ‘분경은 옛날부터 존재한 미풍양속인데 금지하는 것은 인간의 정을 없애는 것’이라고 합니다. 권력자 입장에서는 친한 사람 벼슬 주는 것이 인정이라고 표현하지만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악법입니다. 인사 청탁 뒤에는 뇌물이 있을 것이고 뇌물을 주면 본전 생각에 백성들 고혈을 짭니다.
‘분경’과 짝을 이루는 ‘수령고소 금지법’은 조선의 대표적인 악법입니다. ‘수령고소 금지법’은 백성들이 함부로 지방 수령들을 고소하게 되면 관청을 업신여기고 백성들이 윗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태종 때 만든 법입니다. 세종 치세에 대간들이 수령고소 금지법의 폐지를 여러 번 상소했으나 세종은 ‘부왕께서 만드신 법이니 함부로 고칠 수 없다’라며 존속시킨 법입니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과 감시받지 않는 지방관입니다. 태종때 만든 ‘신문고’ 수령의 비리는 고소할 수 없었습니다. 1453년 한명회는 친구 권람의 소개로 수양대군과 만났고, 분경과 수령고소 금지법을 악용한 한명회는 수양대군 측근들을 만들어 꿈을 이루어 갑니다.
1453년 10월 10일 한명회의 주도로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국의 판세를 뒤집어 버립니다. 곧이어 위화도 회군 후 다섯 번째 공신 책봉이 있었는데 ‘정난공신’입니다.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세웠다는 뜻입니다. 계유정난 2년 후 수양대군은 단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7대 세조 임금으로 등극합니다. 당연히 또 공신 책봉을 합니다. ‘좌익공’ 즉 왕이 될 사람을 도왔다는 뜻인데 태종의 정사공신 좌명공신 두 번의 사례와 비슷합니다. 다만 세조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후 ‘적개공신’ 이란 공신책봉을 하여 태종보다 한 번 더 공신책봉을 했습니다. 그 후 예종 때는 남이의 옥사사건 후 여덟 번째 공신책봉인 익대공신 책봉이 있었습니다. 위화도 회군 80년 만에 여덟 번의 공신책봉, 10년에 한 번씩 무더기로 특권층을 양산합니다. 바야흐로 조선은 공신들의 나라 특권층을 위한 나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고려의 권문세족과 다름없어진 조선의 공신들
세조는 공신들의 권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자신의 정통성 때문에 한계를 느낍니다. 공신 중 홍윤성은 무식하여 사람을 때려죽이기를 여러 번 하였습니다. 한번은 홍윤성이 이조판서로 있을때 숙부가 아들의 벼슬을 부탁하자 홍윤성은 ‘논 20 마지기를 주면 벼슬을 주겠소.’라고 합니다. 서운한 숙부는 ‘옛날 네가 어려울 때 도와준 은혜도 모르느냐’라고 화를 내다가 홍윤성에게 맞아 죽습니다. 홍윤성의 숙모가 고발을 했으나 형조에서는 접수도 거절합니다. 억울한 숙모는 세조가 온양 온천에 행차할 때 어가에 뛰어들어 억울함을 고합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세조는 불같이 화를 냈으나 결국 홍윤성을 처벌하지 못합니다.

세조에게 공신은 필요악입니다. 정통성 없는 정권을 세우고 지탱하는 것은 공신이라고 세조는 생각합니다. 세조는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왕실 종친 구성군 이준을 등용하는 등 공신 견제도 했는데 큰 소득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태종을 좋아한 세조였지만 능력은 다른가 봅니다. 단종을 죽이고 등극한 자책감과 공신 견제를 위해 세조는 중앙집권과 애민정책을 많이 시행합니다. 세조는 공신 정리를 못하고 죽습니다. 태종처럼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고 아들 예종에게 왕위를 넘깁니다.
만 18세의 나이로 등극한 조선 8대 임금 예종은 아버지 세조가 허용한 분경을 금지시킵니다. 그러나 공신들은 공공연히 인사 청탁을 주고받으며 분경금지법을 무시합니다. 견제세력 없는 공신들의 횡포를 막을 길이 없는 예종은 애꿎은 대간들을 처벌합니다. 공신들의 불법을 탄핵하지 않은 죄를 물어 처벌한 것인데 대간들도 공신들이 무서워 감히 탄핵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세조 아들 예종 모두 강력한 왕권을 통한 부국강병을 희망했으나 공신들의 힘을 누르지 못합니다. 게다가 공신끼리 권력 충돌이 생깁니다. 이른바 구공신 신공신 충돌로 알려진 남이 장군 역모사건입니다. 공작정치의 원조인 구공신들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적개공신이 된 젊은 남이 장군을 모함하여 역모로 만듭니다. 젊고 경험 없는 예종은 남이 역모사건을 해결한 구공신들을 익대공신으로 책봉합니다. 조선의 8번째 공신책봉입니다. 그리고 예종은 즉위 1년 3개월 만에 죽습니다.

1469년 13세 어린 성종이 조선 제 9대 임금으로 즉위합니다.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는 21세에 요절하고 월산군 자산군 두 아들을 두었는데 성종은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산군입니다. 숙부 예종도 20세에 요절하고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당시 4세 형 월산군은 15세로 대권 후보가 전부 미성년자입니다. 당시 성종의 장인은 절대 권력자 한명회인데 성종은 장인의 후원을 입고 등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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