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5,Thursday

당쟁과 백성의 삶

지난 이야기
조선건국 당시 시행된 과전법은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소하는 백성을 위한 법입니다. 조선건국 후 80년간 백성들의 삶이 고려 왕조 보다는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조선건국은 권력을 위한 쿠데타, 또한 백성을 위한 쿠데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공신들은 오로지 권력을 위한 쿠데타를 일으켜 백성들의 삶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훈구파의 등장입니다.


자영농 체제의 조선
신진사대부가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65년 지난 1453년 계유정난으로 어린 단종은 왕권을 상실하고 수양대군이 사실상 국왕 노릇을 합니다. 계유정난부터 세조와 아들 예종 치세까지 16년의 짧은 기간에 무려 네 번의 공신책봉이 있었는데 이전의 공신들과 다른 성향을 나타냅니다. 또한 성종 즉위 2년에 국왕의 의지와 상관없이 “좌리공신” 이라는 9번째 공신책봉을 하는데 15세의 어린 국왕 성종도 속으로는 불쾌감을 느낀 듯합니다.조선건국 초기 공신은 자신들의 권력욕도 있었지만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하는 개혁(과전법)을 시행하여 자영농 체제를 만듭니다. 수확량의 20% 정도 납세하고 80% 정도는 농민의 몫이 되니 농민들은 고려왕조 보다 훨씬 나은 삶을 유지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건국 80년 후 공신들의 횡포로 백성들의 삶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 했습니다.

공신들의 전횡과 수탈
계유정난부터 성종의 친정이 시작된 1476년 까지 23년간 일어난 공신들의 횡포를 조금만 살펴보겠습니다. 훈구파 공신들은 권력을 남용해서 고리 사채를 주고 돈을 못 갚으면 농민의 토지를 강탈 합니다. 토지를 빼앗긴 양민을 살길도 막막하고 또한 공신들의 협박에 못 이겨 노비로 전락 합니다. 이렇게 늘어난 토지는 농장이 되고 늘어난 노비는 농장을 관리하는데 고려말 권문세족들과 비슷한 형태가 됩니다. 또한 공신들은 분경을 통한 인사 청탁으로 뇌물을 받고 뇌물을 준 지방 수령은 본전 찾기에 바빠서 백성들의 고혈을 짭니다. 훈구파 공신들의 횡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향촌의 사림들이 소유한 토지까지 탐을 냅니다. 드디어 사림들은 훈구 대신들과 전면전을 선포합니다. 물론 전국의 토지가 권문세족의 수중에 있던 고려 말처럼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비슷한 조짐이 일어나는 징후가 있자 사림들이 나서게 됩니다. 여기에는 부패한 훈구 대신들을 대체할 세력을 바라는 백성들의 열망도 한몫합니다. 지금은 정치 지망생의 출마 의지와 국민의 지지가 있으면 충분하지만 5백 년 전 조선시대는 국왕의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세가지 여건이 충족된 시기가 성종 치세에 발생합니다. 13세 어린 나이로 등극한 성종은 7년간 수렴청정 과정을 거쳐 20세에 친정을 합니다. 수렴청정 기간 7년 동안 성종은 왕권을 능가하는 훈구 대신들의 권세를 실감합니다.

사림파의 등장
즉위 7년에 친정을 시작한 성종은 훈구파 대신들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중용합니다. 그러면 학교에서 배운 사림, 사림파는 어떻게 생긴 용어 일까요? 사림은 숲속의 선비를 뜻 하는데 향촌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총칭하는 의미입니다. 또한 사림파는 이들 사림들의 결합체를 의미합니다. 이는 훈구파에 대비되는 용어로 자리매김한 것 입니다. 전국의 사림을 묶어서 사림파 라고 표현한 것 입니다. 사림파는 비슷한 학문 이념을 가졌으나 훈구파 처럼 정치적 동질성이 없어 훗날 사림파는 사색당파로 분열이 됩니다.
조선건국 당시 많은 온건파 신진사대부는 새왕조 창업을 거부하고 향촌으로 내려가 학문 정진과 후학을 양성하며 때를 기다립니다. 그중 포은 정몽주의 학풍을 이어받은 “야은 길재”는 경상도 선산 금오산으로 (현재의 구미 금오산) 낙향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 하는데 그 중에 “김숙자”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김숙자는 아들 “김종직”에게 성리학을 전수했는데 훗날 김종직은 사림의 종주로 추앙 받습니다. 김종직은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 걸출한 제자들을 양성하고 성리학 중흥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입니다. 김종직의 인물됨과 그 영항력을 감지한 성종은 함양군수 김종직을 3품직 승문원 참교에 임명하고 대간의 역할을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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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제신” 신하가 신하를 견제하다.
또한 성종은 재위 9년 1478년 홍문관을 신설하여 사림을 대거 등용하는데 홍문관은 세조가 폐지시킨 집현전을 부활시킨 것 입니다. 홍문관은 학문연구와 탄핵의 기능을 지니고 있어서 사림들은 홍문관을 “옥당”으로 부르면서 홍문관에 근무하는 것을 선비 최고의 명예로 생각 했습니다. 이때부터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세 부서를 “삼사”라고 부르고 선비들이 동경하는 직책이 됩니다. 이렇게 사림들을 삼사에 등용한 성종은 사림이 훈구대신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깁니다. 성종은 “이이제이”를 모방한 “이신제신” 즉 신하가 신하를 견제하는 묘수를 쓴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은 고려말 권문세족들의 횡포를 견제하려고 공민왕이 신진사대부를 등용한 것과 비슷 하지만 부패의 정도가 고려말 보다는 훨씬 덜 심각한 초기에 대응한 점이 다릅니다. “역사는 반복되면서 발전한다.” 라는 이론이 적용된 사례라 하겠습니다. 당시 성종이 취한 정책은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하기 쉽지가 않은데 성종을 성군이라 칭하고 성종 치세를 태평성대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훈구파들은 백성들 고혈만 짜낸 것이 아니라 예종과 성종 초 왕권을 농락하고 전횡을 일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8세의 젊은 예종이 등극하면서 분경을 금지 시켰으나 훈구파 공신들은 어명을 아예 무시하고 공공연하게 분경으로 축재를 합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감찰기관에서 이를 알고도 공신들이 무서워서 함구합니다. 국왕 예종도 공신들의 권세를 두려워 하여 공신들 잘못은 거론 못하고 분경금지법을 어긴 공신들을 탄핵하지 않은 대간들만 직무유기로 처벌합니다. 또한 공작정치로 신 공신 남이 장군의 역모를 조작하여 젊은 예종을 위협합니다. 아마도 예종은 단종 폐위 사건을 상상한 듯합니다.

한명회의 탄핵
13세 어린 나이로 등극한 성종은 이러한 공신들의 횡포를 느끼며 때를 기다립니다. 성종 2년 한명회를 필두로 훈구 대신들이 수렴청정 하던 대왕대비를 윤씨를 꼬드겨서 좌리공신 책봉을 단행 합니다. 15세 어린 성종도 훈구 대신들의 욕심에 의한 공신책봉 이라고 느낍니다. 하지만 예종과 성종 두명의 임금을 사위로 둔 권세가 한명회를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성종 6년 11월 18일 수렴청정을 비판하는 익명서 사건을 계기로 성종 7년 1월 14일 처음으로 직접 정사를 돌보는 친정을 합니다. 성종은 급하게 서둘지 않고 시간 싸움을 하며 공신들의 힘을 제거합니다.
세조의 공신 구치관 신죽주가 죽고 성종의 친정을 요구하는 익명서 사건 때 한명회는 성종의 친정을 반대하고 대왕대비 윤씨가 수렴청정을 계속할 것을 요구하는데 상소 내용이 가관입니다.
“대비께서 정사를 돌보시어 만백성을 편안케 하셨는데 이제 백성들을 버리려 하십니까 대비께서 수렴을 거두시면 신은 대궐에서 마음 편하게 술도 먹을 수 없나이다”
성인이 된 성종의 입장에서 보면 분통이 터질 상소내용 입니다. 당연히 젊은 대간들은 한명회를 탄핵하는데 성종은 한명회가 입궐할 때마다 “대간들의 탄핵은 장인의 충심을 모르고 한 것이니 괘념치 마소서” 하면서 술상을 차려 주고 “과인의 술이 불편하십니까” 라고 합니다. 이는 신하의 입장에서 죽을 맛이죠 이렇듯 성종은 대간의 탄핵에 의해 공신들을 파면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신들 스스로 물러나게 만드는 묘안을 짜냅니다. 가히 성군의 자질을 갇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 임금을 얕보다 한명회는 현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중세세계에서 선진적인 면모를 보여준 조선왕조
성종 9년 1478년 집현전을 부활시켜 홍문관을 만들어 신진학자들을 양성합니다. 또한 성종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 대간들을 양성하여 훈구파를 견제합니다.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성종은 언론 활성화 및 언론자유를 법제화 합니다. 즉 간쟁 봉박 등 비판이나 반대할 자유를 준 것 입니다. 젊은 학자들의 언론자유는 훈구파 공신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제대로 합니다. 이러한 젊은 사림들의 행동이 못 마땅하여 훈구파 공신들이 제약을 가한 사건이 “4대 사화” 입니다.
조선의 언론 자유는 500년 전 외국에서는 사례를 찾기 힘든 선진화된 제도 입니다. 조선건국 후 200년 동안 조선 백성들의 생활은 이웃 나라들에 비해 나쁘지 않았고 정치제도 역시 좋은 제도를 많이 갖추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시대 당쟁을 매우 나쁘게 생각하여 “조선은 당쟁 때문에 망했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그것은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역사를 폄하하고 우리에게 민족적 열등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일본이 교육시킨 식민지 사관일 뿐 올바른 역사적 평가가 아닙니다. 민주주의 정치를 하는 현대에도 정치적 견해 차이가 존재하고 정치 이념의 차이로 정당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조선시대 당쟁은 정치적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이 현재와 다릅니다. 조선 후기에는 상대편을 죽이는 극단적인 방법이 동원됩니다. 이것 역시 민주주의 이전의 다른 국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조선시대 당쟁은 일차적으로 말로써 토론 및 반대의견을 제시하고 국왕의 판단을 요청한 점에서 당시의 서양 및 일본의 경우보다 문명화된 성격을 지닙니다. 과거 서구 및 일본의 정쟁은 무력을 동반한 대규모의 전쟁으로 나타나서 애꿎은 백성들만 엄청나게 죽습니다.


다음 이야기
조선시대 당쟁에 의한 정권교체와 중국 일본 등 이웃나라 정치제도 정권교체 등을 비교 분석 하겠습니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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