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October 21,Wednesday

완성된 제도와 쇠퇴의 시작

지난 이야기
조선건국 후 100년 동안 조선은 언론자유, 권력견제 등 중세시대 제도 치고는 비교적 선진화된 제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생활도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서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갈수록 백성들은 고달픈 삶을 삽니다. 권력자의 탐욕이 백성들의 몫을 빼앗고 벼슬아치와 양반들을 위한 사회로 변해가는 조선입니다.


세계적 수준의 기록문화
역사기록은 세계 수준급의 기록을 자랑합니다. 그중에서도 조선왕조 실록은 독보적인 기록 문화를 자랑합니다. 중앙정부에서 상세한 내용을 기록하다 보니 잘한 것과 잘못한 것 전부 여과없이 기록됩니다. 이렇게 상세한 역사기록을 근거로 일제는 우리역사의 잘못된 점, 어두운 면을 강조하여 우리민족에게 열등감을 심는데 주력 했습니다. 이렇듯 잘한 점과 못한 점을 상세하게 기록한 역사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잘못된 사례만 집중하면 민족을 비하하는 근거로 악용되기도 합니다. 잘한 것과 잘 못한 것을 모두 기록하는 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원칙이며 또한 역사 왜곡이 없었다는 뜻도 됩니다.
조선왕조 실록은 국왕 열람을 금지하고 있어 기록의 공정성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권교체 후 실록을 수정하는 경우 과거의 원본도 함께 보관하여 후손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합니다. 중국의 경우는 황제가 역사기록을 열람한 후 수정 삭제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과거의 기록을 폐기하기 때문에 기록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우리의 기록문화는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에 현재 11건 등록되어 있으며 중국은 7건, 일본은 3건, 등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와 다르게 중앙의 기록이 거의 없고 지방영주가 기록한 것 혹은 개인적인 기록만 있어서 왜곡의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한 일본은 무사정치 이므로 기록문화의 발달이 더딘 것입니다.
일본 전국시대 말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이 모시던 주군 오다 노부나가의 일대기 “신장공기” 집필을 지시하는데 이는 중앙에서 작성한 몇 안되는 기록입니다. “신장공기” 기록으로 일본 정치사를 살펴 봅시다. 당시 일본의 사찰은 면세 혜택을 받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조총을 생산하여 판매하는 등 경제적 이득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종교 부패 척결을 위해 사찰에 세금을 부과합니다. 그러자 교토에 있는 엔라쿠지 절에서 세금 부과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선동합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반란의 주범 및 선동자는 물론이고 반란 당시 같이 있었던 일반 신도 남녀노소를 불물하고 전부 학살하는데 당시 살해된 사람은 2만명이 넘는다고 “신장공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란의 단순 가담자는 가벼운 처벌에 그치고 반란의 주범만 처형하는 조선과는 다른 일본입니다.

전쟁없는 정권교체가 가능했던 조선
중국은 반란의 주범을 처벌할 때 반역자의 주변 사람들 전부를 죽입니다. 9족 10족을 연좌하여 처벌하므로 반역자 한명이 있으면 100명 이상 연좌되어 함께 죽습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 처럼 의도적인 숙청을 할때는 억울한 사람 100명 이상이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본처럼 단순 가담자나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로 죽이지는 않습니다. 일본은 연좌제는 없으나 단순 가담자 같은 장소에 있었던 사람 다 죽입니다. 오랜 세월을 이런 통치 환경에서 산다면 통치자나 리더의 의사에 반대하기 힘든 국민성을 가지게 됩니다.

일본에는 특이한 관습이 있는데 바로 “무례토” 입니다. 쇼군이나 영주에게 무례한 말이나 행동을 했을 경우 호위무사는 그자리에서 목을 베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무례토” 즉 무례한 사람을 토벌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권력자에게 공손하고 예의바른 행동만 강요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조선처럼 반대할 자유가 없습니다. 일본인 시각으로 보면 국가 원수에게 물러나라고 데모하는 우리는 전부 “무례토” 대상입니다. 물론 조선시대에 모든 백성들이 언론자유와 반대할 자유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언관들의 언론자유는 자연스럽게 일반인들의 의식 속으로 스며 들었습니다.

조선은 일본과 다르게 전쟁없는 정권교체가 가능한 국가입니다. 사림파들이 훈구파를 몰아내고 집권당이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현대정치와 비슷합니다. 실제로는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투쟁하지만 백성들을 위해 투쟁하는 것 처럼 포장해서 정권교체를 이룹니다. 지금의 정치인들도 잘 사용하고 있는 방법입니다.

다시 15세기 후반 조선의 성종시대로 돌아갑시다. 훈구파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해 홍문관 설치와 사림파 등용을 추진한 성종은 유교국가의 기틀을 세웁니다. 성종 본인이 유학에 심취해 있었고 훈구파 사림파 구분없이 유교정책에 찬성하는 입장이라 유교정책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충돌을 완화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양반중심의 유교정책이라 훗날 백성들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국가의 제도를 완성시킨 군주-성종
성종이란 명칭은 국가의 제도를 완성시킨 군주를 뜻 하는데요 이는 조선이 건국되고 100년 후 제도가 완성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수정하여 조선의 헌법 “경국대전”을 반포 합니다. 조선건국 당시 만든 조선경국전은 일반 백성과 지배층의 이익을 함께 배려 했는데 경국대전은 기득권 층의 이익을 중심으로 만든 법 입니다. 즉 조선은 양반중심의 사회로 변화되어 갔으며 일반 백성들의 불이익을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신분제도의 변화가 심했는데 조선건국 당시 신분제도는 양민과 천민 두계급 밖에 없었고, 양민은 세금납부 의무를 지는 대신에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 했습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양반은 동반(문관)과 서반(무관) 합쳐 부르는 명칭이고 양반이라는 신분은 없었습니다. 즉 양반은 벼슬을 가지고 있는 사대부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성종때 부터 신분 제도는 양반, 중인, 평민, 천민 등 4계급으로 분화를 시작했고 지금의 고시에 해당하는 대과는 양반들만 응시할 수 있도록 변경됩니다. 이는 조선건국 당시 개방된 정치가 특권층을 위한 전유물로 변경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사림파의 등장은 조선사회를 변화 시킵니다.

당시 사림파는 인간의 신분은 하늘이 정한 것이라 신분에 맞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훈구파 역시 자신들에게 유리하므로 사림파의 의견에 동조하여 조선을 퇴보 시킵니다. 600년 전 조선은 다른 국가보다 앞서가던 신분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더 발전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맙니다. 하지만 사림파는 100년 동안 공부한 이론을 바탕으로 나름 강직한 정치를 하고자 합니다. 훈구파의 지나친 공신책봉으로 붕괴 조짐을 보이는 과전법과 관직을 사유화하여 발생하는 매관매직에 대한 사림파의 견제입니다.

백성에게 부담으로 다가온 부메랑-선비우대
유학자들은 성종을 성종대왕이라 부르며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이라 칭송합니다. 성종은 유교국가의 정착을 목표로 삼고 선비를 우대하는 정책을 많이 시행합니다. 양반들은 자신들을 배려하는 임금이 고맙겠지만 성종때 만든 선비우대 제도는 향후 백성들에게 고통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구체적 사례를 살펴보면, 조선 초에는 양인 개병주의 원칙에 따라 노비를 제외한 모든 국민은 병역 의무가 있었고 또한 납세의무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종때 슬그머니 양반들의 병역의무가 사라지는데 그이유는 과거를 준비하는 가난한 선비들이 과거 준비에 집중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병역면제와 한시적 조세면제의 혜택을 줍니다. 이때부터 병역면제는 특권층의 권리로 변하여 조선 후기에는 병역의무를 지느냐 아니냐에 따라 신분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요즘도 특권층은 옛날 처럼 병역과 납세의무 면제를 당연시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사림들의 본거지 향촌의 자치질서인 향약을 존중하여 향음주례, 향사례 등의 경비 추렴을 인정 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서원의 횡포로 발전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수단으로 변질됩니다. 신분상 강자인 양반에게 특권까지 부여해서 조선후기 백성들은 고통 속에서 삽니다.

이러한 선비우대 정책과 성종의 지원에 자부심을 가진 젊은 사림들은 훈구파 공신들의 비리를 탄핵 합니다. 훈구 대신들은 삼사의 젊은 관료들이 눈에 가시처럼 불편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지원을 받는 사림파를 제거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38세의 젊은 나이에 성종이 승하하고 19세 어린 연산군이 등극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려고 사림파를 등용했으나 오히려 삼사 관원(대간)들에 의해 휘둘리는 부왕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성종은 세종대왕을 모범군주로 생각하여 대간들의 주장이 못마땅하여도 참고 들어주는 경우가 많았지만 연산군은 달랐습니다. 연산군도 등극 초에는 나름 임금 노릇을 잘하려고 노력 했지만 대간들의 지나친 간쟁이 연산군의 심기를 건들게 됩니다. 게다가 사림파의 기를 꺾을 기회를 엿보던 훈구파 대신들이 연산군을 충동질 합니다. 이른바 4대사화 발생의 시작입니다.


다음 이야기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사림파는 정계 진출 20여년 지나서 첫번째 시련에 직면하게 됩니다. 즉 4대사화의 발생입니다. 네번의 사화로 수천명의 사림파 선비들은 죽거나 귀양을 갑니다. 4대사화중 첫번째 사화인 “무오사화” 다음 시간에 살펴봅시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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