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5,Thursday

모닝 클래식

아침에 자리에 앉으면 부산했던 출근시간의 부대낌을 기억 뒤로 던지고 아침 탁자에 향 좋은 커피 한잔을 두고 싶었다. 클래식 음악을 나지막이 틀어 놓고, 할 수만 있다면 오랫동안 보관해온 LP판을 꺼내 음악을 들으며, 디지털 음향이 줄 수 없는 소리의 미세한 긁힘을 느끼고 싶었다. 느린 선율을 따라 천천히 블라인드를 걷고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일상의 시작과 도시의 풍경들을 바라보며 사는 일과 세월이 흐르는 일의 이치를 생각해 보고 싶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라면 내 앉은 키보다 한 뼘 더 높은 의자에 깊이 몸을 파묻고 앉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가죽의 냄새와 내 체온이 섞이는 아지랑이를 빗소리 속에 그려보고 싶었다. 그런데 꿈이다.

출근과 동시에 쌓이는 결재서류들. 왜 아침마다 올라오는 결재는 모조리 ‘urgent’라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지. 들어오는 비용의 서명은 가물에 콩 나는 듯한데 나가는 돈의 서명은 왜 산만큼 높아지는지. 그것이 월말의 아침이라면 이달의 수입과 지출을 따지며 살림이 어떠하지 살펴야 하고 금고를 열고 남은 돈을 계수하며 그 쌓은 크기에 따라 한숨과 안심 사이를 반복하며 오락가락하는 현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아침을 달구는 회의들. 매일 아침 무언가의 문제점을 들어야 하고, 그 안에 섞인 하소연을 파악해야 하고, 작든 크던 어떤 결정을 해야만 하는 아침의 일상은 지레부터 지친 마음으로 시작된다. 때로는 “그냥 네 마음대로 결정해” 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와 나만의 우아한 세계로 빠져 들고 싶지만 그건 우리의 직무 목록에 없는 용어이다. 그러니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면 꾹 참을 수 밖에.

창밖이라도 보고 기분 전환을 하려고 블라인드를 걷으면 아침의 태양은 어쩜 저리도 강한지.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나 또는 겨울이라 할지라도 이 아침은 또 어쩜 저리 한결같이 밝은지. 내 집무실 쪽으로 세워진 큰 건물 때문에 이제는 거리 풍경도 보기 어려워졌는데 하필 그 건물은 왜 경찰국인지.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왜 에어컨은 평소와 달리 차가운 바람을 쌩쌩 잘도 뱉어 내는지. 상상 속에 그리는 낭만과 여유의 아침과 현실의 아침은 어쩜 이렇게 연결되는 고리 하나 없이 다른지.
꿈도 등급이 있어 전혀 터무니없는 꿈을 개꿈이라 한다. 그러면 이런 아침을 그리는 상상은 개상상이라 해야 옳겠다. 개들에겐 미안하지만 그들이 이 글을 읽을 기회는 없을 테니 미안하더라도 단어 앞에 개를 붙이는게 느낌이 확실하겠다.
이런 상상 속의 여유와 현실을 억지로라도 연결하기 위해 커피 한잔을 마셔 보려 해도 언젠가부터 민감해진 내 위장은 커피를 허락하지 않는다. 내게 모닝 커피는 아침에 다가오는 한 잔의 여유가 아니라 속 쓰림으로 가는 인도자이니까. 그럼 음악은 어떨까. 서설과는 달리 나는 보관하고 있는 단 한 장의 LP판도 없거니와 음악을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실무에 뛰어든 이후로 음악을 가까이해 본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보다는 아무 소리 없는 정적을 더 사랑하니까. 그러니 정적과 고요를 기대하는 아침의 평화는 애당초 내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아침, 짧은 메시지 하나가 나를 멈추게 했다. 그 메시지에는 음악과 음악가에 대한 소개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음악 파일 하나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 파일을 실행시키기까지는 2, 3일이 더 필요했다. 이 분주한 현실 속의 아침 메뉴에 음악이라는 메뉴를 하나 더 추가함으로써 그러잖아도 번잡한 일상을 더 번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반은 메시지 내용의 흥미로움으로, 다른 절반은 그 메시지를 보내준 이에 대한 신뢰로 파일을 실행시켜 보았다. 그것이 내 아침 속에 클래식이 들어온 첫날의 이야기이다.
청년 시절에는 클래식을 나름 들었지만 그것은 애써 찾아 듣고, 애써 시간을 만들어 들었던 ‘체’하기 위한 어떤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지금은 오히려 짧은 시간 속에서 더욱 풍성한 그림을 보는 것과 같았다. 음악을 듣는 몇 분 여의 시간 속에 나는 종달새가 나르는 모습을 보았고, 뒝벌이라는 벌도 알게 되었으며, 잊고 있던 셰헤라자데의 끝없는 이야기도 다시금 펼쳐 보게 되었다. 정말로 그것은 마치 고막의 공명을 통해 마음으로 펼쳐 보는 신기한 그림 이야기와도 같았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이야기가 있어도 그것의 끝은 고요했다. 평화로웠다. 어떻게 그다지 즐기지도 않던 음악 속에서 헤매어 찾던 정적의 순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일까.
아침마다 배달되는 선물 꾸러미의 제목이 ‘모닝클래식’이다. 문득 이 아침에 소개가 하고 싶어 졌다. 지금 듣고 있던 곡, 엘가(Edward Elgar)의 ‘사랑의 인사(Salut d’Amour)’가 마음을 열고 그럴 수 있도록 안내해 줬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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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작은 법이다. 변화도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내 아침의 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물론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러나 계절의 변화가 없다면 어떠한가. 건물이 창 앞을 가리면 어떠한가. 불과 몇 분의 멈춤 가운데 음악이 만지어 내는 정적의 공간 안에 머물며 현실과 꿈 꾸는 세계를 평온 가운데 걷는 일이란, 지금은 마실 수 없는 아침의 향 좋은 커피 한잔을 마시는 기분으로 음악을 한잔 마시는 일과도 같다.

기왕에 얘기를 꺼냈으니 소개말을 더하자. 아침마다 음악을 전해주는 메신저 김지희님은 씬짜오베트남에도 음악칼럼을 연재하는 씽글클럽 회원의 한 분이다. 클래식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를 했고, 그것을 자기의 철학으로 소화해 내고 표현하는 분이다. 그가 보내 주는 메시지는 짧은 음악에 대한 소개로부터 시작된다. 배경의 이야기를 쉽고 편안하게 전한다. 가르치지 않고 나눈다. 그리고 듣게 해준다. 일반인에게 어렵게 여겨질 수 있는 클래식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지에 대해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의 재능은 음악을 통해 정적의 공간을 만들어 가는 놀라움을 경험하게 했다.
‘김지희의 모닝클래식’이 준 기쁨이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 모닝클래식을 이끌어 가는 그녀의 부지런함과 그것을 지속할 성실과 이 일을 전혀 가볍지 않도록 적당한 밸런스를 취하는 경륜에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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