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October 1,Thursday

밧당 전투(Trận Bạch Đằng; 938)

전쟁을 통해 배우는 베트남의 역사 제4탄

응오귕(Ngô Quyền)과 남한(Nam Hán)과의 혈전

베트남 토착 세력들은 중국의 지배기간 동안 저항하는 과정에서 오늘날의 게릴라전과 유사한 전투방식을 개발, 습득했다. 이번 호에는 서기 938년 중국의 압제에 대항하여 대대적인 봉기를 주도했던 응오귕 장군이 남중국 일대를 지배하던 남한의 군대를 밧당 전투에서 대파한, 응오귕과 남한의 혈전, ‘밧당 전투’를 소개한다.

밧당 전투(Trận Bạch Đằng; 938)
밧당 전투는 중세 베트남이 아직 정식국호가 없었을 당시 응오귄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 수군이 남한(Nam Hán;중국 5대 10국 가운데 하나)의 군대를 밧당 항에서 격파한 사건이다. 뾰족한 나무말뚝 꼭(cọc)을 박아 절반 이상이 죽고 남한의 황태자 르우 호앙 타오(Lưu Hoằng Tháo) 역시 그의 칼에 희생된 이 격렬한 해전은 중국지배 1천 년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 베트남 전쟁사에 길이 남을 대사건이다. 응오귄(吳權)은 이후 남한(南漢)의 간섭을 뿌리치고 베트남 최초의 독립왕조인 응오(吳) 왕조를 건립한다. 한편 응오귕 장군은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에 비견되는 명장으로, 후세 사가들은 그를 일컬어 왕중왕(Vua của các vua)으로 부르곤 한다.

시대적 배경(Hoàn cảnh)
서기 907년, 당이 멸망하고 중국은 마침내 5대 10국 시대를 맞게 된다. 이때 광동을 장악했던 나라가 남한(Nam Hán;南漢)이었고, 이즈음에 베트남을 통치했던 집안은 쿡(Khúc, 曲)씨 일가였다. 이 둘은 한동안 후량에 머리를 조아리다 중원의 혼란이 가속화되자 독립을 선언한다.

남한의 1차 침공
당시 베트남보다 몇 배나 강력한 남한은 내분을 이용해 베트남 지역까지 병합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남한은 930년, 베트남을 침공해 쿡씨 세력을 대대적으로 몰아내고 하이구엉(Hải quân) 지역을 병합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 남한은 1년 만에 베트남 토착세력의 반격으로 베트남에서 쫓겨나고 만다. 즉, 931년 증딘응에(Dương Đình Nghệ) 장군이 군사를 모집해 남한군을 몰아내고 자주권을 회복한 후 스스로 절도사라 칭한다.

남한의 2차 침공
하지만 얼마 못되어 그의 심복 끼우꽁띠엔(Kiều Công Tiễn)는 그를 죽이고 절도사 자리 찬탈한다. (937년 4월) 그러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그의 수하장군 응오귄(Ngô Quyền)은 끼우꽁띠엔을 치려 했고, 그는 다급해진 나머지 남한에 원병을 청한다. 한편 남한의 르우응임(Lưu Nghiễm) 왕은 이때야말로 베트남 지역을 정복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아들 르우호앙타오(Lưu Hoằng Tháo)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2만의 군사와 함께 베트남을 공격하게 한다. 당시 남한군은 대라성과 가까운 하이몽(Hải Môn) 지역에 진을 치고 끼우꽁띵의 병사들과 합세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때부터 남한군은 파멸을 자초하게 된다. . .

*응오귕은 . .
응오귕(Ngô Quyển. 898년~)은 하따이성 출신이다. 민간전승에 의하면 응오귕을 임신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거대한 독수리가 자신의 품속으로 날아오는 꿈을 꾸었으며, 어느 날 이 마을을 지나가던 한 눈 먼 노인이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응오귕을 보며 장차 우리 민족을 구할 영웅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이후 세월이 흘러 랑 (Ràng, 탄호아 성) 마을, 쿡 가문의 수하 장군이었던 증딘응에(Dương Đình Nghệ)가 병사 3천 명을 훈련시키며 거병을 준비할 때 응오귕도 동료들과 함께 합류하고 마침내 그의 눈에 들어 사위가 된다.

응오귕, 내부 반란자 처단하다!
한편 거병을 결심한 응오귕 장군이 자주독립의 의의 깃발을 높이 들자 뜻을 함께하는 영웅호걸들이 앞을 다투어 속속들이 쩌우아이 지역으로 집결했다. 응오귕은 병사들을 이끌고 그 즉시 대라성으로 쳐들어갔으며, 이내 그곳을 점령했다. 그는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반역자 끼우꽁띵을 붙잡아 참수하고 대라성 꼭대기에 그의 머리를 매달았다.

멋진 전략, 화끈한 대승(mưu tài đánh giỏi;대월사기전서)
광주에서 출발한 남한의 원정군은 해로로 베트남에 도착한 후 응오귕 장군의 군대를 공격하려고 했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다가오자 응오귕 장군은, “남한의 수군은 강하지만 그들을 이끄는 사령관은 그는 아직 젖먹이에 불과하다. 또한, 병사들은 이곳까지 오느라 지친 상태다. 그러므로 아직 승산은 있다”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잠시 후 그는 병사들을 시켜 미리 날카로운 나무말뚝을 밧당강 하류에 박고 남한의 수군을 그곳으로 유인했다. (Mượn cọc nhọn và thuỷ triều)
그의 계략대로 불과 몇 척의 작은 배들로 자신을 맞으러 나온 것을 보자 남한군은 가소롭다는 듯 그들을 쫓아 밧당(白藤, Bach Dang)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마침 만조라서 물도 불어났기에 남한군은 순조롭게 진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응오귕 장군은 미리 밧당강에 뾰족한 쇠심이 달린 나무 말뚝을 촘촘히 박아놓은 상황이었고, 일부로 만조일 때 남한군을 밧당강으로 유인하면서 간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물이 빠지고 말뚝으로 인해 남한군의 전함은 기동불능에 빠졌고, 응오귕의 군사들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틈타 작은 배들로 남한군을 섬멸(사망자만 절반 이상)할 수 있었다.

남한은 이 패배로 베트남 정복을 포기하고 곧바로 퇴군을 명했다. 한편 이듬해인 939년, 응오귄은 꼬로아(Cổ Loa, 지금의 Đông Anh, Hà Nội)에서 왕위에 올랐으며, 바로 이때가 바로 베트남 독립 원년으로, 오왕조가 시작되는 때다. 참고로 이후 1288년 쩡흥다오(Trần Hưng Đạo) 장군 역시 원나라 군대를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전술로 그들의 대부분을 수장시켜 명성을 떨친 바 있다.

사가들의 평가
대부분의 사가들은 응오귕 장군의 밧당강 전투와 독립선언의 의미를 높이 사고 있다. 즉, 이 전투로 베트남은 1,000여 년간의 중국지배를 종식시키고 독자적인 국가를 세울 수 있었으며, 이로써 동남아에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중국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다 해도 1,000년 이상에 달하는 기간 지속되었던 중국의 지배로 인해 베트남 사회에는 중국의 영향이 너무 깊숙이 침투해 있었고, 이에 따라 토착 사회에도 중국과 연계된 세력이 적지 않아 베트남 독립왕조가 걸어가야 할 길은 험난했다. 또 각 정치 집단 사이의 경쟁과 지역 간 대립도 치열했다. 즉, 939년 오(吳) 왕조가 성립된 이래 1009년 이조(李朝)가 들어서서 비로소 베트남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게 되기까지, 베트남에는 십이사군(十二使君)의 동란시대, 딘 (丁) 왕조시대, 띠엔레 (前黎) 시대 등을 통해 격변을 겪어야 했다.

다음 호에는 송나라와의 1차 항쟁(981년)에 대하여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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