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December 14,Saturday

전근대사회의 명암 – 4대 사화

지난 이야기
500년 전 중세사회에 다른 국가들이 가질 수 없었던 언론자유를 가졌던 조선은 분명 선진화된 국가 였습니다. 또한 뛰어난 기록문화의 영향으로 좋은 점과 나쁜 점 모두 기록하여 자세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의 이웃나라 지식인들은 조선의 언론자유를 부러워 했습니다.
그러나 부작용도 생겨서 선비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른바 4대사화 발생입니다.

대간과 언관
대신들의 비리나 부패에 대하여 비판하고 탄핵할 권한을 부여받은 관리를 대간 혹은 언관이라 부릅니다. 대간들은 훈구파 대신들의 탄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왕에게도 거침없이 독설을 퍼부을 때가 많았습니다. 성종때 대간들의 언론 자유를 제도화 했는데 이는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새로운 제도가 연착륙 하기도 전에 국왕에 대한 비판과 대간들에 대한 탄핵이 심했습니다. 때문에 당시 “대간권력” 이라는 용어가 생겨 나기도 했습니다. 당시 훈구파 대신은 물론 임금인 성종 조차도 대간들의 비판이 두려워 행동을 조심 했습니다.
대간들의 언론자유를 훈구파 견제 수단으로 삼던 성종 자신도 대간들의 지나친 비판과 간쟁을 싫어 했지만, 성종은 세종대왕을 모델로 삼아 성군의 길을 가고자 했던 임금이라 대간들의 심한 비판을 견디고 참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성종을 지켜보던 연산군은 세자 시절부터 대간들의 극성 스러운 비판과 탄핵을 싫어 했습니다. 여기서 사림파의 첫번째 시련 “무오사화”가 잉태됩니다. 성종은 38세의 젊은 나이로 임종했는데 성종이 마음에 둔 후계자 진성대군은 성종 임종 당시 6세의 어린이 입니다. 성종은 어쩔 수 없이 19세의 세자 연산군에게 옥좌를 넘겨 줍니다. 아마도 성종이 10년만 더 살았다면 연산군은 임금이 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연산군은 세자시절 뛰어나지도 않았고 모자라지도 않았던 행동을 했고 말이 없는 성격입니다. 아버지 성종은 가끔 아들 연산군이 왕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연산군이 세자시절 어머니 폐비 윤씨에 대한 사연을 대충은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힘이 없는 연산군은 내색을 하지않고 살다가 즉위 후 어머니 살해사건의 전모를 파악한 후 천천히 복수를 실현한 것 입니다. 연산군도 처음에는 나름 보통 임금의 행보를 하다가 사림파 대간들의 지나친 반대 혹은 비판에 감정적 대응을 합니다. 이러한 배경을 참조하여 조선건국 후 큰 희생을 치른 권력투쟁인 4대사화 중 첫번째 사화 “무오사화”의 발단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사림파VS훈구파
1494년 12월 24일 성종이 38세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세자 “융”이 조선 제10대 임금으로 등극하니 그가 바로 연산군 입니다. 연산군은 할머니 인수대비의 바람대로 부왕 성종의 수륙재를 지내고자 했는데 대간들이 극렬하게 반대합니다. 연산군은 화가 끓지만 아버지 성종도 어쩌지 못한 대간권력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때 훈구파 대신의 거두 노사신은 “집안 일이라 무방하다”라며 고립무원의 연산군을 지원합니다. 당시 훈구파 대신들은 대간 권력을 경계하는 기류가 흐르고 있어서 훈구파 대신들과 국왕의 결합으로 여겨집니다. 국왕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당시 대간들의 권력은 엄청납니다. 이제 대간들의 화살은 노사신에게로 향해서 노사신에 대한 사림파 대간들의 엄청난 공격이 시작됩니다.
또한 아버지 성종의 묘호를 성종이냐 인종이냐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자 연산군은 성종으로 결정합니다. 이번에는 사림파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성종의 묘호를 인종으로 변경 하라고 집단으로 상소를 올립니다. 젊은 연산군은 유생들의 반발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고 주모자를 하옥하고 조사합니다. 연산군은 자신이 내린 결정을 뒤집고자 반대하는 유생들에게 “윗전을 능멸하는 풍습을 고치겠다” 라며 강경 대응을 한 것입니다. 이제는 대간들이 집단 항의를 합니다 “선비들의 언론자유를 억압하는 조정에서 일할 수 없다” 라고 하면서 삼사의 대간들은 전부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연산군은 분노 했지만 현실에 굴복하여 대간들과 타협하여 대간들을 복직 시킵니다. 그러나 당시 [윗전을 능멸하는 풍습을 고치겠다]라는 연산군의 말은 사림파 살육의 예고 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묘지를 이장 하고자 했는데 이번에도 사림파 대간들의 반대에 직면합니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묘지 이장 사건은 연산군에게 분노를 심어 준 듯 합니다. 이처럼 당시의 사림파 대간들은 거침이 없었고 양보하는 법이 없었죠.

이러한 여건 속에서 훈구파 대신들은 연산군과 무언의 결합을 하게 됩니다. 또한 훈구파는 젊은 연산군을 충동질하여 사림파는 임금의 정적이라는 의식을 연산군에게 심어 줍니다.
연산군은 즉위 후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1498년 까지 4년 동안 대간들과 힘 겨루기를 많이 합니다. 관리임명, 소장처리, 심지어 사소한 처리까지 대간들은 결사 반대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간들은 나름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임금과 훈구파 대신들 입장에서는 대간들이 심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연산군은 나름 정치 감각이 발달된 사람이라 대간들에게 집중된 권력을 견제하려고 훈구파를 이용한 사례가 많습니다.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려고 사림파 대간들 이용한 것과 반대로 연산군은 사림파 대간들을 견제하려고 훈구파 대신들을 이용한 것 입니다.

무오사화의 단초 김일손 사초사건
드디어 “무오사화”의 단초가 제공됩니다. 고려말 조선건국을 거부했던 신진사대부 온건파의 학풍을 이어 받은 사림파 대간들은 명분론에 집착한 나머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림파의 생각이 사초에 기록되어 사건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은 사초에 문제가 되는 기록을 합니다.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가 죽고난 후 세조는 아들의 후궁 권씨를 탐내서 불렀으나 후궁 권씨가 거절하여 가지 않았다고 기록했으며, 단종과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시신을 강과 바다에 버렸다 등 소문에 의한 내용을 사초에 다수 실었는데, 소문에 의한 내용을 사실처럼 확신하고 기록합니다. 즉 야사에 기록될 내용을 실록 편찬에 기초가 되는 사초에 기록한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초의 기록이 공론화된 것은 실록청 당상관 이극돈이 김일손의 사초 기록을 유자광에게 말했고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전달하여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이극돈은 왜 김일손이 기록한 사초의 내용을 유자광에게 전달 했을까요? “이극돈은 세조비 정희왕후의 상중에 기생과 가까이 했다” 라는 내용이 사초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극돈은 개인의 사생활을 기록한 것은 부당하다고 삭제를 요청했는데 김일손이 거절합니다. 이극돈은 개인적 감정으로 고발의 달인 유자광을 시켜 무오사화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훈구파와 사림파의 권력 투쟁을 감안하면 사림파를 공격할 빌미가 생긴 훈구파는 이극돈의 기생사건이 아니라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진노를 부른 유자광의 보고
유자광의 보고를 받은 연산군은 진노하여 김일손의 사초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국왕은 사초나 실록을 열람할 수 없는 법률을 제시하며 반대하는 신하들 때문에 연산군은 사초를 보지 못합니다. 대신에 요약 정리본을 받아 본 연산군은 처음에 직접 조사를 하다가 유자광에게 조사를 넘기고 사건의 철저한 규명을 지시합니다. 사림파 대간들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던 유자광은 사건 확대를 계획하고 조사하던 중 문제의 “조 의제문”을 발견하고 연산군에게 보고 합니다. 우리가 한번쯤 들어본 김종직의 “조 의제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나는 꿈에 초회왕을 만났는데 역적 항우가 나를 (회왕)을 죽여서 강물에 던졌다. 회왕은 나(김종직)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런 내용인데 단종이 죽은 날에 맞춰서 글을 쓴 것은 세조를 역적에 비교했다는 유자광의 해석입니다.
당연히 사건은 확대되고 김종직의 제자들은 전부 잡혀서 추국을 당합니다. 이미 사망한 김종직은 부관참시 당하고 김종직의 3대 제자 중 김일손은 참형, 김굉필 정여창은 추국장에서 고문을 당한 후 곤장을 맞고 유배생활을 합니다. 정여창은 유배생활 6년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곧이어 일어난 갑자사화때 부관참시를 당합니다. 그리고 김굉필은 평안도 희천에 귀양을 갔는데 조광조를 만나 제자로 받아 들입니다. 연산군 다음 임금인 중종때 도학정치를 펼친 조광조는 이렇게 귀양온 김굉필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전수 받습니다. 6년간 조광조를 가르치던 김굉필은 1504년 갑자사화에 연류되어 참수형을 당합니다. 그외 김종직의 제자 50여명은 죽거나 귀양을 갑니다. 이렇게 사림파는 엄청난 타격을 받고 삼사의 대간들은 활동이 많이 위축됩니다.
이극돈이 단초를 제공하고 유자광이 주역으로 활동하여 일어난 무오사화는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실상은 연산군이 훈구파를 이용하여 성가신 삼사 대간들을 제거한 사건 입니다. 무오사화는 감독 연산군, 주연 유자광이 활약했는데 배우는 감독이 시키는 역할을 하는 법입니다.

다음 이야기
무오사화의 주연 유자광은 사림파에 사무친 원한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 이유를 살펴보고 무오사화 후 조선의 정치 변화를 살펴 보겠습니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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