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October 31,Saturday

‘비극의 탄생’ – Friedrich Wilhelm nietzsche

니체의 일화를 먼저 소개하자. 바젤 대학에서 고대 문헌학 교수로 재직할 때 니체의 일화 중 유명한 ‘방패 이야기’다. 니체는 여름방학 동안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방패에 대한 묘사를 읽어오라는 숙제를 냈다. 방학이 끝난 첫 수업 시간에 니체는 한 학생에게 아킬레우스의 방패에 대한 묘사를 읽었는지 물었다. 그 학생은 읽지 않았으면서도 읽었다고 대답했다.
“좋아. 그러면 우리에게 아킬레우스의 방패에 대해 한번 묘사해 주게나.”
곧 바로 침묵이 이어졌고, 니체는 10분 동안 열심히 경청하는 모습으로 교실을 왔다 갔다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니체는 말했다.
“아주 잘했네. OO군이 우리에게 아킬레우스의 방패를 설명해 주었으니, 이제 계속 수업을 하도록 하지.”

869년 4월, 스물네 살의 니체는 바젤 대학의 고전어와 고전문학의 촉탁교수로 위촉된다.
이곳에서 연구한 학적 결과물이자 니체 최초의 저작이 바로 ‘비극의 탄생’이다. 책은 발간 직후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나 책 내용 중에 다소 과격한 논리 전개와 생소한 주장으로 인해 기존 학자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게 된다.
그들을 분노케 한 내용은 주로 신화적이고 자연적 인간을 찬양한 그리스 비극의 극적 요소가 이성적이고 도덕적 인간 즉 소크라테스적 인간이 양산 됨으로 인해 집단, 사회적 인간상으로 굴절 되었고 그로 인해 세계는 크게 왜소해 졌다는 주장 때문이다.
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소크라테스는 사물의 본성을 규명한다는 것은 가능하다는 신념을 지니고 지식과 인식의 만병통치의 약효를 인정하며 오류야말로 악덕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적 인간에게는 논증을 철저히 기하고 진정한 인식을 오류와 가상과 구별하는 것이 가장 고귀한 사명, 유일하고 진정한 인간의 사명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개념, 판단, 추리의 메커니즘은 이렇게 해서 소크라테스 이래 다른 모든 능력보다 높이 평가 받게 되어 자연 최고의 활동, 자연의 가장 경탄스러운 선물로 간주되었다. 이 발산은 주로 천재의 생산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산파술적이고 교육적인 감화를 고귀한 청년들에게 입힘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하며 니체는 ‘그리스 세계’의 종말을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리스가 이룬 세계에 대한 날 선 비판이자 전면적인 부정이었으나 앞 뒤를 조금이라도 깊게 본다면 오히려 고대 그리스가 일구어 놓은 세계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으며 그 세계에 대한 동경에서부터 그의 비판은 기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 세계, 이 세계의 치맛자락을 우리가 외경스러운 마음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그것은 가장 커다란 행복으로 우리에게 생각되는 그런 세계”라 하며 우리는 모두 그리스에서 왔으며 우리 모두는 그리스인이라 주장한다.

“거의 모든 시대가, 거의 모든 문화단계가 한 번 정도는 반드시 그리스인에게서 해방되고자 몸부림쳤다. 왜냐하면 그리스인 앞에 서면 자기에게서 나온 모든 것, 언뜻 보아 완전히 독창적인 것, 그리고 진정으로 감탄할 만한 것들이 갑자기 색채와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 같고 실패한 모사품으로 아니 희화로 움츠러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질투, 중상모략, 격분이라는 어떠한 독에 의해서도 저 자족적인 장려함은 파괴되진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인은 마부처럼 우리들의 문화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들의 고삐를 쥐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스 세계는 심연을 알았기 때문에 표면을 사랑했다.”
심연을 겪지 않은 표면은 허황되고 표면 없는 심연은 허무하다. 말하자면 그리스는 깊은 고통을 겪은 뒤 표면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표면적인 세속성 안에서 심연을 함께 볼 줄 알았다. 비극에서 일어나는 잔인성과 패륜, 범죄와 부도덕의 표상은 오랫동안 인간 내면에 숨겨진 원형이었음을 그들은 이해했다는 말이겠다. 그렇게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삶의 바닥이 아니라 바닥에서 다시 뛰어 오르는 시작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비극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은 그라운드를 정초하려는 나쁜 습관이 있다. 바닥이 다져져야만 어엿한 삶이 될 수 있다는 착각 말이다. 삶에 무게가 없듯이 깊이도 없다. 고귀한 삶과 위대한 삶이 따로 있지 않은 것처럼 바닥이 정초된 삶은 애초에 없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반이라 부르는 삶의 조건들은 내가 살아가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라운드가 없는 삶에서 깊은 퍼스펙티브가 생겨난다. 한국을 떠나 살거나 월급이 나오는 회사를 떠나게 되면 삶은 나락으로 떨어질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우리를 그라운드 위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왜소한 인간으로 만든다. 이와 같이 니체는 바닥 없는 삶을 두려워 마라고 가르친다.

니체가 공간적인 차원에서 바닥을 두고 그 경계를 허물었다면 삶은 마찬가지로 시간의 문제도 지니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자유정신, 성숙의 관점에서 얼마나 응축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자유로운 내가 되기 위해선 충분한 숙성이 필요하고 충분한 숙성은 오크통의 포도주와 같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니체는 이때 서두르지 마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기다릴 줄 아는 지혜라 말한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경박하게 뱉은 말이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묻는 질문에 빠르게 대답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에겐 함장축언 含藏蓄言의 지혜가 요구된다. 니체는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기다려 줄 줄 아는 시간이 필요하다 했고 칸트는 철학은 진리의 탐구도 아니고 지혜의 갈구도 아닌 인간 자체가 성숙해지는 것이라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 즉 함장무언을 말하지 않았는가.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통해 현대인으로 하여금 그리스적 세계로의 거대한 전환을 주장한다. 그것을 다시 현대인, 더군다나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먼 곳인 베트남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시선을 돌려 물어본다면 삶의 문제, 삶의 긴장성을 어디까지 응축시킬 수 있는가, 응축된 것들을 얼만큼 자기 변화로 이끌어 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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