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6,Friday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본질

유자광을 몰락시킨 임사홍

한풀이를 통하여 조선에 타격을 주다

지난 이야기
연산군은 의도적으로 무오사화를 만들었고 대간 권력을 약화 시켰습니다. 지나친 대간권력을 억제하고 균형 잡힌 권력을 활용하여 정치를 했으면 진일보한 조선 사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론에 재갈을 물린 연산군은 독재권력을 추구합니다.

간신의 대명사 임사홍
연산군은 서자 출신 유자광을 이용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켰습니다. 무오사화의 결과 삼사 대간들의 권력은 위축 되었으나 만족하지 못 합니다. 무오사화 후 국왕, 대신, 삼사는 권력의 균형이 이루어져 현재의 삼권분립을 연상 시킵니다. 무오사화 후 올바른 정치로 갔으면 조선의 정치문화는 더욱 발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한 연산군은 독재권력 구축을 위해 또다른 사화를 일으키는데 이른바 갑자사화 입니다. 이번에는 간신의 대명사 임사홍이 주역 배우로 등장합니다. 우선 임사홍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임사홍은 1445년 좌리공신 임원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어려서 부터 영특했던 그는 20세 나이에 알성문과에 급제 하여 소년 등과를 합니다. 집안도 화려하여 임사홍 본인은 효령대군의 세째 아들 보성군의 사위였고 큰아들 광재는 예종의 사위, 셋째 아들 숭재는 성종의 사위가 됩니다. 중복된 왕실의 외척이 된 임사홍은 삼사 관원들의 견제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임원준을 닮아 탐욕이 많고 권력욕이 강해서 임사홍은 일찍 출세를 합니다. 임사홍은 33세에 도승지로 임명되는데 그의 처세술이 뛰어난 측면도 있으나 그는 시문, 서예, 중국어 능통자 입니다. 대간들의 간언에도 임사홍이 출세가도를 달린 이유는 외교문서 작성 및 중국어 실력을 인정 받은 때문이기도 합니다. 대간들의 견제를 물리치고 성종은 임사홍의 재주를 쓰고 싶어 했습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출세가도를 달리던 임사홍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성종 8년 흙비가 내리자 대간들은 이를 하늘의 경고라며 국왕의 근신과 금주령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임사홍은 흙비가 내린 것은 가뭄 홍수 등과 같이 기후변화 이므로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합니다. 사림파 대간의 의견에 반대한 임사홍은 사림파 대간 공공의 적이 됩니다. 사림파는 임사홍에게 소인이란 낙인을 씌우고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당시 임사홍은 도승지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요즘의 대통령 비서실장 입니다. 국왕 측근의 실세 도승지 조차도 쉽게 탄핵하는 당시 대간들 위세는 대단 했습니다

과부 조씨 무고 사건
처음에는 임사홍을 변호하던 성종도 과부 조씨의 무고 사건 이후 상황은 급변합니다. 과부 조씨의 사건은 과부가 된 조씨가 재혼을 했는데 박씨가 보쌈을 하여 강제로 한 혼인이냐 아니냐 라는 사건인데 조씨의 오빠가 여동생 조씨의 혼인을 취소 해달라고 요청한 사건입니다. 성종때 까지는 여성의 상속과 과부 재혼을 허용 하였으므로 재산 상속에 관계되므로 소송이 일어났습니다. 조선시대 법률은 죄인이 무죄가 되면 고변자는 죄인이 원래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과부 조씨 무고 사건에 관련된 고변자들은 무고로 판명되면 자신들이 처벌을 받아야 하므로 처벌을 면하고자 승정원에 청탁을 합니다. 또한 이에 대응하여 임사홍, 유자광, 김언신 등도 자주 만나 대간들의 탄핵에 대비책을 의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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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 유자광 김언신 세명은 무리를 지어 당여(당파)를 만들었다는 죄로 삼사 대간들의 탄핵을 받습니다. 이에 성종은 당여를 만든 임사홍과 유자광을 소인이라 규정하고 세명을 귀양 보냅니다. 그러나 반대편 청탁을 한 사람과 청탁을 받은 사람은 조사도 없이 넘어 갔습니다. 삼사 대간들의 힘을 느끼게 되는 사건입니다. 사림파들은 반대편 사람에게 당여(당파) 만든 죄를 물어놓고 훗날 사림파 자신들은 수 많은 당파를 만들어 집단 이기주의 성향을 나타냅니다. 그 후 유자광 김언신은 곧 귀양 해제가 되지만 임사홍은 20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게되니 분노가 극에 달합니다.

축소된 여성권리
과부 조씨 사건은 임사홍의 정치인생을 바꾸고, 갑자사화를 잉태하고, 또한 조선의 풍속을 바꾸게 됩니다. 이때부터 여성은 한 남편만 섬겨야 한다는 강상의 법도 (성리학 논리)를 세우게 됩니다. 따라서 남편이 죽으면 평생 수절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시댁에서 죽은 남편을 따라 가라고 자살을 강요한 경우도 꽤 흔한 일입니다. 만약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을 거부하면 자살을 위장한 살인까지 벌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남편의 저승길을 따라가면 국가에서 열녀문을 (홍살문) 세워주고 토지를 하사하고 세금을 면제 시킵니다. 이는 경제적인 혜택도 누리고 가문의 위상을 세우는 방법이 되므로 양반들은 며느리를 죽이고 가문을 살리는 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성종 때 출발한 이러한 풍속은 사림파가 집권한 선조때 부터 널리 퍼집니다.

또한 여자는 상속을 받을 수 없도록 관습이 정해집니다. 과부 조씨 사건도 결국 상속에 관한 문제 였는데 그 해결책은 남자들만 상속 받는 것으로 됩니다. 성종의 유교 지상주의 정책이 낳은 모순은 정부 관료, 양반들에게 관대하고 여성들에게 가혹한 판결이 많았죠. 연산군 어머니를 죽인 사례나 어우동 사형 판결이 대표적인 사례 입니다. 독자들이 잘 아는 어우동은 남편의 버림을 받고 수 많은 남성들과 간통을 합니다. 이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종은 어우동과 간통한 남자들의 죄는 불문에 붙이고 여성이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강상의 법도를 어긴 죄로 공개 처형을 시킵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어우동의 여종도 공개 처형을 시키는데 죄목은 상전이 잘못된 길을 가면 죽음으로 막아야 하는 것이 아랫 것들의 할일인데 주인을 따라 잘못된 길을 동행한 죄입니다. 즉 주인이 시키는대로 실천한 죄입니다. 이같은 판결을 내리면서 성종이 외친 한마디는 “감히 여자들이” 입니다. 이는 성종실록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사화의 본질: 차별받은자의 한풀이
조선건국 100년이 지나면서 훈구파의 부패가 발생하고, 대안 세력 사림파는 대간 권력을 만들어 새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또한 사림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소외계층을 만듭니다. 즉 고려시대 보다 강화된 신분제도로 서자들을 차별하고 사림파 대간의 중론에 반대하는 양반들을 정계에서 배척하여 소외계층을 만듭니다. 이렇게 해서 새로 생긴 소외계층은 무오사화, 갑자사화의 주연으로 활약합니다. 두번의 사화를 일으킨 주연들은 권력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차별받은 자의 한 풀이에 가까운 사건입니다.
연산군은 세자시절 부터 부왕 성종이 대간들에게 쩔쩔매는 모습으로 신하들을 설득시키는 아버지의 모습을 싫어 하였고 태종 같은 군왕이 되고 싶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해원을 추구 했는데 마지막 작업인 왕비 추존과 묘지 이장 문제로 대간들과 충돌합니다. 폐비 윤씨를 왕비로 추존하고 아버지 성종의 능에 함께 모시려고 했으나 대간들의 반대가 심해 분노를 삭히던 중 연산군의 외할머니 신씨를 만난 임사홍이 연산군을 부추겨 갑자사화가 발생합니다.

월탄 박종화 선생의 소설 “금삼의 피”에 소개된 것 처럼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을 때 비단 치마에 토했다는 선혈을 본 연산군은 거의 미치광이로 변합니다. 세자시절 부터 어머니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알고 있었는 듯 하지만 아버지 성종이 결정한 사건이라 어쩔 수 없었고 흘러가는 이야기 정도만 듣던 연산군이 “금삼의 피”를 보는 순간 복수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또한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복수의 방법을 제시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연산군은 무능한 군주 였지만 정치 감각만은 뛰어나서 임사홍을 이용하여 한 풀이도 하고 국왕의 권력도 확실히 다지는 계기로 만듭니다. 또한 복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냉정한 군주 연산군 입니다. 이렇게 갑자사화는 주연 임사홍, 감독 연산군의 작품이 되어 발생 합니다. 갑자사화의 서막을 여는 사건은 연산군이 아버지의 후궁 엄숙의 정소용 두 여인을 죽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외할머니 신씨의 주장은 “후궁들이 투기하여 어머니를 참소했는데 장본인은 엄숙의와 정소용이다” 연산군은 외할머니의 말을 믿고 두 후궁을 궁궐 뜰에 묶어 놓고 몽둥이로 직접 때리다가 두 후궁의 아들 안양군과 봉안군을 불러 각자 자기들의 어머니를 때리라고 명령 합니다. 깊은 밤 몽두 (죄인의 얼굴을 가리는 검은 주머니)를 씌워서 어머니를 몰라본 안양군은 매를 치고 봉안군은 어머니임을 직감하고 차마 매를 칠 수 없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후궁들은 문초를 당하면서도 연산군을 이렇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네 아버지와 살을 섞은 여인들이다 당연히 너는 우리를 어머니의 예로 대해야 하거늘 이 무슨 행패냐” 이는 야사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본격적인 갑자사화 그리고 이후 조선의 정치변화는 다음 시간에 살펴봅시다.


다음 이야기
연산군은 어머니의 복수를 하면서 수십명 신하들을 죽입니다. 그러나 복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고분고분 하지 않았던 신하들 까지 죄를 엮어 죽입니다. 그리고 연산군은 폭군의 길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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