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0,Saturday

프랑스 낭만주의의 거장, 카미유 생상

한국만큼 기획연주가 풍성한 나라가 있을까? 해마다 방학 시즌이 되면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음악회가 전국의 주요 음악회장에서 열린다. 이런 음악회의 단골 레파토리에 절대 빠지지 않는 작품이 ‘카미유 생상(1835~1921)’의 <동물의 사육제>인데, 비단 어린이나 청소년뿐만 아니라 클래식 문외한들도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까닭에 생상의 <동물의 사육제>는 언제나 기획 프로그램 섭외 0순위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깐, 혹시 프랑스 작곡가 생상의 작품들 중 유일하게 알고 있는 곡이 <동물의 사육제>인 분들 계실까?

19세기 중,후반의 프랑스는 클래식 음악에 있어서 변방에 있는 나라였다. 당시 서양음악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음악적 위세에 눌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때에, 프랑스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고군분투했던 작곡가가 바로 ‘샤를 카미유 생상(Camille Saint-Saens)’이다. 그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음악의 근간을 만든 음악가로서 이후 등장한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대들보 ‘드뷔시’와 ‘라벨’에게 영감을 주었던 음악가이다. 생상이 우리에게 남긴 훌륭한 작품은 수없이 많다. 오늘은 <동물의 사육제>의 인기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생상의 작품 두 곡을 소개한다.
생전 출판을 거부당했던 <동물의 사육제>
관현악 모음곡 <동물의 사육제>는 1인의 인물과 13마리의 동물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으로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생상의 이름을 전 세계에 각인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생상은 살아 생전 이 작품이 출판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왜 그랬던 것일까? 작곡배경을 살짝 들여다 본다.
1886년의 여름, 생상은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쿠르담’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친구 ‘르부크’와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마침, 르부크는 생상에게 자신이 음악감독을 맡은 사육제(카니발)에 대해 설명을 하던 중이었다.
“이번 사육제의 최종일 음악회에 사용할 작품이 필요한데, 어떤가? 자네가 쉬고 있는 중이라 미안하긴 한데, 부담없이 가벼운 스타일로 한 곡 써 준다면 더 없이 고마울 것 같네, 동물의 사육제 어떤가?”
이에 생상 왈, “동물의 사육제라고?…” 당시 50을 넘긴 생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동물에 대한 묘사를 하려니 잠시 주춤했다. 그러더니 곧 거실 한 켠에 있던 피아노로 다가가 즉흥적으로 건반을 눌러대기 시작했다. “ 어때? 이거 수탉소리 같이 들리나?” “ 잠깐만, 음…백조은 이런 식으로… 뻐꾸기는 요런 식으로…음, 재미 있겠는데?.” 이렇게 해서 생상은 거의 즉흥적인 느낌으로 <동물의 사육제>를 완성했다. 각 곡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1)서주와 사자왕의 행진 2)수탉과 암탉 3)당나귀 4)거북이 5)코끼리 6)캥거루 7)수족관 8)커다란 귀를 가진 인물 9)뻐꾸기 10)커다란 새장 11)피아니스트 12)화석 13)백조 14)피날레
생상은 이 곡이 고전적이고 진지한 자신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는 다소 유치한 작품이라고 여겼던 듯 싶다. 그냥 친한 친구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 만든 가벼운 여흥적 음악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이 유일하게 좋아했던 ‘백조’만을 제외한 나머지 곡들을 절대 출판하지 말라고 가족들과 출판사에 신신당부했었다. 그는 살아 생전 절대 상상하지 못했겠지? 그의 사후, 이 작품이 자신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리게 하는 일등공신이 될 것이라는 것을.

죽음의 신은 해골들을 불러내고, 교향시 <죽음의 무도>
생상의 교향시 <죽음의 무도>는 중세 시대부터 전해져 오던 괴담이 토대가 된 ‘앙리 카잘리스’의 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의 내용이 괴기스럽다. 즉 할로윈 데이의 자정, 교회 종소리가 열 두 번 울린 후 죽음의 신이 죽은 자들의 묘비를 두드린다. 똑똑똑!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깬 해골들은 무덤 밖으로 나와 동이 틀 때까지 광란의 춤을 추다가 첫 닭이 울면 놀라서 자신들의 무덤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는 내용이다.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괴상한 시. 시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고자 번역본을 옮겨적어 본다.

지그(Zig), 지그, 지그! 죽음의 무도가 시작된다.
발꿈치로 무덤을 박차고 나온 죽음은, 한밤중에 춤을 추기 시작한다. 지그, 지그, 지그 ! 바이올린의 선율을 따라, 겨울바람이 불어오고 밤은 더욱 깊어만 가며, 린덴 나무로부터는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하얀 해골이 자신의 수의를 펄럭이며, 음침한 분위기를 가로질러 나간다.
지그,지그, 지그 ! 해골들은 껑충껑충 뛰어다니고,
춤추는 뼈들이 부딪치며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중략) 쉿!! 수탉이 울자, 헤골들은 갑자기 춤을 멈추고 어디론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 불행한 세계를 위한 아름다운 밤이여! 죽음이여 영원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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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무도>의 탄생은 중세시대 사람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에 기인한다. 즉 의료 기술이 상당히 낙후했던 당시, 수많은 전쟁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던 사람들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 치를 떨면서도 그것을 ‘결코 피할 수 없는 인간사의 일부’로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이라는 주제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춤을 만들고, 음악을 만들었다. 그러면 죽음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붙들고 말이다. 그러한 맥을 타고 내려와서인지 생상의 <죽음의 무도>는 등골이 오싹할 것 같은 시의 내용에 비해 악곡이 전반적으로 쾌활하고 밝다. “죽음 그 까짓거 올테면 오라지!! ” 라며 화통하게 내지르는 자조의 목소리 같다. <죽음의 무도>를 듣고 있다보면 자연스레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게 된다. 어쩌면 귀신들의 춤사위를 그린 괴기스러운 곡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게 될 수도 있다. 너무 흥겨워서!

삼손과 델릴라, <그대 목소리에 내 마음이 열리고>
생상이 작곡한 <삼손과 델릴라>는 성경의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영웅 ‘삼손’을 주인공으로 한 오페라이다.
우리 모두가 아는 삼손의 스토리이다.

신(하나님)의 뜻에 따라 히브리(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된 삼손은 괴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블레셋(팔레스타인)이 보낸 스파이 델릴라를 만난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과 신에게 선택받은 사실을 부정하고 그녀에게 격렬히 빠져든다. 삼손의 힘의 원천이 머리카락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델릴라는 그가 자는 사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버린다. 머리카락이 잘려 괴력을 잃게 된 삼손은 신의 존재를 부정한 벌로 시력을 잃게 되고, 결국 블레셋 사람들의 갖은 멸시와 손가락질을 받으며 연자방아를 돌리는 신세가 된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런 삼손에게 빈정된다. “도대체 니가 말하는 신이 있기는 한거냐? 너의 신이 니 눈을 뜨게 해 준다면 내 그 신을 믿어보지 !!” 블레셋의 축제에 끌려나온 삼손은 신전의 거대한 대리석 기둥을 부여잡고 신을 향해 절규하며 기도한다. “신이시여! 제게 단 한번만 예전의 힘을 주십시오 !!! ” 자신의 고난이 지난 날의 방탕함 때문이었음을 신께 고백하는 삼손. 뜨거운 눈물로 속죄하는 삼손의 몸에 다시 한 번 예전의 힘이 솟구친다. 그가 신전의 기둥을 모두 무너뜨리자, 축제에 참가한 블레셋 사람들은 허물어지는 신전에 깔려 삼손과 함께 죽음을 맞게 된다.

적과의 죽음으로 장엄하게 끝나는 3막의 그랜드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 이 오페라의 백미는 단연 2막에서 델릴라가 부르는 아리아
‘그대 목소리에 내 마음이 열리고’이다. 사악한 흑심을 숨기고 삼손의 괴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집요하게 유혹하는 장면에서 델릴라가 부르는 노래인데, 고음역대의 소프라노에만 익숙한 관객이라면 한 번쯤 들어봐도 좋을 매력적인 메조 소프라노의 노래이다. 물론 오페라 가수의 수준 높은 연기가 필요하겠지만, 거기에 풍부한 성량과 표현력을 지닌 메조 소프라노 목소리가 더해진다면 이전에 전혀 만나보지 못했던 고혹적인 여성 저음역대 목소리의 매력에 반하게 될 수도 있다.

김 지 희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졸업(교육학 학사) / 미국 맨하탄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석사) / 한세대학교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박사) / 국립 강원대학교 실기전담 외래교수(2002~2015) / 2001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 이후 이태리, 스페인, 중국, 미국, 캐나다, 불가리아, 캄보디아, 베트남을 중심으로 연주활동 중 / ‘대관령 국제 음악제’, 중국 ‘난닝 국제 관악 페스티발’, 이태리 ‘티볼리 국제 피아노 페스티발’, 스페인 ‘라스 팔마스 피아노 페스티발’ 《초청 피아니스트》 E-mail: pianistkim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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