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6,Friday

중종반정이후 사대부의 보신주의와 조광조의 등장

 

지난 이야기
폭군 연산을 몰아내고 등극한 중종은 117명 반정공신을 책봉 합니다. 공신 80%가 가짜 말이 나올 정도로 엉터리 공신책봉은 대간들의 공격대상이 됩니다. 박원종 등 반정 3대장은 대간을 무마하려고 유자광 혼자 유배 보내는 선에서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러나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고 잠복기를 거쳐 다시 수면위로 부상합니다.

유유부단, 간접통치의 왕 중종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정통성도 미약하지만 중종의 성격도 과단성이 부족해서 측근을 통한 간접적인 통치를 하는 군왕입니다. 신하들에 의한 조선의 첫번째 반정이 성공하자 제2 제3의 반정을 경계하는데 이는 임금과 반정 주역들의 공통된 걱정입니다. 반정 다음해에 이과의 역모사건을 필두로 반정 3대장의 권력 독식에 불만을 가진 신복의는 반정 3대장 제거를 시도했으나 거사 전에 발각되어 참수 당합니다. 또한 유자광은 유배간 후 무우사화의 사초 누설자가 이극돈 (이세좌의 숙부)라고 밝혔고 이에 이극돈은 직첩과 공신책봉이 취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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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어수선한 조정 분위기 속에서 반정의 핵심 멤버 박원종이 사망합니다. 박원종 사망 2년 후 유순정이 사망하고 다시 1년 후 성희안 마저 사망하니 반정 3대장이 모두 사라집니다. 반정 3대장이 살아 있을때도 불만 세력을 아우르지 못했는데 이제는 지방 수령들의 횡포가 더해져서 백성들은 힘이 듭니다. 연산군 시절부터 힘든 삶을 살아온 백성들의 생활은 정권이 바뀌어도 별반 나아지질 않습니다. 게다가 중종의 입장은 반정 3대장들이 필요악 같은 존재로 두렵지만 옥좌를 지켜주는 사람들 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정의 핵심들이 사라지면 중종의 입장에서는 홀로 서기를 할 좋은 기회이건만 중종은 왠지 허전하고 불안합니다. 반정 3대장의 사망에 대한 중종의 입장은 무서운 사람들이 사라지니 편한 느낌을 가지면서 정국이 불안해질 것 같은 걱정이 겹치는 묘한 심리적 상태입니다. 이렇게 묘한 입장에 처했을때 중종은 조광조를 등용 합니다.

조광조는 누구인가?
먼저 조광조에 대해 살펴봅시다. 김종직의 3대 제자 중 김굉필은 1498년 무오사화에 연류되어 평안도 희천 묘향산으로 귀양을 갑니다. 당시 만 16세 젊은 조광조는 역참을 관리하는 찰방에 부임한 아버지 조원강을 따라 희천으로 갑니다. 때마침 김굉필은 희천으로 유배를 와서 조광조와 만나게 되고 둘은 사제의 연을 맺게 됩니다. 조광조의 뛰어난 학문적 재질을 발견한 김굉필은 조광조에게 성리학의 진수를 전수합니다. 조광조는 6년간 김굉필의 학문을 전수 받았고, 1506년 갑자사화에 연류된 김굉필은 참수 당합니다. 그후 혼자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한 조광조는 조정에 출사하기 전부터 사림의 종주로 추앙 받습니다.

1510년 만 28세의 늦은 나이로 진사시 수석 합격을 한 조광조는 성균관 유생으로 공부를 합니다. 성균관 유생으로 입학한 다음해 성균관 유생을 대표하여 중종에게 중용을 강의합니다. 1515년 반정 3대장이 모두 사망한 다음해에 조광조는 알성시에 합격하여 사간원 정언이 되어 대간의 일원이 됩니다. 중종에게 개혁정책을 제시하고 중종은 조광조를 깊이 신임하게 되어 반정 3대장의 빈자리를 조광조가 채우게 됩니다. 이때부터 조광조는 4년간 고속 승진에다 많은 개혁을 추진 하는데요 하나씩 살펴봅시다.

공신견제와 구세주가 된 조광조
즉위 10년차가 되자 중종은 정치에 눈을 뜨게되고 반정공신들 전횡을 제어할 필요를 느낍니다. 즉 부왕 성종과 같은 길을 걷고자 한 것입니다. 공신 견제를 위해 조광조를 등용 했으나 중종 자신이 조광조를 좋게 보고 능력이 있는 젊은 인재로 본 측면도 있습니다. 조광조는 과거를 통해 갓 등용된 사간원 정언시절 중종은 국사에 대해 신하들의 의견을 묻는 구언을 명합니다. 당시 김정 박상 두사람은 중종의 첫번째 부인 신씨를 폐서인 시킨 사건은 반정공신들의 안전을 위해 국모를 희생시킨 사건이라는 의견을 중종에게 보냅니다. 중종은 김정 박상 두사람의 상소를 승정원에 보관 시키고 문제삼지 말 것을 명령 합니다. 그러나 대신과 사림 합동으로 두사람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 합니다. 임금 뜻에 반하는 신하들의 주장에 중종은 난감합니다.

그러나 관직에 처음 등용된 조광조가 임금 중종의 구세주 역할을 합니다. 조광조의 상소 내용을 살펴 봅시다. “전하께서 신하들의 의견을 듣는 구언을 명령하셨고 이에 답한 신하의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채택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이러한 법도를 잘아는 대신과 대간들 대부분 두사람을 처벌하라 탄핵하니 이는 국가보다 당파를 우선하는 행동 입니다. 탄핵한 사헌부 사간원 관원들을 전부 파직 하소서 신은 이러한 대간들과 같이 국사를 볼 수 없습니다.” 올바른 선비의 기개를 보여준 상소는 조정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중종의 뇌리에 깊이 각인 됩니다. 그래도 양심적인 관원들은 조광조를 두둔하고 무엇보다 임금 중종의 관심을 받습니다. 이에 중종은 조광조의 말이 옳다는 판결을 하고 사헌부 사간원 대간 전원을 교체합니다. 새내기 대간 한명이 대간들 전부를 쫓아낸 사건으로 조광조는 주목 받습니다. 실로 화려한 등장 입니다.

훗날 조광조의 상소는 신의 한수로 칭송 받지만 이는 조광조가 평소 가진 소신이라 평소 생각을 말한 것 입니다. 정치에 몸 담으면 자신의 이해관계를 우선하기 때문에 간단한 상식도 생각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정의 시끄러운 사건을 간단히 해결한 조광조는 이때부터 출세가도를 달립니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일이죠. 그러나 조광조는 항상 정도를 걷는 국가, 성리학 우선 국가를 꿈꾸며 조선을 개혁하고자 합니다.

보신주의에 물들은 선비들 VS 성리학 원리주의자 조광조
조광조가 등장할 당시 조선 선비들은 정의감, 학문연구, 백성에 대한 사명감 등 선비의 기본 자세보다는 시류에 편승하여 자신의 안전과 출세 등에 더 관심을 가지는 풍토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풍토는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해 생긴 보신주의 입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선비의 본분과 도덕정치를 강조 합니다. 즉 조광조의 “도학정치” 입니다. 상소사건 후 조광조는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되어 중종이 참석한 경연은 조광조의 독무대가 됩니다. 중종은 명석한 논리를 펴는 조광조에 흠뻑 빠져듭니다. 조광조는 성리학 이념에 충실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유교 논리는 법보다 앞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민생안정 부국강병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광조의 대표적인 정책 제안을 살펴봅시다.

야인 속고내가 변경을 침범하여 함경도 갑산에서 사냥을 하는데 장수들은 기습하여 체포할 것을 건의합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몰래 기습하는 것은 소인들이 하는 짓입니다. 문서를 보내 속고내의 잘못을 먼저 꾸짖고 반성하지 않으면 선전포고를 한 후 당당하게 대군을 보내 정벌하는 것이 군자의 나라 입니다.” 이에 장군들은 “농사짓는 방법은 농부에게 물어보고 길쌈은 여종에게 묻듯이 군사 전략은 장수에게 물어 보소서” 라고 절규를 합니다. 그러나 중종은 “군자의 대도를 밝힌 조광조의 의견에 깊은 뜻이 있다” 라고 결정합니다. 당시 속고내는 만주 여진족 중 세력이 가장 큰 집단으로 조선의 골치거리 입니다. 문제는 당시 조선의 국력으로는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를 정벌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속고내를 꾸짖고 정벌하는 군자의 나라는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사건 후 조광조는 관직 진출 2년만에 홍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모든 대간들과 사림들이 추종하는 사림의 종주가 되어 재상보다 큰 권력을 누립니다.

또한 조광조는 소격서를 철폐할 것은 요구하는데 소격서는 기우제나 기청제를 지내는 공간 입니다. 조광조는 주장하기를 조선은 유교국가이고 소격서는 도교의 이념을 담고 있으며, 소격서는 미신이고 이단입니다. 또한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은 천자국에서만 할 수 있으니 제후국 조선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발언을 합니다. 당시 사림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중종의 모후 자순대비는 힘들때 위안이 되는 공간이 사라지면 서운하다는 뜻을 중종에게 전합니다. 중종도 성군 세종대왕 성종대왕 시절에도 있었던 소격서를 굳이 없애야 하느냐? 또한 대비께서 반대하신다 라고 반문 합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거침없이 주장합니다. 세종대왕 성종대왕의 유일한 잘못이 바로 소격서 존치 입니다. 사소한 문제에도 양보는 없고 오히려 대간 유생 등 모든 사림이 조광조를 지지하니 중종도 할 수 없이 소격서를 폐지합니다. 그러나 임금을 불쾌하게 만들면서 소격서 폐지라는 작은 일을 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는 이치를 조광조는 놓치고 있었습니다. 소격서 폐지 후 조광조는 모든 사림들에게 이제는 성리학의 국가가 되었다며 자축을 합니다. 정치는 모르고 성리학 이론에 의지한 조광조는 임금의 총애를 잃어가고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다음 이야기
조광조는 엉터리 공신 책봉을 받은 소인들의 공신 특혜를 몰수해야 한다는 위훈삭제를 주장하며 중종을 압박 합니다. 사림 전체를 적으로 만들 수 없는 중종은 조광조의 요구를 들어 줍니다. 하지만 곧이어 중종은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는 계획을 세웁니다. 이른바 “기묘사화” 발생입니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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