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19,Friday

‘데카메론’ – 조반니 보카치오

역병 속에서 피어난 희망
서기 1348년, 유럽에 어둠의 그림자가 덮쳤다. Pest 다. Pest, 죽은 시체에 검은 반점과 고름이 남기 때문에 흑사병이라고도 한다. 쥐로부터 전해진다고 여겼던 흑사병은 화학 테러전의 원조 격으로, 부패한 시신의 페스트 균이 쥐에 옮아 가고 그 쥐가 다시 곡창과 사람의 음식에 옮기면서 14세기 유럽을 죽음의 대륙으로 만들었다. 피렌체 사람 조반니 보카치오는 이때 데카메론을 쓴다.

당시 피렌체는 자유였다.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때 동양과 서양의 무역 중심지에 피렌체가 있었다. 중세를 지배하던 가치, 그러니까 신앙, 민족, 집단, 선입견 같은 진부한 사유들이 오랜 십자군 전쟁과 교회의 몰락으로 인해 서서히 마감을 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르네상스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니 앞서 읽었던 단테와 브루넬레스키 같은 건축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비롯한 화가, 조각가들이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다. 그러나 이 시기, 유럽 대륙을 휩쓸던 역병으로 인해 인간이 인간을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던 야만적인 시대가 함께 전개되는데 보카치오는 바로 이때에 ‘인간’을 발견하려 한 이야기 꾼이었다.
데카메론은 흑사병이 창궐하던 때 역병을 피해 시골로 들어가 일곱 여인과 세 남자가 열흘 간 100편의 이야기를 서로 주고 받으며 즐겼던 소설적 기록이다. 수도사들의 추문, 위선에 관한 폭로, 정치적 풍자, 적나라한 성적 묘사, 부자와 가난한 자의 불편부당함에 관한 해학, 인간이 추구하는 말초적 쾌락, 남녀 치정에 얽힌 윤리의 부제, 사랑의 시 등이 가득 담겨 있어 그 시대의 생활상을 낱낱이 알 수 있다. 고전 속으로 들어가보자.
예를 들면 이러하다. 열명의 선남선녀가 해질 무렵, 깐초네를 부르고 난 뒤 흥이 잦아 들면 자기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서로에게 들려 주는 것이다. 셋째 날 첫 번째 이야기는 수녀원으로 들어간 남자 정원사 이야기다.

“람포레키오의 마제토는 거짓으로 벙어리 흉내를 내어 수녀원의 정원사가 되고 수녀들은 앞을 다투어 그와 자게 된다. 수녀는 그에게 말하기를
수녀: 세상에서 남자와 여자가 하는 즐거움만큼 좋은 것은 없대요. 무슨 그런 말씀을 다 하세요? 우리는 이미 하느님께 순결을 약속했지요. 아아, 그러나 날마다 얼마나 많은 일들을 약속하고 있는지! 하지만 무엇 하나 지켜지고 있지 않잖아요? 우리가 약속했지만 하나고 둘이고 지켜지고 있는 것이 뭔지 한번 말해 보세요.
정원사: 하지만 만일 배가 부르면 어떻게 하죠?
수녀: 아직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그런 불길한 일을 다 생각하세요?”

이어지는 이야기는 직접 책으로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해 하시는 독자들을 위해 소개한 김에 셋 째날 열 번째 이야기를 추가로 인용한다. 갈수록 해학과 유머가 많아지고 묘사는 자세하다. 우리 나라 남사당패의 골계미에 버금가는 풍자로 당시 무소불위의 교회권력을 우회하여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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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알리베크가 은자가 되자 루스티코라는 수도사가 악마를 지옥에 몰아넣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소녀: 루스티고 님, 그 툭 튀어나온 게 뭐예요, 저한테는 그런 것이 없는데?
수도사: 오오 소녀여 이것이 내가 몇 번이나 말한 악마다. 알겠느냐? 이것이 이제 더 참을 수가 없을 만큼 몹시 나를 괴롭히고 있느니라.
소녀: 아아, 하느님, 고마워라, 제가 루스티코 님보다 행복한 것 같네요. 저한테는 그런 악마가 없으니까요.
수도사: 그렇다. 그러나 대신 내가 갖지 않은 다른 것을 그대는 가졌느니라.
소녀: 어마, 그게 뭔데요?
수도사: 지옥을 갖고 있느니라. 분명히 말하지만 하느님은 내 영혼을 구해 주시기 위해서 그대를 이리로 보내신 줄 안다. 만일 이 악마가 이런 괴로움을 내게 주더라도, 그대가 나를 가엾게 여기고 그 악마를 지옥으로 몰아넣어주기만 한다면, 그대는 내게 최대의 만족을 주게 되느니라. 게다가 그대는 하느님께 다시없는 기쁨을 드리며 봉사하게 되느니라. 그대가 말하듯이 그 때문에 그대는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온 것이니까.
신앙에 불타 있던 소녀가 대답한다.
소녀: 오오, 신부님, 제가 지옥을 갖고 있다면 좋으실 때 쓰도록 하셔요.
수도사: 소녀여 그대에게 축복 있으라. 그럼 행하기로 하리라. 악마가 내게서 나가도록, 지옥에 몰아넣도록 하리라.
소녀: 루스티코 님, 저는 하느님을 섬기려고 여기 왔지, 게으름을 피우려고 온 게 아녜요. 악마를 지옥에 몰아넣기로 해요.
하느님에 대한 가장 즐거운 봉사는 악마를 지옥으로 몰아넣는 일이라는 속담까지 생겨버렸다.”

Pest가 유럽 대륙을 휩쓸고 잘난 허울뿐인 종교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던 때, 자신의 피붙이가 죄다 죽어가는 광경을 본 그 시대 사람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시대의 기쁨은 무엇이고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미술, 건축 등이 화려한 날갯짓을 시작할 때였지만 Pest의 살풍경은 그 시대를 규정해 버린다. 보카치오는 Pest보다 더 무서운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던 인간의 부조리였음을 고발한다. 절망의 시대에서 유쾌한 희망을 선사함과 동시에 나약한 시대정신을 풍자했던 것이다. 야만과 어둠의 시대를 해학과 웃음으로 넘어서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데카메론의 문학적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풍모는 주름 없는 삶에서 오는 인자한 채 하는 가식이 아니라 죽음 앞에 있으면서도 존엄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에서 나온다. 뺨 한번 맞을 일 없는 풍요롭고 고상한 인생에서 인간적 기품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로 옆 사람이 죽어 나가는 참혹한 상황에서 쓰여진 데카메론은 그리하여 외설적 삼류 이야기를 넘어서는 것이다. 진가는 결과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규정하는 것이다. 코로나19 상황 아래 놓여 있는 우리의 지금은 700년 전 그때와 다른가? 코로나19로 인해 비로소 알게 되는 내면의 편견과 공공연한 인종주의, 잔인한 민족주의, 어이없는 국가주의는 꼭 그 시대 흑사병처럼 우리 안에 창궐하고 있다. 인류는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것 같다.

(참고한 책:“데카메론”Giovanni Boccaccio 지음, 한형곤 옮김, 동서문화사, 1975.10.01)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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