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April 5,Sunday

우리 의식 라는

중국 우한으로부터 시작된 코로나19가 이제 세계를 덮칠 기세이다. 지난 주 17번 환자가 발생했던 베트남도 하노이와 호찌민 등 대도시에서의 확산을 막기 위해 총력을 다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나 45번 확진자에 이르도록 순식간에 그 수가 늘고 있다. 우리가 한국을 걱정하던 사이에 코로나19의 포위망이 어느덧 우리 옆을 조여 오는 느낌이다.

그런데 본지에 실린 기사를 읽다가 눈길을 끄는 내용이 있었다. ‘코로나-19 격리 조치된 교민, 지원 성금 및 기증품 릴레이’라는 제목으로 제416호 교민소식에 실린 기사였다. 호찌민 한인회와 재난상조위원회에서 코로나19로 인해 격리되신 분들을 위해 한인단체와 기업, 교민들의 성금, 기증품을 전달받아 지원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코로나19로 인한 베트남 과수농가의 피해에 대하여 한국계 은행이 지원 협력을 한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이런 지원은 코참을 비롯해 여러 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두렵고 매서운 코로나 바람 속에서 훈풍과 같은 기사였다. 사실 평상 시 같으면 넘어갔을 페이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와중의 두 기사는 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인쇄된 활자 속에서 서로를 돕는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라면 한국에서도 다를 바 없다. 대구시와 경북지역이 신천지교도들의 어처구니없는 행태와 방역에 대한 실패로 심각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을 때 국민들이 보내준 성원과 격려, 그리고 지원은 그야말로 감동적이었다.
이런 기사들을 보고 있으면 참, 우리 민족이 다르긴 다르다 싶다. 외국에 가도 한국인은 같은 한국인을 꺼리는 특이한 속성을 가지고 있음이 사실이다. 아마도 마음 상하게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교민사회에서 받는 상처가 그런 경향을 만들어 내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위기 상황이 터졌다 하면 그간 어찌 되었건 함께 마음을 모으기가 어느 민족과도 비교할 수 없이 빠르고, 강한 것을 보면 이 또한 우리 민족이 가진 특성이 아닌가 싶다. 그럴 때마다 우리 민족이 얼마나 큰 장점을 가진 것인지 대단하다 싶으면서 자긍심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우리 민족에게는 상당히 극단적인 열정의 부분들이 있는 것 같다. 어느 공익광고에 ‘다이나믹 코리아’라는 카피가 있었는데 그 표현이 참 옳다고 생각된다. 우리 민족은 다이나믹한 불을 가슴에 품고 산다. 다만 그 뜨거운 불의 열정을 잘 다스려 방향을 잡는다면 놀라운 일을 이뤄내지만 그 불길의 방향이 제 멋대로가 될 때는 자칫 서로를 다치게 하는 일이 생기는 것 같다. 2002년 월드컵이 거의 20년 전의 사건임에도 회자되는 것이 그런 이유가 아닐까. 당시 히딩크감독과 국가대표축구팀이 불길의 방향을 제대로 한 길로 몰아줬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민족 전체의 열정을 아우르고 미래를 향해 불길을 달리게 하는 지도자를 가지지 못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불이 나서 치고 받고 싸우다 가도 서로가 어려운 지경에 빠지면 이렇게 헌신을 다하는 우리 민족의 강점은 어디서 왔을까? 문득 글을 쓰면서도 버릇같이 붙이고 있는 ‘우리’ 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란 것은 말하는 이가 자기와 듣는 이, 또는 자기와 듣는 이를 포함한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일인칭 대명사이다. 말하는 이가 자기보다 높지 아니한 사람을 상대하여 자기를 포함한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하고 말하는 이가 자기보다 높지 아니한 사람을 상대하여 어떤 대상이 자기와 친밀한 관계임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내 설명이 아니고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렇게 나온다. 정말 재미없고 뭔 소린지 더 모르게 적혀 있었다.
그래서 사전을 덮고 실제 활용 예를 생각해 보았다. 조국을 일컬어 우리나라라고 한다. 그때 겸손하게 표현한다고 저희 나라라고 하면 안되고 어떤 경우이든 우리나라는 우리와 나라를 붙여서 우리나라이다, 그런데 나라를 우리나라라고 하는 건 이해가 간다. 우리 글, 우리 회사, 이 정도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가족도 나의 가족이라 하지 않고 우리 가족이라고 한다. 아빠도 우리 아빠이다. 외아들이라도 엄마는 우리 엄마이다. 내 엄마가 아니다. 나도 한국인이지만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마나님도 내 마누라가 아닌 우리 마누라라고 말한다. 이건 좀 많이 나간 것 같다. 도대체 왜 이런 표현이 자연스러워졌을까? 혹시 우리 민족의 유전자에 우리라는 특별한 의식이 새겨져 있는 건 아닐까? 실제로 그런 의식을 지칭하는 용어가 있나 찾아보았다. 있었다. ‘우리의식’은 같은 집단에 소속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친밀한 결합체계의 결과로서 발생하는 강력한 일체감, 동일화 된 의식을 말한다고 한다.
나는 사회학자도 비교언어학자도 문화인류학자도 아니니 이의 근원을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언어 습관이 혈연을 매개로 모여 살며 농경생활을 영위했던 우리 민족의 오랜 공동체 습성에서 오지 않았을까 싶다. 또 이런 공동체일수록 이민족들의 위협을 이겨 내기 위해 강한 결속을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우리의 습성에 남아 모든 일에 우리를 붙이는 경우로 발전하지는 않았을까. 탁상에서의 근거 없는 생각일 뿐이지만. 그렇든 아니든 우리라는 표현을 한국인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특성 중 하나로 말해도 그리 틀리지 않는 듯하다.

본지에 실린 기사를 보면서 훈훈하고 자긍심을 느끼는 것도 너의 일이 아니고 우리의 일이라 느끼기에 그렇다. 부디 격리 중에 있는 교민들이 힘을 내어 이 시기를 잘 극복해 내기를 바란다. 우리뿐 아니라 코로나19의 피해를 입고 있는 베트남 사람들도 기운을 내었으면 좋겠다. 그들도 우리에게는 넓은 의미의 우리가 되기 때문이다.
모임에서 게임을 해보시라. 말할 때 우리를 사용하면 벌금을 내는 게임이다. 이런 게임을 한번 하고 나면 우리가 얼마나 우리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칼럼을 쓰는 동안 몇 번의 ‘우리’를 사용했을까? 문득 궁금하다. /夢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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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훈 성균관대학교에서 건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건축가이자 ‘몽선생의 서공잡기’, ‘크룩스크리스티’의 저자이며 일러스트레이터로도 활동했다.
현재 설계, CM전문회사인 정림건축의 베트남 법인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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