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17,Wednesday

‘기억 꿈 사상’ – 카를 구스타프 융


카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 1875~1961)

(참고한 책: “기억 꿈 사상” Memories, Dreams, Reflections 카를 구스타프 융 지음, 김영사, 2007.09.03)

인류가 꿈꿔온 인간
말년의 융에게 누군가 물었다. 당신은 신을 믿는가? 융이 답한다. “나는 신을 압니다.”

신을 안다고 당당하게 말한 인간이 있었다. 그 인간은 둘 중 하나일 테다. 오만하거나 인간의 의식한계를 넘어섰거나. 융의 대답이 그러했다는 걸 알고 난 뒤, 그에 대한 궁금증으로 휩싸였다. 나는 모든 생각과 할 일들을 책상 밖으로 밀치고 융의 책을 폈다. 단숨에 읽어 내렸다. 박진감 넘치는 장면에서는 손에 땀을 쥐었고 내가 이르지 못한 의식의 경지에서는 자세를 고쳐가며 읽었다. 책에서 융은 생물학적 인류의 조상을 더듬어 가듯 인간의 정신적 원류를 찾아 헤맨다. 그와 함께 나는 만유인력으로 시간을 잡아당겨 고대로 갔고 중세에 살다가 다시 원시로 갔다. 그렇게 나를 지탱하는 무의식을 이해하곤 무릎을 쳤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책을 덮고 평온하게 가라앉던 마음은 어느 순간 요동을 친다. 오히려 혼란에 빠진다. 유한자가 무한을 느끼지 못하듯 무한이어서 유한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의 미물성微物性이 가슴을 후벼 팠던 것이다. 융은 내가 느끼는 대부분의 정신적 감정이 내 것이 아니라 말한다. 내 생각이라 여기는 모든 게 이미 수 천 년 전을 살았던 인류의 꿈이라 설명한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나를 지배하고 있는 무의식이라 말하며 지금 당장, 자신의 원형을 찾아 나서라 선동한다. 알듯 말듯한 선문답을 견디지 못해 읽었던 책을 다시 펴고 두 번 읽기에 들어갔다. 세 번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황금 같은 말들을 건져냈다.

이 책은 융의 제자요 여비서인 아니엘라 야페가 융이 나이 82세가 된 1957년부터 5년 가까이 그와 줄기차게 대담을 한 결과 엮어진 자서전이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1875년 스위스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융은 책들로 빼곡하게 들어찬 아버지의 서재를 오가며 자랐다. 1900년, 바젤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융은 취리히 주 정신의학 대학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시작한다. 융은 그곳에서 정신의 병이 무의식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치유의 단서는 무의식이었다. 이때 그에게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계시처럼 찾아왔고 융은 곧 프로이트에 빠져든다. 이후 프로이트와의 이별 전까지 융의 삶은 프로이트에게 경도된다. 이후 자신의 무의식에 대한 의문으로 프로이트와의 결별하고 자기 안의 환상과 내적 무의식을 심도 있게 연구한다. 융이 죽기 직전 마지막 인터뷰 형식으로 쓰여진 ‘기억, 꿈, 사상’은 신경증으로 자신을 몰고 가기 직전까지 놓지 않았던 자기 내면연구의 인상적인 결과물이다. 특히, 책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11살 때의 일을 기억해 내고 돌로 성을 쌓기 시작하는 장면은 아름다움을 넘어 숭고하기까지 하다. 융의 책은 비록 자서전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한 인간의 사유가 어떻게 확장되고 종국에 이르는가를 잘 보여주는 철학의 체계서와 같은 느낌을 받는다. 특히 집단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의 펜이 떨리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어느 작가가 말한 융의 무의식에 관한 이야기가 인상 깊어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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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種)은 자신의 생명을 실현시킬 적합한 방식을 찾아 진화했다. 신체가 그런 진화의 산물이듯, 정신 역시 그렇다. 생명의 힘을 실현한 역사의 표현으로서의 정신. 경험에 앞서, 경험을 산출하는 조건. 삶의 지혜를 담은 온갖 민담과 신화, 종교적 이야기의 생산 공장. 정신은 인간 속의 자연이었고, 삶을 위한 창조적 힘을 담고 있었다. 이것이 융이 말한 집단 무의식이다. 이런 무의식은 우리의 의식과 의지에 앞서 존재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을 불쾌하게 느낀다. 하지만 불쾌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융은 말한다. 양배추가 똥거름에서 자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똥거름 냄새가 좀 불쾌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악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융에게 무의식은 그런 똥거름, 선악의 저편에 있는 자연이었다.’

책은 처음부터 에두르지 않고 곧바로 홍심을 찌른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Selbst : 인격의 가장 깊은 구심점) 실현의 역사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 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 이 말의 친절한 각주가 책 전체를 관통하는 구성이다. 융의 설명은 이렇다. 우리의 마음은 신체와 마찬가지로 조상 대대로 이미 존재해온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이란 없다. 단지, 아득한 옛날의 구성요소들이 끝없이 변화하여 재결합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나 마음은 현저하게 역사적이다. 우리 몸을 우리의 부모로부터 받았듯이 정신 또한 우리 안에서는 여전히 중세와 고대, 원시시대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야생적 인간이 오늘날처럼 왜소해진 적은 없었다. ‘수 만년 인류의 정신이 고스란히 새겨진 너와 나의 정신에 어느 순간 그런데 그와 반대로 우리는 발전의 분류로 휘말려 들어가 거친 폭력으로 미래를 향해 밀려가고 있’어서 인류 정신의 뿌리로부터 우리는 점점 떨어져나가고 있다.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어버지의 아버지들이 찾던 것’을 갈구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못할수록 우리도 그만큼 더욱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 뿌리에 대한 인식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개인은 집단의 한 부분으로 단지 중력의 혼(니체가 말한 집단정신)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며 호통친다. 잃어버린 나,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각자의 것이다. 오로지 삶을 해석하는 자에게 달렸다. 자신의 삶은 오직 자신만이 해석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융의 책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자. 그리고 물어야 한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나의 무의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가 경험한 내적 경험, 삶의 고비마다 결정했던 내 선택들은 나에 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때 나는 그것을 왜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가? 나는 왜 그때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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